어제 오늘 이틀간 강리나씨가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올랐습니다.
80, 90년대 영화계에서 활약했던 그의 이름이 웬일로 올라가 있나 봤더니
한 연예 프로그램에서 그의 근황이 소개된 것이 이유가 됐습니다.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며 옷도 재활용하는 곳에서 주워 입는다는...
90년대 섹시스타였던 그의 화려한 과거와 현재가 대비되면서
자극적인 화제가 됐던 것 같습니다.
저희 세대에 강리나씨는 영화 <서울무지개>라는 작품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배우를 꿈꾸던 여성이 최고 정치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당시 횡행했던, 속칭 *양사건으로 불리던 정치스캔들을 다뤘던 영화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고발성 짙은 영화임에도
당시 미성년자이던 우리세대에 관음증을 자극하는 에로영화로 한동안 인식됐었습니다.
이후 영화를 정당히(?) 보고서야 이 영화를 이해하게 됐지요.
그리고 어쨌든 이 당시의 최고 정치권력과 *양을 두고 실제 모델이 누구냐는 추측이
저잣거리에 난무하기도 했습니다....
전 동네 미용실에서 아주머니들이 이 이야기하며 침튀기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어쨌든 이 작품으로 강리나씨는 스타덤에 올랐고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외모는 당시 활동하던 다른 여배우들과는 달리
굉장히 선이 짙고 서구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의 과거 모습들을 한번 살펴보실까요..
우선 2007년 5월 레이디경향에 실렸던 그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배우 출신 설치미술가 강리나가 지난 3월 28일부터 4월 3일까지 일주일간 정동 경향갤러리에서 17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평범한 미대생에서 하루아침에 은막의 스타가 됐던 그녀가 돌연 영화배우 생활을 접고
다시 전업화가의 길을 들어선 지 10년, 강리나의 色다른 인생 스케치.
“영화가 주는 매력은 대단하지만 배우로서의 미련은 없어요. 다시는 안하고 싶어요. 저는 영화배우로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보여줬어요”
“강리나가 누구예요?”
지난해 인터넷에 올라왔던 인터뷰 기사 중, 한 신인 여자 탤런트가 자신을 강리나에 비유한 기자에게 한 말이다.
당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그 여자 탤런트의 나이를 감안하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한편으로는 “왜 강리나를 모르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적어도 사춘기 시절 그녀가 출연한 영화 포스터를 곁눈질로 힐끔거렸던 기자로서는 말이다.
“미술 쪽에 관심이 있다면 모를까, 모르는 게 당연하죠.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도 제가 출연한 영화에 대해 잘 모르던데요(웃음).”
1996년 영화 ‘알바트로스’를 끝으로 영화계를 떠나 본격적인 설치미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강리나(43)를 만나기 위해
정동 경향갤러리를 찾았다.
약수를 청하며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그녀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물론 ‘하나도’는 ‘인사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 데뷔가 1989년임을 감안했을 때, ‘안’은 진심이다.
달라진 것은 그녀의 손. 남자 손 못잖게 마디가 굵고 혈관이 솟아 있다.
“남자 손 같아요”라고 말하는 기자에게 강리나는 “손이 못생겼죠. 그동안 철을 자르고 칠을 배우느라 그랬나 봐요”라며 웃는다.
철을 소재로 전시회를 연 뒤 3년 만에 갖는 이번 전시회에서 강리나는 조개껍데기와 칠을 이용해
사람들의 시선을 매료시키는 영롱한 빛을 선보였다.
강리나는 자개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 중, 특히 전복껍데기를 좋아한다.
전복껍데기는 보는 각도에 따라 붉은빛과 푸른빛을 넘나들며 한 가지 색에 안주하지 않는다.
강리나는 그런 전복껍데기의 빛을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자개를 만드는 장인에게 직접 기술을 배웠다.
“처음 장인을 만났을 때, ‘젊은 여자가 자개 만드는 법은 배워서 뭐 할 거냐’며 안 가르쳐주시더라구요.
자개 만드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한참 동안 떼를 써서 겨우 배울 수 있었는데, 3년 내내 혼나기만 했어요.
그렇게 혼나면서 배웠는데도 아직 흉내밖에 못 내요.”
‘아사달의 정원’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번 개인전에서 그녀가 ‘흉내만 냈다’는 전복껍데기는 매혹적인 수많은 빛을 뽐내며 은은하게 반짝였다.
“배우가 되고 싶었으면 다시 붓을 잡지 말았어야죠”
강리나는 지난 1987년 CF를 통해 데뷔했다. 그리고 1989년 영화 ‘서울 무지개’에서 광기 어린 연기를 선보이며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10년 동안 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끼를 발산했던 그녀를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배우로 기억하고 있다.
매우 서구적인 얼굴이어서 혼혈아라는 의혹을 받을 만큼 개성이 강한 얼굴과 자유분방한 이미지는 당시로선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서운하냐구요? 전혀요. 사람들이 한때 잘나가던 여배우가 나이가 들어 변한 모습에 관심을 갖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일로 서운하면 이렇게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홍익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강리나는 우연한 기회에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여자는 무조건 시집만 잘 가면 된다’라고 생각한 그녀의 아버지는 강리나가 대학에 다니는 것도 못마땅해했다.
때문에 강리나는 일찍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그림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도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용돈인들 주셨겠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화구 공구함은커녕 물감 살 돈도 안 주셨어요.
미술 재료 사려고 대학 졸업할 때까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어요. 한번은 재료 살 돈이 너무 급해서 어머니 패물까지 팔았죠(웃음).”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강리나는 대학교 4학년 때, 학교 선배의 권유로
청바지 모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연예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제 한 달 용돈이 1만원이었는데, 30만원을 준다는 소리에 ‘무조건 하겠다’고 했어요.
그날부터 인생이 180도 바뀌었어요. CF도 찍게 되고 영화로 진출하게 됐죠.
영화의 영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분장하고 하루만 찍으면 된다고 해서 찍은 게 ‘우뢰매’ 3편이었어요.
제가 출연했는데도 분장하고, 가발 쓰고 붕붕 날아다닌 것밖에 기억이 안 나요.”
‘우뢰매’ 출연 이후 그녀는 김호선 감독에 눈에 띄어 영화 ‘서울 무지개’에 출연, 대종상 신인상까지 받았다.
그리고 영화 ‘클라이막스 원’ ‘러브러브’ ‘변금련’ ‘빠담풍’ 등에서 여배우로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유쾌하게 표현했다.
“딱히 목표 의식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눈 깜짝할 사이에 스타가 됐어요.
돈도 많이 벌고, 갑자기 얻은 인기가 싫지 않았어요.
다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그림만 그렸던 터라 갑자기 제 정체성을 잃어버린 느낌이었죠.”
“주연배우가 영화미술까지 담당했어요”
강리나는 영화배우로 성공한 뒤에도 미술에 대한 막연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지방 촬영을 갈 때, 그녀의 손에는 항상 화구가 들려 있었다.
촬영을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그녀는 호텔방에서 혼자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미술학도로 못다 이룬 꿈을 영화에서 찾으려 애썼다.
“영화계가 그때만 해도 주먹구구식인 게 많았어요. 제가 미대 출신이란 이유로 주연배우이면서 영화미술까지 담당했죠.
제가 미술상을 받아야 하는 작품도 있는데, 감독님께서 ‘너는 어차피 연기상 받을 테니까 미술상은 다른 사람 주자’고 해서
미술상을 놓친 적도 있어요. 비록 상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지만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혼자 동대문에서 원단을 구입하고 소품을 만드는 일은 연기를 알아가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연기자야, 무대감독이야? 한 가지나 잘해’라는 말도 들어야 했죠.”
“배우로서의 미련은 없어요”
강리나는 지난 2005년 포스코 미술관에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미사일과 폭탄 설치작품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 개인전은 자개의 빛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색을 그려냈다는 평이다.
“미술가로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평단은 말할 것도 없고 선화예고 때부터 함께 그림을 그리던 친구들까지 ‘넌 이제 비전문가야.
네가 동양화 정신에 대해 알고는 있니?’라고 말할 정도였죠.
저는 ‘너 연기 정말 못해. 넌 영화배우도 아니야’라는 말은 인정해요.
하지만 그림에 있어서 비전문가 소리를 들은 건 지금까지도 비수로 남아 있어요.”
강리나는 현재 중앙대에서 예술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또 전시기획 전문 회사 ‘rnk프로젝트’도 운영 중이다.
다양한 곳에서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펼치고 있는 강리나에게 배우에 대한 욕심은 없는지 물었다.
“영화가 주는 매력은 대단하지만 배우로서의 미련은 없어요. 다시는 안하고 싶어요.
저는 영화배우로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보여줬어요. 하지만 미술 쪽에서는 아직 더 보여줄 게 많아요.
지금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일을 또다시 접고 한때 제가 영화배우로서 누렸던 부와 인기를 다시 바라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죠.”
“능력이 없어서 남자 볼 줄 모른대요”
강리나는 얼마 전, 서울 도곡동에서 경기도 일산으로 작업실을 옮긴 뒤 결혼도 잊은 채 또다시 새로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녀는 “배우에서 화가로 돌아온 요즘이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독신주의는 아니에요. 제 마지막 소원이 결혼이거든요. 저는 원래 좋은 실버타운에서 남편이랑 함께 이벤트를 만드는 게 꿈이었어요.
모든 부부가 부러워할 만한 자랑거리를 만들어 자랑하고 싶었는데,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못 만난 것 같네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집에서 그녀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넌 남자 보는 능력이 없어”란다.
그녀의 어머니는 ‘능력이 없는 여자는 남자를 볼 줄도 모른다’고 구박을 한다고.
그녀에게 “어떤 남자가 좋으냐?”고 묻자 “나이가 많아 기댈 수 있고, 말을 잘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강리나는 자신이 무뚝뚝하기 때문에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남자가 좋다.
기자는 ‘노래 잘하는 재미있는 남자’란 대목에서 문득 조영남씨가 떠올랐다.
농담처럼 “그럼 조영남씨는 어때요?”라고 묻자 고개를 젓히고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예전에 조영남씨가 ‘너랑 나랑 결혼하면 정말 기삿거리 되겠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신 적이 있긴 해요(웃음).
그런데 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은 싫어요. 미술 하는 사람은 안 만날 거예요. 상처받을 거 같아요.”
강리나는 한때 “왜 자신에겐 남자를 안 보내주는 걸까” 하고 하나님께 투정도 부려봤다고.
하지만 지금 그녀가 내린 결론은 “살아오면서 참 많은 것을 받기만 했다”이다.
“지금까지 전 살아오면서 참 많이 받고 살아온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이 받는데, 동반자를 갖는다는 것은 너무 욕심이다’란 생각도 들어요.”
“그럼 연애를 한 번도 못해봤냐?”고 묻자 그녀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듯 말을 얼버무린다.
“인생을 살며 단 한 번 사랑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강리나. 그녀는 요즘에도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을 꿈꾼다.
아직까지 작품을 만들며 전시회를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상대를 만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한데,
“죽는다”는 말에 기가 질려서 “만나라”는 말을 하기도 무섭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났다.
“강리나씨 그냥 좀 평범하게 살아보는 건 어때요?”
이 사진은 모델로 활동하던 시절 1987년 촬영한 사진입니다.
요거이 91년 사진이라고 경향신문 자료사진에 나와 있네요... 놰쇄적이라는 단어가 뭔지 설명해주는 듯한 사진입니다.
요것도 91년 사진... 정말 서구적인 외모죠.
91년 5월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변금련에 캐스팅 된 뒤 옷을 직접 지었다는 그런 내용...
이건 2007년 개인전 하던 당시의 사진이구요 ...
요거이 1994년 2월27일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주간경향에 예전 스타들을 돌아보며 그 시절의 매력을 짚어보는 코너 '추억의 스타앨범'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2004년 8월12일자에 도발적 야성미의 강리나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 기사가 있네요...
168㎝, 51㎏에 36-24-36의 육감적인 몸매에서 쏟아져나오는 관능미.
모든 걸 빨아들일 듯 강렬하고 뇌쇄적인 눈빛과 두툼한 입술.
희고 가는 목선을 타고 내리다 갑자기 봉긋하게 솟아오른 풍만한 가슴.
강리나의 그 도발적인 야성미에 따로 호소할 곳 없는 청춘들은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정신을 놓고 말았다.
[변금련]이나 [서울무지개]에서 보여준 그녀의 에로틱한 분위기는 [애마부인]이나 [뽕]의 여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들이 다소 퇴폐적이었던 반면 강리나는 경쾌했다.
성을 어둡고 불편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재미있고 단순하게 연출했다.
코믹하지만 그래도 그가 목을 뒤로 하고 붉은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내면 주위는 금방 뜨거워졌다.
[클라이맥스 원]의 ‘아찔한 샤워 신’에서 그 황홀한 나신을 속속들이 보여준 강리나는 96년 어느 날 훌쩍 은막을 떠났다.
대학시절 전공(홍익대 미대 동양화과)을 계속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이미 전시회를 한 차례 이상 한 그녀는 현재 설치미술가로 문화의 새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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