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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토크

배우 최정우와의 대화

by 신사임당 2014. 6. 26.

한동안 게으름을 부리며 블로그를 본의아니게 팽개쳤네요.

그동안의 것들을 업데이트 하려니... 음, 만만찮습니다.

우선 배우 최정우씨 만난 이야기부터 할게요.

이달 초였던 것 같네요. 이 분 만났을 때가.

그동안 안방극장에서 완고한 아버지나 악의 축을 주름잡는 인상이 강렬했는데

닥터 이방인이란 드라마에서 이분 없으면 무슨 재미로 극이 이어지겠나 싶은 역할을 하고 계시죠.

배우 최정우씨와의 가감없는 이야기입니다.

 


*57년생이신데 생각보다 젊어보이세요.
 =철없이 살아요. 철없이 살면 그래요.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게 나잇값을 해야되잖아. 그런데 배우한테 나잇값을 하라고 요구하면 그럼 또다시 잃어버리는게 생성돼요. 배우는 항상 꿈을 꾸고 살아야 하고 순수하게 살아야 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하거든요. 그 속에서 악인도 하고 선인도 하고 코메디도 하고 여러가지 하니까. 감성이 뽀송뽀송하고 영하게 있어야죠. 나잇값 하다보면 나에게 남는 것은 아집과 편견밖에 없어요.
어릴 땐 나 철들지 말아야지 하고 살았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세상이 시키는 인물이 파쇼 있는 아버지 회장, 보스, 경찰청장 이런거예요. 그렇게 각인되어진거지. 항상 주인공의 반대편에 서서 악의 축의 중심이 돼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거지. TV라는 매체를 그렇게 시작할 수 밖에 없었죠.

 

 *연기를 30년 넘게 하신건데 TV는 50이 되어서야 하신거네요..
=제가 그 유명하다는 모래시계, 올인 이런 드라마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대학로에서 끝나는 시간이 10시예요. 그럼 그냥 집에 가나요. 그 굿을 했는데. 그래서 TV 드라마를 볼 수가 없지. 그때 뭐 다시보기가 있었나. 연극이란 행위 자체가 라이브라 한번 하면 진이 빠지고 술자리를 해야돼요. 그렇게 술먹고 들어가면 자야죠. TV 연속극을 보며 자라지 못했어요. 그리고는 나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냥 연극과 영화. 이것이 내가 살면서 마감하고 가야할 곳이라고 생각하며 산게 그나이까지 간 거예요. 그러다가 내가 최민식하고 엘지아트센터에서 필로우맨이라는 연극을하고 있었을 때 나홍진감독이 시나리오를 가져왔어. 기수대 대장 역할을 이야기하더라고. 시놉을 보니 형사반장은 스무씬이 나오는데 기수대 씬은 10씬인거야. 그래서 내가 나도 형사반장 할 수 있다고 했더니 나감독이 형사반장할 배우는 많은데 기수대 대장할 사람은 없다는거야. 어쨌든 그래서 출연하게 됐죠.
개봉한 뒤에 내 얼굴이 낯설잖아. 사람들은 갑자기 저 사람 뭐지? 하고 본것 같아요. 그전에도 배우들이 관료를 연기하면 관성적인 관료풍의 연기가 많았는데 내가 했던 기수대장은 좀 낯설었나봐. 그런데도 공감이 많이 됐던지 그 캐릭터 이후 갑자기 방송 3사에서 드라마 섭외전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그전에도 TV에서 러브콜이 있었을텐데요.
 =물론 그 전에도 TV 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TV를 잘 몰랐고 성격상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자신이 없더라고. TV는 조직이고 회사같은 느낌이 있어요. 어쨌든 나하고는 별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선뜻 나서지는 못했어요.
 어쨌거나 영화 이후에 전화가 많이 왔지만 내 마음이 크게 변하거나 하진 않았는데 출연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생겼어요. KBS가 <최강칠우>라는 퓨전사극을 한다며, 거기에 나를 왕을 시켜준대는거야. 왕? 이건 아무나 하는게 아니거든요. 그 배역이 인조였어요. 자기 아들까지 죽이는 그 왕. 순전히 왕 시켜준다는 걸로 오케이 한거죠.
 하고보니 왕 분량이 점점 늘기 시작했어요. 재미있었나봐. 왕을 해보니까 재미있더라고. 약간 사이코적으로 했는데 시청자 반응도 나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바람의 화원에 출연하게 됐고 거기서 진혁 감독을 만났죠. 이후 진감독이 <찬란한 유산>까지 하면서 소현경작가, 진혁감독과 함께 했던 인연이 <검사 프린세스>로까지 이어졌죠. 나이 먹은 늙수그레한 연기자, TV를 모르던 늙다리 배우에게 그들은 죽마고우가 돼 길을 잘 안내해줬어요.

 

 

*TV작법은 영화나 연극과 많이 달랐을텐데요. 젊어서도 아니고 50넘어서 그런 시스템은 좀 힘드셨을것 같아요.
 =내 성격상 TV는 활동하기 어려웠을것 같아요. 그런데 찬란한 유산 할땐 팀웍 좋았어요. 막 시작하는 연기자한테 이 드라마가 주는 친화력이 좋았고, 연출이 신뢰를 줬고 내가 바깥에서 움직이고 하는 것 만큼 많은 자유를 줬어요. 낯설고 거친 나에게. 산만하고 거칠지만 한 인물이 시청자들에게 괴리감과 불편함을 줄 수 없지 않나 걱정도 많이 했는데 다시 보니까 너무 이상하게 한 것 같지는 않았던것 같아요. 그 역할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 역할 자체인, 드라마의 환경같다고 하더라고. 아마 유명한 배우가 아니라서 그렇게 봤나봐요. 어떤 피디가 나중엔 새로운 아버지 상 하나가 등장한 것 같다고 그런 평가를 해줬어요.

 

 

 

*사교적인 성격 아니라고 하셨는데 전혀 상상을 못하겠는데요.
 =지금은 다 내려놓고 빗장 다 열었죠.

 

 

*연극 오래 하셨으면 그래도 술을 많이 마시면서 어울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잖아요.
 =술을 체질적으로 안맞아서 못했어요. 술을 먹으면 취하지 않고 술이 체하는거지. 밤새도록 고문당해요 술 몇잔에. 그러니 술을 먹을 수가 없어. 그런데 나중에 극복했어요. 빈속에 먹어야 하더라고. 누군가 가르쳐주는데 눈을 뜨자마자 마실요. 냉장고에 소줏병을 넣어두고 일어나자마자 글라스 반잔을 원샷했어요. 그렇게 2달인가 하니 달라지더라고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바뀌었어요. 아마 40 좀 넘었을 때 그랬죠.

 

*지금의 주량은 어떠세요.
 =마시면 초반에 붉게 되다가 1시간 쯤 뒤 가라앉으면 그때부터 아침까지 마시죠. 20대때 연극시작해서 수많은 벗들은 연극에 대한 이야기, 세상에 대한 이야기, 인생에 대한 이야기, 개인에 대한 이야기 하는데 꿍짝을 못맞춰주니 저도 힘들었죠. 그땐 한많던 시절이라 술 조금만 들어가면 싸워요. 술 취하지 않고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기 힘들더라고. 앞으로 주구장창 술좌석을 가져야 하는데 거기서 또 괴로움을 당할 순 없잖아. 내 몸을 버리더라도 술을 해보자며 결심한거예요. 안된다면 한꺼번에 배우려 하지 말고 조금씩 먹으면 돼요. 그러면 어느날 술이 내 몸에 와서 달라붙을 날이 있을거라고 후배들에게 이야기하죠.

 

*술도 못먹었고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언뜻 생각하면 배우와는 안맞는 성격인데 어떻게 시작하신거예요.
 =무지하게 내성적이고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성격이었어요. 누가 뭐라고 하면 귀까지 시뻘개지는 유형? 남앞에 나서지 못하고, 어디 앉아도 구석진 곳에 앉아야 하는. 스스로가 자폐기도 있고 고립돼 있는. 공황장애는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트라우마가 많이 있는 아이로 자란거죠. 나름. 그래서 연극은 어떻게 보면 나 개인의 치유예요.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치유. 연극이라는게 남을 표현하는 것, 남이 돼 보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해서 제 성격도 많이 바뀌었어요.
 젊은 시절에 고독하고 외롭게 많이 지냈어요. 30대에는 연극으로 돈도 많이 벌어서 괜찮았지만.

 

*연극으로 돈을 버셨다고요?
 = <불 좀 꺼주세요>라는 연극 해서 돈도 벌어보고 많이 써보기도 했어요. 그 연극을 92년도에 만들어서 3년간 30만명이 봤죠. 내가 제작하고 주연했는데 그 작품이 노래 핑계, 영화 서편제와 함께 타임캡슐에 들어가서 남산에 묻혔죠. 어쨌든 서른 몇살에 이미 돈맛을 본거지. 공연을 해가지고. 성공했어요. 그러니까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극으로 시작해 이정도 이뤘으면 난 소원성취한 것 아닌가 했죠. 뭐가 더 필요한가 싶으면서. 그래서 미국 캘리포니아로 갔어요. 30대때 내 꿈을 이뤘으니 여기서 조그만 영화 만들고 살지 뭐 이러면서 갔죠. 그렇게 딴짓하고 살다가 1년 반만에 돌아왔어요. 그때가 90년대 후반이었던 것 같은데.

 

 

 

                             2008년 추상미와 함께 공연한 연극 <블랙버드>

*왜 돌아오셨어요?
 =그때 LA에 포장마차가 없었어요. 내가 1호 포장마차, 물론 실내지만, 만들어서 장사를 했어요. 별거를 다 한거지. 그런데 그때 손님들과 함께 계속 술을 먹어야 하잖아요. 난 술을 못하는데. 그렇게 먹다보니 술병이 나더라고. 손님들은 어차피 교포들이고 그들에게 포장마차에 대한 아련한 향수같은게 있으니까 엄청 많이들 오셨어요. 번호표로 줄서서 기다리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내가 <불 좀 꺼주세요> 이 공연을 미국에서도 했기 때문에 교민드렝게도 좀 알려졌죠. 나름대로 내 팬들이 있었다우. 그런데 어쩌것어. 몸이 너무 아파서, 술병이 나서, 그래서 돌아왔죠. 아까 말했던 그 술 훈련을 하기 전이었으니까. 아마 술병 안났으면 거기서 계속 살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 돌아와서 박근형 연출자와 돌아온 기념으로 연극을 다시 시작했죠. 몇년간 대학로에서 파격적으로 작품 만들고 했어요.

 

 이후는 앞서 말했듯 2008년 영화 <추격자> 시나리오를 들고 나홍진 감독이 그의 연극 공연장으로 찾아오게 된다.

 

 

 

*아까 성격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어릴 땐 어땠습니다.
 =혼자서 죽 자랐어요. 형제도 없이 친척도 없이 혼자서 자문자답하면서 자랐죠. 잘 어울려다니지 못하고. 어린 시절에 생의 우여곡절과 풍상을 겪으면서 말 수가 없어지더라고요. 잘 안 웃어지고. 상처가 너무 컸죠. 마음이 꽉 닫혀서. 어린 시절에 상처를 당하면 세상에 대고 쉽게 웃어지지 않더라고. 그런 시절을 겪었는데 연극을 통해 남의 생을 체험하다보니까 나에게서 벗어나는 것. 그것을 알게됐어요. 내가 이렇게 갇혀 살았구나 하고.

 

*연극을 하게 된 계기는요?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엄마와 친구셨어요. 그런데 그 분이 나를 곰곰이 들여다보셨죠. 워낙에 말이 없고 닫혀있는 아이니까 더 관심있게 보셨던 것 같아요. 선생님 보시기에 제가 뭔가 이상했죠. 조울증도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치유의 목적으로 연극을 해볼 것을 권하셨어요. 당시 선생님 친구분이 퇴계로에 있던 연극인 회관에서 활동을 하셨거든요. 그분 권유로 극단에 들어갔고 연극을 시작하게 됐죠.
 지금은 돌아가신 그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리죠. 나를 사회의 일원으로 살 수 있게 하신 분이거든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아마 저는 염세에 빠져서 힘들었을 거예요. 다행히 연극을 해보니 재미있었고 동료들과 편하게 잘 지낼 수 있었어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셨길래요?
 =대본을 붙들고 3, 4개월 지내면서 뭔가를 공부하고 이야기하고 알아가는 거잖아요. 서로 소통하면서. 학교에서 하는 공부 외에 다른 공부가 있다는 걸 알게됐어요. 벗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 전까지는 벗이라는 단어가 피부에 와 닿지 않았고 무슨 뜻인지 몰랐거든요. 같은 목적을 갖고 동호인들이 함께 모여 희생하고 양보하며 사랑으로 덮잖아요. 그 안에서 벗의 의미를 발견한거죠. 학교 다닐 땐 그걸 몰랐어요. 이게 소통하고 교류하는 것이구나. 나는 왜 빗장치고 닫혀 살았을까? 왜 먼저 인사하고 마음 열고 가서 품에 안기지 않았을까. 그전까지 그걸 이해해본적이 없었던거죠. 항상 환자처럼 우울하게 회색인처럼 하고 다녔죠. 연극을 유럽에선 교과목에 집어 넣잖아요. 남의 입장에 서보는 거거든요. 이러면서 대화의 방법을 알게됐어요. 내 입이 열리고 대화가 시작되고. 그러면서 연극도 사랑하게 됐죠.

 

*사실 뵙게 되면 어떤 아버지시냐고 여쭤보고 싶었는데, 말씀을 듣다 보니 제가 좀 질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저 양반은 어떻게 교육시키고 어떤 아버지일지 궁금해해요. 그런데 사실 저는 자식을 낳아본적이 없어요. 그럼 뭐지? 에고가 너무 강한가 할 수 있을텐데.
 제가 어느 순간 광대라는 운명을,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잖아요. 광대라는 것은 세상사람들에게 슬픔과 기쁨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되는거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좋아져서 연예인이라고 부르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봉사하고 떠나는 나그네 같은 인물이에요. 배우라는 것이 역마살 끼어 있죠. 무당이 굿을 통해 치유를 한다면 배우는 화면이나 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에게 슬픔과 기쁨을 전해주고 치유해주며 떠나는 존재라는 거죠. 전에는 그런 생각이 굉장히 강했어요. 배우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너무 유명해도, 너무 많이 가져도 안될 것 같았어요. 종교가 너무 커지면 종교가 아닌 것처럼. 너무 많은 것, 너무 많은 인기를 얻으면 그걸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그럼 진정한 광대가 되긴 어려운데.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죠. 그러다보니 내 대에서 끝내고 홀연히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어떻게 자식을 낳고 책임지겠나... 그런 생각이 젊은 시절엔 굉장히 강했어요.

 

 

*그럼 후회도 하시나요.
 물론 그 생각이 다 옳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걸 후회하는 건 아녜요. 그 시절엔 그랬다는 거고 지금은 조금 희석은 됐지만 뿌리는 바뀌지 않았어요. 젊은 때는 그걸 좌우명처럼 가슴에 얹고 살았다는 거죠. 나이 먹으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는건데 그땐 구구절절 가슴에 와 박혀 있었던거죠. 요즘도 그래요. 나 스스로 묻죠. 적당히 유명하면 어때, 넌 오염되지 않았냐? 이러면서 말예요. 변해가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그래, 좀 더 욕심내지 말고 올바르게,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지 생각해요. 올바른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너무 편해지면 돈이라는게 사람을 편하게 만들잖아요. 자꾸 편함을 좇다보면 나도 모르게 불편한 곳을 안가고 기피하게 되는데 그런걸 하지 말자고 하는거죠.

 

 

*지금 하시는 드라마 이야기 여쭤볼게요. <닥터이방인>에서 문형욱이라는 캐릭터를 처음 보셨을땐 어땠나요.
 = 장르가 여러가지 섞여 있는 드라마잖아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추리 첩보 메디컬 등등. 워낙 무거운 인물로 갈 수 밖에 없는 드라마인데 한 인물이 그 중에서 무거움 덜어내는 몫을 담당하고 있는거죠. 그런데 처음에 문에 코박고 이러는게 무지하게 유치하더라고요. 어떻게 이상황에서 이렇게 부딪히나, 바보 아냐 싶었죠. 것도 세번이나. 개그처럼 할 수도 없는거고. 그렇다고 배삼룡 선생님 식의 슬랩스틱을 할 수도 없고. 고민 진짜 많이했어요. 그래 딱 하나 찾은건 절실함. 최선을 절박함. 나 너 아니면 안돼하는 그런 마음. 절박함으로 풀어준 장면이에요. 그거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죠. 어떻게 하면 유치하지 않을까 싶어서.

 

 

*저는 문에 부딪혀 코피나오는 장면이 처절하면서 웃기더라고요.
 =한사람이 살아내야 할 몸부림이죠. 몸부림치는 모습이 어느 곳에서 한두명씩 비슷한 과는 있잖아. 일상에 있는 인물인거죠. 밉긴하나 측은지심 가는 그런 사람 말이예요. 사실 그런 캐릭터는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경멸감이 들게 하면 피곤해져요. 외면당하는 인물로 만들어지면 곤란하거든.
사실 처음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어요. 작가가 따로 설명은 안했는데 나혼자 생각해 보기를 희귀병 환자겠다 싶은거야. 정신세계의 성장판이 안자란거지. 밖으로 보면 얼마나 멀쩡해요. 사회적으로 그 지성인이 뇌의 한쪽은 함몰돼 차단돼 있는 거거든. 그러니 나 자신에게 합리화가 되더라고.

 

 

 

*문형욱과 비슷한 점이 많으실 것도 같은데요.
 =편하게 되면 그러죠. 술좌석이나 친근감 있는 사이에선 문형욱과 같은 모습도 나와요. 기분파 비슷한거? 기분에 밀려 큰소리 뻥 쳤다 나중에 고민하고 이런것도 있고.

 

 

 

*배우로서 또 해보고 싶은 도전이라든가 꿈이 있으신가요.
 =꿈이 있었어요. 칸에 가서 레드 카펫을 밟고 싶은 시절이 있었죠. 30, 40대에는. 그 이후엔 누군가가 칸을 밟으면서 베를린 영화제로 옮겼어요. 우리가 유일한 분단국가이고 그 영화제에서 다루는 것은 주로 사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깔려 있으니까 가능성이 있다고 봤죠. 곰잡으러 간다고 했죠. TV로 오기 전까지는요. 그런데 이제 제 다 날라갔지 뭐. 요즘은 무슨 생각하냐면 정말 팀웍 맞는 작가와 연출과 배우 스탭이 모여 멋있는 한 작품을, 드라마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에게 터질 만한 멋진 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식상하고 통속적인 이야기가 아닌,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볼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칸, 베를린에서 이리로 넘어온거지. 사실 전 우리 드라마와 소리와 몸짓이 세계인에게 이정도로 어필할 수 있을지는 상상도 못했어요.

 

 

 

 

*함께 연기하는 이종석씨는 지금까지 호흡을 맞췄던 연기자중 가장 나이 어린 파트너였는데요.
 =연기 감각적으로 센스가 많은 친구예요. 20대에 연기 잘한다 어쩐다 이런 평가를 하긴 힘든데 이 친구는 시대의 흐름에 맞는 박자와 리듬감, 시대가 요구하는 속도와 온도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아주 감각적인 친구이고 대중적으로도 어필하고 있어요. 나야 뭐 불편하지 않게 연기할 수 있도록 호흡을 맞춰주는 가이드역할 밖에는 못해주는거죠.

 

 

 

*대학로는 자주 가시나요?
 =최근에는 못갔어요. 틈만나면 갔는데. 연극은 계속 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못 옮겨 괴로운 것도 있어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니까. 계속 드라마가 이어지고 하다보니 시간 빼기도 어려웠고. 공연은 연습을 같이 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민폐잖아요.
 후배들 만나면 그런 얘기 많이 해요. 내가 물려줄 자식이 없으니까 내가 벌어놓은 거 다 니들이 가져다 써라. 너희들이 알아서 힘든 애들 도와주고 연기 열심히 하면서 잘해라, 하는 거죠. 할 수 있는데까지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가는거지 뭐 별거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