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출장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웨덴에서 만났던 한 인사 때문입니다. 앞서 스웨덴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직접 처분하는 정책을 채택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핀란드와 함께 유이하게 폐기물 처분장 부지를 확정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혐오시설일 수도 있는 이같은 시설의 부지를 정할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볼까요. 전국마다, 해당 지역마다 찬반논란으로 몸살을 앓습니다.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일 때도 많아 정치권에서도 서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지 않으려 외면하면서 사태가 더 악화되는 상황도 종종 보아왔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선진국 사례는 어떤지 살펴보곤 하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라의 큰 일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이 아니다, 선진국 국민들은 이러지 않는다, 심지어 반대하는 국민들에게 ‘불손한’ 세력에게 세뇌를 받았다느니, 사주를 받았다느니 하며 음모론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어릴때부터 막연히 들어왔던 그런 ‘세뇌’의 덕분인지,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가장 선진적이라는 스웨덴 국민들은 어떤 식으로 이 문제에 대처했을지 궁금했습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났던 인사는 스웨덴의 방사성 폐기물 관리를 책임지는 회사 SKB의 사이더 라우치 엔즈스트롬 부사장입니다. 그를 통해 들었던, 스웨덴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원전을 가동하는 스웨덴 역시 사용후 핵연료 처분이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이를 처분할 필요성을 느끼고 처분장 마련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1977년이었습니다. 상당히 오래 전이죠. 그런데 정부에서 이 준비를 시작한 뒤 핵연료 처분장 부지 선정이 확정된 것은 언젠줄 아십니까? 무려 2009년입니다. 시설을 지은 것도 아니고 국민들의 합의를 통해 부지를 선정하는데만 30년 이상이 걸린겁니다. 그럼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반대와 논란, 협의와 토론이 벌어졌을까요.
엔즈스트롬은 30년 가까이를 이 회사에서 일하며 부지선정 작업을 추진하는 데 경력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처리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전한 기술 확보와 주민합의를 이끌어내는 것, 이 두 가지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후자가 훨씬 어려웠다고 전해줬습니다. 30년 이상이라는 시간동안 많은 난관과 반대에 부딪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는 인구 2만명의 도시가 후보지 중 하나로 결정되면서 해당 지역 주민들과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구 2만명의 작은 도시. 그런데 그가 수년간 주민들을 만나 설명하고 대화를 가진 횟수는 무려 1만1000번에 이릅니다. 다른 인사들은 또 다른 후보지에서 그런식으로 주민들과 대화를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주민들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은 아는대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그대로 설명해주고 이해를 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논의하는 방식의 대화를 해야 하는 상대라고. 전문가들이 전문가들의 눈과 용어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눈높이와 삶의 용어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전문가들은 뭔가 그럴듯하게 기술의 진보를 설명하고 안전에 대해 설명하지만 주민들이 묻는 것은 삶의 눈높이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 시설이 들어서면)물을 마음 놓고 마실 수 있겠느냐?"
"나무 열매를 따 먹는 건 괜찮으냐"
그는 또 "처분장이 들어서는 곳이 격리된 마을이 아니라 이 일을 추진하는 이들도 일하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30년 넘는 과정동안 모든 단계는 정부와 학계, 각종 연구소, 시민단체, 주민들, 지방정부, 언론 등 모든 이해당사자들에게 일일이 통보되고 피드백을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할 수나 있는 일일까요. 게다가 2009년 부지가 선정된 뒤에도 곧바로 착공이 아닙니다. SKB는 2011년 건설 인허가를 정부에 신청했고 정부는 현재 이를 검토중입니다. 정부의 최종 승인이 나면 2016년에야 착공이 될 예정입니다. 주민들 80% 이상이 찬성한 사업인데도 말입니다.
엔즈스트롬 부사장은 말합니다. 80%가 넘는 지지율을 얻었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주민들의 신뢰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고요. 그러면서 앞으로의 모든 단계도 지금처럼 투명하게, 널리 공개하겠다고 합니다.
스웨덴 오스카르샴 고준위 폐기물 중간처리시설 내부입니다. 지하 400미터 아래에 폐기물을 수십년간 중간저장한 뒤 앞으로 지어질 최종 처분장소(포스마크)로 옮겨질 예정입니다
비엔나 IAEA에서 만났던 핵연료 사이클 담당자 게리 다이크씨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자력관련 정책이 성공한 나라의 비결은 ‘신뢰’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신뢰를 얻으려면 신뢰를 얻을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너무나도 당연하고 뻔한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있는데 어찌나 창피한지 모르겠더군요. 그는 사용후 핵연료 정책
과 관련해 스웨덴이 모범적인 성공사례라고 말했습니다. 국가 정책이 명확하게 수립되고 고도의 기술을 확보하고 있으며 국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 모든 것이 그렇다는 거지요.
반대의 목소리에도 진지하게 귀기울이는 자세, 누구라도 소외시키지 않고 함께 안고 가려는 열린 마음, 누구에게나 투명하게 알리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고방식. 그런 과정과 절차 때문에 30년 이상, 앞으로도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이런 시간이 소요된 것이 아닐까요. 한국식 사고방식과 일처리에 익숙해 있던 제 머리로는 도대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더군요. 저런 이상적인 모습을 이뤄가는 곳이 지구상에 저렇게 있구나... 하는 감탄과 놀라움 뿐이었습니다.
"빨리 빨리 해서 돈만 벌면 되고, 이런 저런 희생쯤은 있더라도 효율적으로 하는게 좋은 거고, 전문가들이 알아서 다 할 건데 어디다 대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이나 시민단체들이 설쳐..."
그들의 모습속에 이런 우리의 현실이 겹쳐지면서 몹시 우울해졌습니다.
선진국 '드립'을 쳐대지만 결국 선진국은 정부와 국민 모든 구성원의 선진적 프로세스와 사고방식이 만들어 주는 겁니다. 투명한 감시시스템을 작동시키고 투명한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당연한 정부를 만든 국민들이 있기에, 정부와 국민 사이의 선순환적인 의사소통과 절차가 투명한 사회분위기와 신뢰를 만드는 것이겠죠.
그럼 모든 건 국민 탓이 되는건가요???
너무 많이 나갔는지모르겠지만 결국 국민들이 ‘잘 뽑아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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