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 음악요정. 가래요정.
오홍홍홍, 아항항항 독특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는 요정님을 만난 것은
지난달 중순이었습니다.
요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래요정.
라디오 방송에서, 레이블 공연장에서
유희열씨로부터 놀림반으로 받았던 이 모순되는 조합의 별명은
어느새 정재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됐습니다.
장난이려니 했는데 정재형씨가 가래요정일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로 짐작되는 것은
그의 흡연량이었습니다.
두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그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가 그동안 피워댄 담배량은
열개피 정도였습니다.
흡연하는 요정님과의 두시간에 걸친 대화.
지난해 여름부터 징징대며 졸라대고 기다렸던 그와의 대화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지면에 싣지 못한 그와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
*인터뷰 너무 오랫동안 피하신거 아녜요?
=음악이야기만 하고 싶은데 그렇잖아요. 분위기 보면 다른데 초점 맞추고 그러니까. 그래서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 이야기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고요. 제가 수줍음이 또 많잖아요. 아항항항
무한도전 전후로 급변한거죠. 사실 그전에 놀러와에도 이적씨랑 나갔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도 반응이 좋았어요. 거기까지면 좋겠다 싶었어요
*2010년에 했던 대실망쇼를 봤거든요. 그때 약간 그런 기미가 보이긴 했는데 방송에 나왔던 것처럼 그정도일줄은 몰랐어요.
=제가 무서운 점이 이상한 경쟁 심리를 부추기면 한계가 없어진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공연때 머리에 꽃꽂고 장난 아녔죠.
어쨌든 그전까지 파리에 있다가 와서 음반만들고 공연하고 그런 생활 계속했어요. 영화, 클래식음악 공부할때였죠. 그런데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는 걸 느꼈어요. 한국 가요계 현실을 맞닥뜨리면서요. 내가 생각하는 음악하는 사람이란 어떤 형상, 표상과 현실이 동떨어져 있더라고요,. 방송도 낯설고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국내 가요계에 손님처럼 머물렀던 거네요.
=그렇죠. 현실과 많이 동떨어져 있었고. 공연, 영화음악작업 아니면 한양대 작곡과 강의 나가고. 그땐 음악에 대한 내 생각이 모 아니면 도였어요. 순정주의라고나할까. 심각했죠. 그때 혼자서만 심각했나봐요. 동료, 후배들이랑 모인자리에서 뭔가 나혼자 심각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적이가 그러더라고요. 형, 형이 왜 가르치려고 그래? 이렇게요. 그 말에 충격받았죠. 나는 가르치고 꼰대짓하는 사람이 아닌데. 유쾌 경쾌하고 사는 게 좋고 그렇게 살자는주의였거든요.
*그렇게 충격받아서 방송, 그것도 예능으로 나오게 되신건가요?
=사실 그전에 대실망쇼가 있었어요. 파리에서 온 지 얼마 안됐을 때였어요. 정말 오랜만에 즐겼던 공연이에요. 관객들에게 내가 전하려고 했던 위트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팬들에 대한 믿음이 생긴거죠. 충분히 세련됐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봐주는 관객들. 그래서 결심한 것도 있어요.
사실 제가 걱정했던 것은 내가 원래 내 성격대로 방송에서 보여지면 그 꼴 보기싫은데 어떡하나 하는 거였어요. 제가 이기적이거든요. 그런데 다행히 좋게 봐주셨고 그렇게 저렇게 엮여서 주저앉게 된거죠.
*그럼 다시 파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던거네요.
=네. 원래 계획대로라면 파리로 돌아갔어야 해요. 그런데 희열이가 라디오 천국 코너를 부탁하면서 요번 1년만 있어보면 안되냐고 해요. 그리고 무한도전하면서 여기 눌러앉게 된거죠.
*이기적이라고 하셨는데 이적씨가 이기주의가 사람으로 형상화됐으면 정재형이라고 말한 적이 있잖아요
=그렇대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이기주의는 내 생각을 정확하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다고 해야하죠. 배려하지 않는 겸손은 가식이라고 봐요. 불편하죠.
*웃음소리가 정말 특이하잖아요. 원래 그렇게 웃었어요?
=예날부터 그랬어요. 웃으면 다들 미친놈 같대요. 그런데 방송하면서 내 웃음소리를 빼서 굳이 자막으로 처리하다보니 그렇게 특정지어진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어땠어요?
=산만한 애였죠. 3형제 중 제가 둘째예요. 정서적으로 거칠게 자라면 안된다고 해서 아버지가 다 피아노를 배우게 하셨죠. 전 특히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피아노를 쳤어요. 그래서 나도 배워보고 싶어 따라서 배우겠다고 했거든요. 단기간에 따라잡았죠. 선생님은 저보고 베토벤같다고 했을 정도로. 하다가 쉬고 하다가 쉬고 했는데 재능이 있었나봐요. 그 아이 진도를 따라잡고나니 그 아이가 피아노를 그만두더라고요. 저희 형도 그래요. 워낙 어릴 때부터 뭐든지 잘하고 두각을 나타냈는데 피아노에서만은 두각을 못나타냈죠. 저한테 밀렸죠. 그러니까 형도 곧 그만두더라고요.
*음악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게된 계기는요
=배우다 말다 했던거라 특별히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평범했는데 고1때인가 영화음악 작곡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어요. 그래서 클래식 작곡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도 음대로 가게 됐어요. 음대를 다니는데 주변 친구들은 가수를 하고 싶어했어요. 아연이, 연빈이 이 쌍둥이 자매가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영화음악 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덥석 시작했죠. 그런데 둘은 훌쩍 유학을 떠나고. 혼자 남아서 가수활동하면서 영화음악 작업도 같이 했어요.
*마리아와 여인숙이 첫 작품이었죠.
=우연히 맡게 됐어요. 전체는 아니었고 10장면 정도 작업을 해쓴데 나중에 보고 충격받았어요. 이건 영화음악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너무 낯부끄러워서 혼났어요. 그동안 클래식음악을 공부했기 때문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내에서 막상 보려니 이건 말도 안되더라고요. 영화음악도 가요도 다 힘들었던거죠. 음악적으로도 위축되고. 기댈데도 없었고. 가요를 몰랐기 때문에 내 음악적 방향을 모르겠더라고요. 다행히 정원영 선생님이 힘이됐어요. 저에게 나만의 유니크함이 있다고 격려해주셨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분의 도움이 컸어요. 자괴감으로 쓰려져 있다시피 할때였죠. 재충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어요.
*학창시절 가요를 듣지는 않으셨나요?
=70, 80년대를 관통하는 가요나 팝에 대한 추억, 정서가 없어요. 저야 클래식 음악을 했으니까 자연히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죠,. 가요계에 데뷔하고 나서야 가요와 팝을 들었어요. 레드제플린 음악도 그때서야 들은거고.
*파리에선 영화음악과 클래식을 다 공부하셨던데요.
=대학시절 음대에서 현대음악을 공부했는데 흥미를 거의 못느꼈어요. 그러다가 영화음악을 하면서 근대음악을 많이 듣게 됐는데 다시 클래식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됐어요. 자연히 현대음악에 대한 이해도 높아졌고. 한국에선 잘 몰랐던 것들을 프랑스에서 많이 알게됐고. 그러면서 클래식을 다시 공부하게 됐지요.
*파리에서 10년을 머무르신거네요.
영화음악 감독하고 공연하고 학비벌고 공부하는 생활을 10년간 반복했어요. 무엇보다 힘든게 주부의 생활이더라고요. 밥먹고 만들어먹고 끼니를 챙기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건지 알았어요. 음악적으로도 혼란스럽고 힘든시기였죠 공부와 삶에 지쳐있었고. 1999년에 정재형 1집을 내고 갔는데 다시 음반을 낸게 2007년이었으니까요. 나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해 볼 시간이었어요. 괴롭고 힘든 날이었지만 일상에 대한 귀중하고 소중한 발견을 한 시간이기도 했고요. 그땐 10년의 고생들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정화(엄정화) 어머니는 걔는 왜 안들어와, 무슨 공부를 또 하느냐고 물어보시기도 했대요.
어쨌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던 시간들. 귀중한 깨달음의 시간이었죠. 사실 제가 졸업하고 바로 가요계 데뷔하면서 잘됐기 때문에 고민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서른이 넘어서 자의적인 개고생의 길로 들어선거죠. 지금 생각하면 음악을 하며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이 얼마나 고맙고 즐거운 삶인가 알게해준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미친인맥이라고 불리잖아요. 비결이 뭔가요. 특히 여배우들과는
민아는 영화음악 하면서 친해졌어요. 민아가 출연할 영화에 제가 음악감독을 맡게 됐는데 민아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보게 됐죠. 정화는
파리유학 전부터 일찌감치 친해졌고. 배우쪽으로는 음악감독을 하면서 만난 경우가 대부분이죠. 이선균, 최강희 다 그래요.
제가 만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다양하더라고요. 재작년 제 생일파티에 25명을 초대한적이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각양각색 분야의 사람들이 모였어요.
*방송에서 언뜻 보면 동생들이 되게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요.
=군기잡고 꼰대짓하고 이런거 싫어요. 대신 배려하고 예의만 지키면 전 상관없어요. 다 친구인거죠. 웬만하면 다들 절 동생대하듯 하긴 해요.
*군대생활은 어떻게 하신거예요? 그럼
=저 내무반장했어요. 싫어하는 것, 귀찮은 것 다 없애고 안하게 했죠. 전투체육시간에 축구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빠지게 했더니 결국 우리 내무반이 체육대회 1등했어요. 뭔가 재미있어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다른 결과를 낳는거죠. 사람에 따라 권위적일수도 있고 친구처럼 수평적으로 소통할 수도 있는데 전 자연스럽고 편한게 좋아요.
*무한도전 이야기 안할 수가 없잖아요. 지난해 서해안가요제 후 정말 폭발적인 반응이었어요.
=나도 놀랐어요. 그런데 한편으론 무척 우울하더라고요. 이게 뭔지 모르겠고. 이렇게 반응해주는게 고맙기도 한데 또 다른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어요. 그후 파리에 몇주간 머무르면서 온갖 생각이 들었죠. 그러면서 정리하게 된 것이 내가 즐기는 것, 좋아하는 것은 그것으로 된거다 싶었어요. 굳이 의미를 만들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면 더 신경 쓰이고 재미없거든요. 하던대로 자연스럽게. 그게 삶의 모토가 된 것 같아요.
*다른 대중음악과 비교하면 어려운 편인데 덕분에 대중성면에선 훨씬 접근성이 좋아진거잖아요.
=희열이가 그래요. 내 음악이 어려우니 반대의 시너지를 즐기라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음악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요. 음악이 너무 어려우면 소통의 창구를 잃는거거든요.
나이 들어서도 호기심을 갖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즐겁고 고마운 일이죠. 누구에게나 오는 기회는 아니니까요.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이 딴걸 기대하고 오기도 할 것 같아요.
=예전에 제 공연은 세련되게 감상하거나 혹은 펑펑 울면서 감정을 해소하는 공연이었어요. 연령대도 정해져 있는 편이었고. 그런데 지금은 초등학생부터 연령대가 다양해요. 그리고 뭔가 막 던지고 그런 순서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데 그렇지 않고 음악만 하니까 그게 더 신기한가봐요.
*이번공연이 몇십초 만에 매진됐었잖아요.
=그전 공연도 매진은 다 됐어요.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오홍홍홍.
*음악이 대체로 무겁고 어둡잖아요. 밝은 음악도 듣고 싶은데.
=순정마초 하면서 흔들리긴 했어요. 다들 빠른 곡을 했잖아요. 그런데 제가 언제 탱고를 하겠나 싶어 밀어붙였죠. 음악은 정통으로 대신 가사는 위트있게 가자고 타협점을 찾은거죠. 어차피 음악은 길게 할건데 쌓아가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그때 그때 하면 되는거잖아요. 어느 순간 디스코가 좋으면 디스코를 쓸 수도 있는거고. 내 생각을 지키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어요.
*공연에서 서지원씨가 불렀던 내눈물 모아를 부르시잖아요. 그 곡을 정재형씨가 썼다는게 한동안 인터넷 검색어에 올랐던 적이 있어요.
(참고로 기자가 수습기자이던 1996년 당시 서지원씨 자살사건이 발생해 병원과 집, 경찰서를 이리저리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소식 처음 들었을 때 정말 놀랬어요. 그 당시 1년간 제가 술만먹으면 내내 울었대요. 난 기억이 안나는데 누가 그러더라구요. 어쨌든 그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죠.
*나이 든 모습이 상상이 잘 안되는데 어떻게 나이들어가고 싶은가요?
=사람들에게 위로가되고 함께 즐거워하며 가고 싶어요. 동시대를 함께 걷는 사람들이잖아요. 요즘 20대 젊은 학생들 보면 안쓰러울 때가 너무 많아요. 기성세대가 줄 수 있는 위로를 해주고 싶은데 제 음악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해요. 어른의 마음으로 혼내는 사람은 많지만 아이의 마음으로 위로해주는 사람은 없잖아요.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것들이 있을텐데 그것을 털어놓을 통로가 되어도 좋겠고...
10년후든 20년 후든 요대로 잘 늙었으면 좋겠어요. 음악적 깊이를 위해 더 노력하는 사람, 볼 때는 친근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진지한 사람. 괴팍하고 이기적이지만 위로가 되고 친근한 사람. 그런데 같은 동네에서 쉽게 보이는 그런건 싫어요. 아티스트는 최소한 신비감은 있어야 하거든요. 즐겁고 자유로운 친구로 소통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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