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터인가 ‘막장’드라마라는 말이 일반명사화돼 사용되고 있습니다. 막장이란 용어는 폄훼하고 비하해 사용할 용어가 아님에도 드라마와 결합되면서 소위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말 안되는 쓰레기같은 드라마라는 용어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어원이야 어떠했든 막장드라마라는 단어를 일단 인정했을 때, 사회적으로 논란이 됐던 막장드라마는 꽤 있었습니다.
극한의 선정적 갈등과 자극적인 소재, 말 안되는 구성으로 일관하는 드라마를 흔히 막장드라마라고 지칭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조차도 습관화되어 무조건 강하고 자극적인, 다시 말해 극적인 시츄에이션이 들어가는 드라마는 모두 막장드라마로 싸잡아 치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넷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 드라마 관련 뉴스를 보면 잔잔한 가족극이나 코미디가 아니면 무조건 거의 막장이라는 이야기가 밥상에 김치올라오듯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극성이 강한 시추에이션이나 평소 잘 보지 못했던 시도, 개성강한 소재, 에피소드 모두 그렇게 묶이고 있습니다.
어떤 드라마들을, 또 어떤 이유에서 막장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살펴보면 복수, 극한의 갈등, 불륜, 배신, 납치, 폭력, 살인, 성폭행 등 자극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일단 무조건 막장이라고 붙이고 봅니다. 드라마를 만드는 입장에서도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같은 요소들이 문학작품이나 영화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극성의 극한을 달리고 있는 많은 영화 작품은 나름의 미학세계로 포장이 됩니다. 물론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안방극장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급되고 있기 때문에 건전성과 긍정적 요소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무조건 자극적인 요소가 나온다고 막장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로열패밀리>를 보기 전에 막장드라마라는 평가들이 있길래 어떤가하고 봤습니다. 그런데 막장드라마라는 이야기를 듣기엔 너무 억울한 드라마 아닌가 싶더군요. 물론 극 초반에 주인공을 감금하는 내용이나 불륜, 섹스비디오 등 파격적인 소재가 등장하긴 했지만 이같은 장치들은 이해를 돕고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소재로 사용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지난해 방송됐던 <즐거운 나의집>도 상당히 재미있게 봤는데 막장이라는 평가가 꽤 눈에 띄더군요. 불륜, 폭행, 갈등, 복수가 나오면 무조건 막장부터 붙이고 보는지, 그게 좀 짜증나긴 했습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영화 폭풍의 언덕의 한 장면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작품에도 막장드라마라고 불릴만한 자극적인 시추에이션이 상당히 많습니다. 얼키고 설킨 관계, 최고의 갈등과 복수를 보여주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빼놓을 수 없죠. 현대 영문학작품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이 작품을 미니시리즈로 만든다면 아마 갈등구조만 보고 막장이라고 앞다퉈 붙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언쇼가에 들어온 고아 히스클리프는 그 집 주인의 딸 캐서린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죠. 하지만 이 집 아들 힌들리는 처음부터 히스클리프를 괴롭힙니다. 아버지 언쇼씨가 죽은 뒤 힌들리의 학대는 더 심해지고요. 결국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에드거와 결혼합니다. 괴로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이후 히스클리프는 집을 떠나고 종적을 감췄다가 몇년후 돌아옵니다. 성공한 신사로 변모했지만 내면은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힌들리를 절망으로 내몰고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도 학대하지요. 또 사랑하던 캐서린이 결혼한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 결혼합니다. 결혼한 뒤에도 아내 이사벨라, 처남이 되는 에드가까지 계속 괴롭히죠. 캐서린에 대한 사랑의 마음만큼 타인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셈인데 결국 캐서린은 딸을 낳다가 죽고 캐서린의 죽음 뒤에도 히스클리프의 광적인 집착은 계속됩니다. 히스클리프의 부인 이사벨라는 남편의 눈길을 피해 집을 나가 린턴을 낳고 쓸쓸하게 죽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아들 린턴과 캐서린의 딸을 강제로 결혼시키지만 린턴은 병으로 죽습니다. 에드가도 죽고 히스클리프도 죽고 결국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과 캐서린의 딸만 살아남게 되는데 둘은 사랑해서 결혼을 하면서 복수의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예전에 이책을 읽을 때는 아무생각없이 처절하고 집착하는 히스클리프의 사랑과 복수심에 몰입해서 봤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했던 건 드라마 <보고 또 보고>를 볼 때였습니다. 겹사돈이었던 그 드라마를 보다가 갑자기 <폭풍의 언덕>의 촌수관계가 생각나면서 이것도 드라마 만들면 완전 초막장급이겠다 싶어 웃었던 기억이... 린튼과 캐서린의 딸 캐서린은 고종사촌이고 캐서린의 딸 캐서린과 헤어튼 역시 고종사촌인데 이렇게 저렇게 결혼으로 엮이니 무지하게 복잡해집니다.
여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막장이라고 하지만 이런 갈등과 설정 자체가 막장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간통, 불륜, 근친상간, 패륜 등과 같은 요소는 충분히 사용되고 있는 소재인만큼 그것이 나왔다고 막장으로 몰아가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일겁니다. 그 방식에 따라 막장이 되기도 하고 예술이 되기도 할겁니다. 외설과 예술이 아주 미세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풀어내는 방식이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말이 안되는 설정, 손발 오그라들고 피식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식의 묘사, 극단적이고 황당한 상황 전개, 남발되는 우연성이라면 막장이라는 평가를 받아 당연할겁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제빵왕 김탁구나 로열패밀리, 즐거운 나의집 등은 억울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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