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동민을 만나다
예전보다는 나아졌다지만 국내 클래식 음악 관객층의 저변은 탄탄하지 않다. 척박한 시장에서 그나마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세계적인 콩쿠르 입상자들의 무대 정도다. 국내 클래식 음악계에서 티켓 파워를 갖고 있는 소수의 ‘스타 연주자’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쇼팽 콩쿠르. 조성진이 우승하기 10년 전인 2005년 한국인 최초의 입상. 주최국인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가 1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2위 없는 3위에 나란히 입상했던 한국의 20대 형제들. 임동민, 임동혁은 그렇게 클래식 음악사에 기록을 남겼다.
앨범을 녹음하고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주요 도시를 누비는 연주 일정은 영광의 주인공들을 기다리는 일반적 과정이다. 동생 임동혁의 이후 행보는 이같은 예측 반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형 임동민은 예상을 빗나갔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대학(대구 계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선택했고, 대중들을 만나는 공간도 작은 무대로 한정했다. 그리고 8년의 시간이 흘렀다.
생소한 길을 가며 자신만의 시간을 채워 온 그는 오랜만에 쇼팽의 스케르초와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담은 새 앨범 ‘쇼팽&슈만’을 발표했다. 또 이달 28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 리사이틀에 나선다.
최근 서울 잠실의 개인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시원한 달변가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데 꾸밈이 없는 그의 얼굴에선 간간이 소년같은 표정이 읽혔다. 얼마전 그가 출연해 큰 화제를 모았던 유튜브 영상에서의 모습과 비교할 때 좀 수척해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영상으로는 사람이 ‘크게’ 나오는 것 같다”며 씩 웃었다.
-8년만입니다. 임동민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좀 긴 시간이었어요.
=원래는 2년전에 리사이틀을 하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개인적 사정 때문에 미뤄졌어요. 공백기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작은 규모의 연주회는 꾸준히 해 왔었어요. 해외도 오갔고.
-큰 규모라서 더 긴장된다거나 신경 쓰인다거나 하는건 있나요.
=어떤 연주회든 항상 긴장돼죠. 특히나 이번에는 기대하는 분들이 많고, 그래서 압박감도 좀 생겨요. 저도 좀 예민한 편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새벽에도 잠을 잘 못 이룰 때가 있어요.
-주요 연주 목록이 쇼팽 스케르초인데 콩쿨 직후였던 10여년전의 쇼팽 해석과 지금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20대 때는 불같은 열정과 감수성으로 연주했어요. 그러다 나이를 먹고 많은 분들을 만나 공부하고 사회를 접하면서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죠. 그래서 좀 절제하고 자제하는 모드로 갔는데 최근에는 다시 열정적인 부분이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요.
-국제 콩쿠르 입상과 화려한 연주 생활. 마치 공식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는데 그것도 편견일 수 있겠네요.
=아티스트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평생을 연주자로 살았는데 공백기가 3번이나 있었어요. 그 중에는 12년간 연주회를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기간도 있었고요.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은 엄혹한 냉전시대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할 정도로 빛나는 스타였는데 40대에 연주를 아예 접었죠. 그러다 60세 넘어서 컴백해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줬어요. 젊을 때 빛을 보지 못하다 중장년에 진가를 드러내는 연주자가 있는가 하면 20대에 반짝이다 나이들면서 사라져가는 사람들도 꽤 있어요.
-피아니스트 임동민은 어느 쪽인가요.
=전 꾸준히 가려고 노력해요. 혼자 통제하고 생각하고 연구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편이지요. 호로비츠나 키신, 임동혁처럼 천재과에 속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모든 피아니스트가 천재는 아니거든요.
콩쿠르 입상 후 대중들 앞에 섰던 20대의 임동민은 가슴을 두드리고 감동을 주는 연주로 청중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이번에 낸 ‘쇼팽&슈만’에서 스케르초 연주는 화려하고 명징한 타건, 폭발하는 감정의 여운이 넘쳐난다. 쇼팽 콩쿠르 입상자라면 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4곡의 스케르초는 많은 피아니스트들, 그리고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곡이다. 이번 앨범은 그가 그동안 얼마나 음악에 집요하게 파고 들어 스스로를 설득하며 한걸음씩 움직여 왔는지를 증명하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쇼팽과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동시에 선곡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두 세계를 한번에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스케르초는 화려하고 강렬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곡이라면 어린이정경은 순수한 감수성과 심오한 세계를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두 세계가 상당히 대조되는 셈이죠.
-이번 앨범에 대해 당 타이손(1980년 아시아인 최초 쇼팽 콩쿨 우승자)은 슈만 곡이, 임동혁씨는 쇼팽 곡이 좋다고 했다면서요.(얼마전 열렸던 앨범 발매 쇼케이스에서 그는 이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음악이라는 것이 주관적이다보니 사람들마다 받아들이고 느끼는 결과는 달라요. 그리고 전문가들이 좋아하는 스타일과 대중이 좋아하는 스타일도 좀 다른 것 같아요. 전문가들은 지적이고 학구적인 연주를, 대중들은 마음으로 치는 연주를 원하는 것 같거든요.
-당 타이손은 2005년 쇼팽 콩쿨 당시 심사위원이었죠
=그때 인연이 죽 이어져오고 있어요. 지금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살고 계시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미국에 가면 그분을 가끔 만나곤 하죠. 그분의 연주는 섬세하고 지적이고 학구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지요.
올해 마흔인 그의 연주 인생에서 쇼팽은 핵심적인 화두였다. 전세계 피아노 재목들을 끌어 모으는 국제 콩쿠르 무대를 그는 쇼팽으로 시작해 쇼팽으로 마무리했다. 열여섯이던 1996년 국제 영쇼팽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다. 쇼팽콩쿠르에서 3등에 입상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부조니 콩쿠르와 같은 정상급 대회에서도 수상했다.
-교단에 선 것이 스물 여덟살 때였죠. 사실 그 결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외로 다가왔어요.
=제가 중학교 때 가족들과 러시아로 갔어요. 그리고는 계속 유학생활을 이어갔는데 그 때는 한국에 들어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무척 강했어요. 마침 교단에 설 수 있는 계기도 주어졌고요. 요즘은 중국에서 워낙 클래식 붐이 일고 있으니까 중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권하는 분들도 종종 있어요. 가서 연주회를 하는 것은 몰라도 삶의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이번이 세번째 앨범인데, 두 장이 쇼팽이고 첫 앨범은 베토벤이었어요. 돌이켜보니 문득 궁금해지네요.
=그땐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다는 의도가 강했어요. 워낙 그전까지 쇼팽에 매달려 있던터라 좀 지치기도 했고 지겹기도 해서 다른 작곡가들을 연주해보고 싶었던 거거든요.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이는 앨범이긴 해요.
-베토벤 소나타 전곡 녹음에 도전하는 피아니스트들이 꽤 있는데, 그럴 계획은 갖고 있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호로비츠가 ‘베토벤의 모든 소나타가 다 훌륭하지 않기 때문에 전곡을 연주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저도 동의하는 편이에요. 전 베토벤 소나타보다는 협주곡을 더 연주하고 싶어요. 또 베토벤 소나타보다는 슈베르트 소나타에 마음이 더 끌려요.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곡이 있다면요.
=차이코프스키의 ‘사계’가 대중적으로 유명하긴 한데 전 ‘어린이를 위한 앨범’을 연주하고 싶어요. 국내에선 거의 연주되지 않을 뿐 아니라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스타일은 아니예요.
-유튜브에 세계 3대 난곡이라며 발레키레프의 ‘이슬라메이’,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같은 연주 동영상이 올라오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어요. 시답잖은 질문이긴 한데 임동민 같은 피아니스트라면 악보를 보고 바로 칠 수 있나요.
=못 치죠. 연습해야 돼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같은 경우라면 엄청나게 많이 연습해야 돼요. 한 1~2년?(웃음). 예전에 카라얀이 디누 리파티에게 차이코프스키를 함께 녹음하자고 했어요. 그러면서 얼마나 시간을 주면 되냐고 물었더니 2년 기다리라는 답이 왔대요.
아홉살에 피아노를 시작한 그는 20대 중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평균 12시간씩을 피아노 연습에 매달렸다. 진중하고 학구적이고 내성적인 성향의 그는 흐트러짐 없는 규칙적 삶을 살아왔을 것 같지만 상당히 즉흥적인 성격이라고 했다. 뭔가가 먹고 싶다거나 어딘가에 가고 싶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실행해야 직성이 풀린다. 와인과 꼬냑을 좋아해 한동안 술도 많이 마셨다는 그는 “나이 때문인지 숙취를 견디기 힘들다”면서 6개월전부터 ‘완벽한 금주’에 들어갔다고 했다.
-다른 직업 선택의 기회가 온다면 뭘 선택하고 싶나요.
=구체적으로 이거다하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피아니스트는 아닐 것 같아요. 물론 어떤 직업이든 어렵지 않은 건 없겠지만요. 그런데 가까운 누군가가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면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무대에서 악보를 잊어버린다거나 미스터치를 한다거나 한 적은 없나요.
=악보를 잊어버린 적은 없어요. 미스터치는 없을 수 없죠. 아닌 척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거죠. 미스터치가 중요한 건 아니거든요. 호로비츠같은 대가도 미스터치는 많았어요.
-동생(임동혁)과는 자주 보는 편인가요.
=1년에 몇번은 보죠. 만나면 음악 이야기만 해요.
-두 분이 같이 무대에 설 계획은 없나요.
=음, 글쎄요. 뭐 굳이...(웃음).
-평소에는 주로 어떤 음악을 많이 듣나요.
=클래식은 거의 잘 안들어요. 가요나 팝을 많이 듣는 편이고 드라마 보는 것도 좋아해요.
-피아니스트를 소재로 했던 드라마나 영화가 꽤 많았잖아요.
=(이 대목에서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별로예요. 재미도 없었고 큰 감흥도 못 느꼈던 것 같아요. 전 주로 멜로 드라마에 꽂히는 편이에요.
-쇼팽, 슈만의 음악 모두 누군가를 향한 깊은 사랑의 감정이 녹아 있어요. 어떤가요. 연주자 입장에서도 깊은 사랑의 감정이 연주에 도움이 되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건 제가 하기 힘든 답변인데...
멋쩍은 듯 그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오랜 벼림과 담금질의 시간을 보낸 피아니스트는 이제 청중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그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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