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히트곡 ‘강남스타일’의 주인공 싸이....
“내가 전혀 강남스럽지 않은 비주얼이기 때문에 이 노래가 사랑받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그의 ‘스펙’은 전형적인 강남스타일이지요.
유복한 환경에서 원도 없이 놀며 자랐습니다. 부유한 환경의 강남키드, 여기에 미국유학, 놀만큼 놀아본 오렌지족. 그런데 그의 인생은 데뷔후 롤러코스터같은 부침을 겪으면서 파란만장했습니다.
엽기가수 싸이의 데뷔 시절
1977년생. 반포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반포초, 중학교를 거쳐 세화고를 졸업했습니다.
가수 성시경과는 고교 선후배 사이죠. 싸이와 성시경은 외견상 상당히 다른 이미지죠. 싸이는 넉살 좋고 아래위로 두루두루 붙임성이 있는 이미지라면 성시경은 까칠하고 살짝은 싸가지없어보이는, 잘난척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팬들중에서 화낼분도 있겠지만 대체적인 이미지가 그렇다는건 많은 분들이 동의하시리라.)
싸이는 일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잘난척, 싸가지없는 사람을 누가 좋아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시경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똑같아요. 잘나갈때나 안나갈때나 가수되기전이나 지금이나. 그래서 일관성이 있다며 좋아하는 이유로 꼽았습니다.
그의 가정환경은 유복했습니다. 아버지가 반도체 장비를 공급하는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인이고 어머니는 카페, 레스토랑 등을 경영했지요.
그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모이는 곳만 보면 피가 끓었답니다. 물좋다는 나이트클럽은 죄다 섭렵했고 놀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도 응원단장, 오락부장으로 날렸고요. 이미 고등학교때 방에 재떨이가 있을 정도로 일찌감치 '일탈'의 길을 허락받았던 그는 잘 놀고 사고를 쳐도 걸리지는 않는, 지능적인 날라리였다고 하네요. 질리도록 과외해서 공부도 어느정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강남 부잣집 아이들이 밟는 엘리트 코스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피땀흘려 일군 사업체를 물려받길 원하는 아버지에게 그는 미국 가서 공부하겠다고 하고는 보스턴 대학 국제경영학과에 진학합니다.
그렇지만 보수적인 아버지의 눈을 피해 제대로 놀겠다는 심사였죠. 보따리를 풀자마자 학교를 자퇴하고 받은 학비는 유흥비로 탕진하며 음악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당연히 집에선 난리가 났겠지만 그의 딴따라 인생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데뷔곡 새... 저 춤동작하며... ㅋㅋㅋ. 바지가 더 웃기네요
그가 가요계에 데뷔하게 된 것은 버클리 동료인 조피디와 함께 하면서입니다. 당시 조피디는 온라인을 통해 스타가 됐습니다. 싸이는 불법씨디를 만들어 팔아 용돈을 버는 한편 데모 음반을 만들어 국내 기획사에 보냈습니다. 조피디의 음반을 제작하던 국내 기획사가 싸이의 습작 음반을 들은 뒤 러브콜을 보냈죠. 싸이 프롬더 싸이코 월드 음반이 탄생했고 싸이코에서 싸이라는 이름도 따왔습니다.
원래는 가요 제작자가 되고 싶었던 그가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1998년 신화에게 곡을 줬으나 그의 곡이 음반에는 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명도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수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죠.
어쨌거나 그의 등장은 파격이고 사건이었습니다. 엽기적인 노래 새, 그리고 포복절도할만한 춤. 나이트클럽에서 갈고 닦은 춤을 제도권으로 가져와 빛을 보게 만든 겁니다. 무엇보다 그의 비주얼은 충격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90년대 초반 박진영의 비주얼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10년 월드컵 당시 응원곡 뮤직비디오에서 코믹한 연기를 펼쳤죠
세기말, 그리고 새로운 밀레니엄. 당시 세상은 엽기코드가 유행했습니다. 노래와 퍼포먼스도 그렇지만 그의 비주얼 자체도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상식을 깨뜨렸지요. 토속적이고 진지한 얼굴, 아저씨 똥배, 두부살(절대 순두부 아님) 같은 팔뚝, 변두리 나이트클럽에 어울리는 반짝이 의상(디자인도 너무나 특이하죠....), 황당한 액세서리... 바지가 터지도록 몸을 흔들고 덩어리진 춤을 추며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그를 표현할 단어는 '엽기'가 가장 어울렸습니다.
엽기가수 싸이는 이내 대중을 장악했고 티비를 장악했고 라디오, 길보드를 장악하며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예능감이며 능청스러운 연기력을 갖춘, 이전엔 보지 못한 신종 연예인의 등장에 대중들은 환호했지요.
대마초 사건으로 조사를 받으며 당시 보도진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호사다마일까요. 새처럼 날아오르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데뷔하던 해 말 터진 대마초 흡연사건입니다. 방송에서 퇴출되고 구속되면서 개인적으로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도 함께 하지 못한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즈음 나왔던 2집 역시 대부분 방송불가판정을 받았고 대중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방송에서 자취를 감춘 그를 구원해준 것은 앞서 말했던 2002년 월드컵입니다. 화합하고 하나되는 분위기에서 축제의 장에 응원하고 즐기러 나왔던 싸이를 대중들은 품어 안았고 똘끼 넘치는 가수는 그렇게 재기했습니다. 3집으로 활동을 시작하자 대중들은 다시 그에게 환호했지요. 이후 3년간의 병역특례 복무 기간을 보내며 그는 주로 프로듀서로 역량을 쌓았습니다. 대학 축제도 다녔지요. 나중에 밝혀져 이같은 활동이 부실한 병역복무의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군대를 2번 가게 되는 일이 벌어진거죠. 부실하게 병역복무를 했다는 혐의였습니다.
세간의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다시금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거죠. 그는 이같은 상황을 쿨하게 받아들이며 재입대했습니다. 그리고 제대할때는 육군참모총장상까지 받는 재미있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재입대를 앞두고 논산훈련소에서 입소전 소감을 밝히는 모습이지요
지난 7월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말을 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그때, 그러니까 군대를 두번째로 갈 때가 아니라 제대한 뒤 5집을 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곡을 줬지만 신통치 못한 반응을 얻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우리같은 딴따라는 몸을 다치는 것보다 감을 다치는 것이 훨씬 두렵고 겁이난다는 그의 말에서 그가 겪었을 절망감이 어렴풋이 읽혔습니다. 이제 맛이 갔나보다, 곡을 더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자신을 너무나 힘들게 했다는 거죠. 다행히 2010년 DJ DOC의 새 음반 타이틀곡 '나 이런사람이야'가 터지면서 그는 희망의 끈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무한도전 서해안고속도로 가요제에서 노홍철과 철싸로 활약을 했지요. 그는 뮤지션으로, 예능인으로서 다시금 화려하게 떠오릅니다. 원래는 지난해에 6집 음반을 내놓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겨땀이 한번 터지면서 1년이 갔다"고 너스레를 떨더군요. 지난해 무도에서 그가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었던 것 같네요. 겨드랑이에 땀이 찬 모습이 잡히면서 한동안 이 컨셉트의 방송이 계속됐었죠.
그러다가 올해 드디어 강남스타일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금의환향. 지난 9월25일 미국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뒤 가진 기자회견 말미 말춤을 추고 있는 모습
싸이가 만일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는 경영자의 수업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어땠을까요.
그러면서 또 꼬리를 잇는 의문, 싸이가 만일 강남의 유복한 가정이 아닌 곳에서 나고 자랐더라면 지금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어떠신가요.. 궁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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