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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토크

드라마 제작환경 그리고 스타파워

by 신사임당 2011. 8. 16.
한예슬씨 사건이 일파만파 퍼집니다.

오늘은 원로 배우 이순재씨까지 이에 대해 언급하셨네요.

“배우는 어떤 이유에서든 현장을 떠날 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드라마 제작여건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건이 어떻게 불거졌고,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사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감정싸움이네 불화네 하지만 그것 역시 확
인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앞서 원로배우께서 지적하신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프로 배우의 자세, ■그리고 드라마 제작환경.

 
먼저 드라마 제작환경 이야기부터 해봅시다.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환경은 그 결과물이나 명성에 비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합니다.
늘상 시간에 쫓기다보니 제작진이고 배우할 것 없이 일단 드라마 시작하면 잠 못자고 건강 해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들을 접하기 전에 설마 그럴까 했는데 막상 현장을 가보고, 매니저들과 통화해보면 이틀을 한숨도 못 잤다거나, 하루 평균 1시간도 편히 못잔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웬만하면 현장에 가서 틈을 내 배우들과 인터뷰도 하고 싶고 분위기도 살펴보고 싶었는데 이건 TV 화면을 보면서 상상할 수 있는 낭만적인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반복 또 반복. 연극처럼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장면마다 다양한 각도, 거리에서 비추는 화면을 잡다보니 끝없는 반복이 되풀이됩니다.
주변에 제작진, 출연진, 관계자들이 수없이 서있고 연기자들은 카메라가 잡는 틀 안에 서서 주위에 아랑곳않고 감정을 잡으며 연기를 합니다. 아무나 못할 일이긴 합니다...

 
<선덕여왕> 촬영장에 갔을 때 나중에 방송으로 1분도 채 되지 않는 장면을 4시간 이상 찍고 있기도 했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드라마 역시 많은 인적, 물적 자원과 시간이 필요한 종합예술에 가까운 장르입니다. 그런데 70분 드라마 2편씩을 제작진들은 매주 찍고 있습니다. 70분이면 짧은 영화한편인데 영화는 보통 몇달간을 찍기도 합니다만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1주일에 70분 드라마를 2편씩 찍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힘든 일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허덕대며 찍어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말처럼 방송 당일에 대기가 버겁습니다. 얼마전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 주연 박신혜씨가 교통사고를 당한 바람에 촬영을 못해서 방송이 하이라이트로 대체됐습니다.
한예슬씨처럼 촬영거부하는 일이 생기고 나니 바로 그날 방송이 펑크납니다. 생방송 뉴스도 아닌데 어떻게 배우가 안찍는다고 바로 그날 방송이 안되는지, 마치 생방송 진행하던 뉴스 앵커에게 정체 모를 괴한이 뛰어든 것과 같은 충격입니다.

 
한류문화를 주도하며 드라마 강국이라고 자부하는 대한민국 드라마의 현실입니다. 아니 대한민국 드라마의 제작현실입니다. 단 1회분도 완성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자신감이라고 해야하나요? 오랫동안 지적되어온 제작관행이 낳은 예견된 사고이기도 합니다.

 
지난해 연기상 시상식에서 고현정씨와 문근영씨가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감사소감 대신 이들은 한국 드라마의 열악한 제작환경을 성토하는 수상소감을 말했습니다.
배우 엄지원씨도 트위터를 통해 스태프와 배우가 고통을 참아내는 것만 칭찬하고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안하는지 물었습니다. 배우 이순재씨는 여러차례 이같은 제작현실에 대해 지적해왔습니다. 그런데도 제작환경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드라마의 제작환경은 생방송 드라마, 쪽대본이라는 말로 대변됩니다.
쪽대본은 대본이 미리 나오지 않고 한회의 일부분만 나오는 건데요 대본이 급하게 나오니 배우들은 마냥 대본을 기다려야 하고 연습도 못하고 촬영에 임합니다. 초치기하듯 방송하는 거죠.
그리고 쪽대본으로 상황에 따라 같은 장소에서 몰아찍다보니 연결된 흐름을 짚어내기도 감정잡기도 어렵다는 것이 배우들의 호소입니다.

방송일정이 정해진 상태에서 대본이 늦게, 급하게 나오다보니 배우나 스태프 모두 잠을 못자고 밤샘촬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최고의 사랑>의 히로인 공효진씨 역시 3일밤을 꼬박 새웠다고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출연 비중이 많은 주연급 배우들은  드라마가 시작되면 하루 평균 2시간 자는 것도 감지덕지한다는데, 주연 배우가 이 정도니 스태프, 보조출연자들은 말할 것도 없을겁니다. <선덕여왕> 촬영장에 갔을 때 보니 병풍처럼 둘러서서 군사 역할을 맡고 있는 보조연기자들은 수십 시간을 그 자리에서 먹고 연기하고 피곤하면 자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배우들 중에서는 이같은 환경 때문에 드라마 출연을 기피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예전에 만났던 장서희씨는 <인어아가씨> 등 드라마에 출연한 뒤에 영화를 하게 됐는데 촬영장 환경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것 같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모든 점에서 여유가 있었다는 이야기겠지요. 

 
이렇게만 이야기하고 보면 쪽대본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원흉인 것 같습니다. 작가들이라고 쪽대본을 쓰고 싶어서 쓰겠습니까. 사전에 드라마 대본 빼놓고 촬영해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것이 제작진의 소망이겠지요.

특히 지난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추노>는 방송 전 절반정도를 제작하고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높은 완성도, 시청률을 다 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생방송으로 만들까요.
 
문제는 제작관행상 사전제작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노>는 좀 예외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 사전제작 했던 드라마들은 다 시청률 참패입니다. <로드넘버원> <파라다이스목장> <탐나는도다> 등이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특히 민감합니다.
우리나라처럼 드라마와 쌍방향으로 활발히 소통하는 시청자들도 드물지요. 인터넷 게시판, 관련 커뮤니티에 보면 온갖 아이디어와 의견이 쏟아집니다. 제작진은 이를 드라마에 반영합니다. 작가 역시 이같은 환경에서 시청자의 반응을 살피며 대본을 써야 하는 상황에 내몰립니다.
드라마 스토리의 결말을 시청자 반응에 따라 수정하는 것이 우리나라 드라마의 관례입니다. 사전제작이라면 시청자의 의견이 끼어들 여지가 없지요. 따라서 시청률을 최우선으로 하는 방송사 입장에선 이같은 이유로 사전제작에 나설 수 없습니다.

시청자들 역시 트렌드에 얼마나 민감합니까. 현재의 반응을 반영함으로써 드라마는 현재성과 시의성을 확보하고 살아 숨쉬며 시청자와 호흡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유행어와 뉴스 등이 소재로 등장하면서 집중력과 재미도 강화되는 거죠.
얼마전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에서는 박지성이 맨유와 재계약했다는 소식까지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계속 반영해야 하는 것이죠. 게다가 촬영환경 역시 여유롭거나 느긋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특정한 장소를 언제까지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에 작가에게 이 장소가 나오는 대본을 미리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시청자의 반응, 장소적인 제약, 작가가 원래 추구하려던 스토리라인... 이것을 한꺼번에 소화하려면 초능력자 아닌 다음에야 제시간에 대본만들어 내기도 힘들고 쪽대본 만들기 싫어도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외적 요인으로 방송사가 석달 전에 제작사에게 편성을 결정해 주는 환경도 급박한 제작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주일에 두편 만드는 것도 미국, 일본에 비해서 두배나 많은 분량이고요. 여러가지가 복합적이죠.

 
그렇다면 이 문제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요.

 



또 다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한예슬씨의 스타의식이 너무 심한것 아니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주를 이룹니다.
그것 역시 공감할만한 이야기입니다. 대중들의 사랑을 기반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사는 연예인들이 그에 걸맞는 책임과 배려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중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만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은 아니고 이번 뉴스가 전해지면서 연출자와 한예슬씨의 불화설이 나왔습니다. 촬영장에서 공개적으로 다툼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유명 PD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자신의 색깔을 주제로 말하는 과정에서 그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PD의 작품, 색깔 이런 말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점점 자본과 스타파워가 강해지고 있는 제작환경에서 연출자의 작가적 역량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모든 것은 자본으로 대변되는 제작·투자자, 그리고 직접 출연하는 스타파워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물론 예전에도 배우와 연출자들의 설전, 갈등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얽힌 감정이 쌓이고 이같은 갈등표출은 배우가 하차하는 것으로 결론난 적이 많습니다.
방송계나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근에도 결론은 배우의 하차쪽으로 나는 경우가 많지만 그 과정은 사뭇 다르다고 합니다. 연출자를 바꿔달라는 요구가 많이 늘었다는 겁니다. 이번에도 한예슬씨가 연출자를 바꿔달라는 요구를 했다는 이야기가 보도됐는데, 어쨌거나 스타 파워와 입김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이야기겠지요.
일전에도 한 영화에 캐스팅 된 톱클래스 여배우가 감독을 바꿔달라고 해 문제가 됐던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제작사쪽에서 난색을 표하다가 배우가 하차하겠다고 으름짱을 놓으니 결국 감독을 바꾸는 것으로 정리했다고 하더군요.

 
과거에 PD가 절대군주처럼 군림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 때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변한 셈입니다. 앞으로 이런 추세는 계속 될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던 PD의 이야기처럼 배우와 제작·투자자만 남고, 그 사이에 연출자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기능인이 될 가능성이 곳곳에서 실제로 보입니다.

 
좋았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헛헛하게 소줏잔을 들이켜는 PD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 말씀은 유명 배우 누구누구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내가 패가면서 연기 가르쳤는데” 하고 무용담처럼 늘어놨습니다.

 
또 다른 PD의 이야기입니다. 해외의 톱스타는 대본 리딩, 리허설에 자신 대신 대역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한다면 ‘싸가지없는’ .... 이렇게 찍히겠지만 외국은 일반적이라고 하네요. 액션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자기와 비슷한 외모, 체격을 가진 대역 7, 8명과 작업하기도 합니다. 배우가 현장에 나오는 것은 얼굴 클로즈업하는 장면일때만이라고 하는데요,

 
그분 역시 앞으로 우리나라 제작환경도 그렇게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누가 파워를 가지고, 누가 헤게모니를 쥐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문화를 향유하고 접하는 대중문화 소비자들의 권리입니다.
갑자기 방송중단이 되는 어이없는 상황, 말도 안되는 이야기와 엉성한 화면에 돈과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변명의 여지가 없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