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은 가수 조용필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많다. 가왕, 국민가수, 최고의 명창 등등. 하지만 그저 ‘조용필’이라고 칭하는 것이 그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과잉된 수식어가 넘쳐나는 것이 싫다”면서 “그냥 ‘조용필’ 그대로가 좋다”고 했다. 그의 삶도 그렇다. 오로지 음악뿐이다. 그를 알고, 오랫동안 만나온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오로지 음악 이야기만 한다”며 “때문에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불평 아닌 불평을 한다. 음악 아닌 다른 분야를 기웃거리는 것은 고사하고 눈길조차 준 적이 없다. 그가 만나고 교류한 사람들은 모두 음악이 바탕이 됐고, 그의 음악을 살찌우고 한국 대중음악을 탄탄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됐다. 직·간접적으로 엮인 인연들을 통해 그의 음악인생을 살펴봤다.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
■경봉스님
‘통도사 군자’로 칭송 받았던 고승. 조용필은 1977년 대마초 사건으로 가요계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불교신자였던 그는 이후 한동안 방황하다 통도사 극락암으로 스님을 찾아왔다. 스님을 친견한 뒤 산을 내려가면서 오도송처럼 읊게 된 노랫말이 ‘못찾겠다 꾀꼬리’다. 27인의 선승들의 삶을 엮은 <마음 살림>에는 당시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
“너는 뭐하는 놈인고?”
“가숩니다.”
“네가 꾀꼬리로구나. 노래는 너보다 꾀꼬리가 훨 잘하지.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네 꾀꼬리가 어디 숨었는지 그걸 찾아보란 말이다.”
■김민기
한국 포크를 대표하는 뮤지션이자 뮤지컬 제작자. 조용필과 김민기는 서로 가는 길이 완전히 달랐지만 상대의 음악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조용필은 “난 김민기는 인정해”라며 “자신만의 길을 일관되게 가는 것만으로도 존경한다”고 말했다. 김민기 역시 “조용필의 음악세계를 존경한다”고 했다. 30년 가까이 각자의 음악행로를 걸어오던 이들이 첫 만남을 가진 것은 1997년.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특별한 말 없이 소주 20병을 비웠다. 인근의 허름한 카페로 옮겨 위스키를 나눠 마신 뒤 조용필은 그 카페에 있던 노래방 기기를 작동시켜 ‘아침이슬’을 멋지게 불렀다. 이듬해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조용필은 콘서트를 열었고 첫날 공연에 김민기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두 사람의 ‘역사적 만남’을 주선한 이는 음악평론가 강헌이었고, 그는 몇 년 전 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사연을 공개했다.
■김지하
1970년대 반유신운동에 앞장섰던 시인. 옥살이를 하면서 우연히 듣게 된 조용필의 노래에 큰 위안을 받았다. 출소 후에 그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그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는데 정작 조용필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이후 그는 지인의 소개로 조용필을 만나게 됐다. 조용필은 그를 형님으로 대했고 친분을 이어갔다. 김지하도 한 자리에서 수백 곡의 노래를 연달아 부를 만큼 노래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조용필과 노래시합을 벌여 조용필의 ‘항복’을 받아낸 일화도 가요계에 오랫동안 회자됐다. 김지하와 조용필을 비롯해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모임 중심에는 영화제작자이자 당시 대중문화계의 대모로 불렸던 전옥숙이 있었다. 홍상수 감독의 어머니인 그를 조용필 역시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 전옥숙은 조용필의 노래 ‘생명’을 작사하기도 했다.
■유재하
1987년 26세의 나이로 요절한 뮤지션으로, 국내 발라드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대학시절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키보드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유재하의 대표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1987년 그의 앨범에 수록됐지만 사실은 조용필의 앨범에 먼저 실렸다. 유재하는 자신이 만든 이 곡을 조용필이 불러주길 원했는데 이 곡을 통해 조용필은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이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노래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한 조용필은 1985년 자신의 7집을 통해 이 곡을 발표했다.
■신해철
‘‘마왕’이라 불렸던, 주목할 만한 혁신적 시도를 했던 뮤지션. 1988년 그가 이끌던 밴드 ‘무한궤도’가 대학가요제에 출전했을 때 조용필은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대에게’의 화려한 신디사이저 전주가 울려퍼질 때 조용필은 그 전주만 듣고도 우승자라고 확신했고 만점을 줬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했지만 밴드의 앨범 발매는 뚜렷하게 진척되지 않았다. 당시의 제작자들은 신해철이라는 솔로 가수의 상업성에 주목했지만 신해철은 밴드음악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이때 조용필이 나서서 자신의 매니저 출신인 유재학이 대표로 있던 대영AV를 소개해줬다. 이곳에서 무한궤도 1집을 낸 신해철은 이후 넥스트로 활동할 때까지 꾸준히 관계를 이어갔다. 신해철에게 조용필은 음악적 성장의 발판이 되어준 셈이다.
2014년 10월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조용필은 침통한 표정으로 빈소를 찾았다. 그는 당시 “신해철은 후배지만 전 늘 그의 말을 경청하고 그에게 음악적 도움을 받기도 했다”면서 “모험정신이 대단한, 그래서 존경한 친구”라며 슬픔과 안타까움을 밝혔다.
■버벌진트
한국어로 하는 랩의 체계를 정립했다고 평가 받는 래퍼. 조용필 앨범에 최초로 피처링으로 참여한 뮤지션이라는 기록을 갖게 됐다. 조용필이 2013년 발매한 19집 앨범 <헬로>의 동명 타이틀곡에서 영어로 랩을 했다. 당시 앨범 제작진은 그를 발탁한 이유로 조용필과 목소리가 잘 어울리고 당대의 트렌드를 잘 표현하는 래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음악 장르나 세대에서 두 사람을 연결짓기 쉽지 않았던 터라 상당한 화제가 됐고 의외의 조합은 높은 음악적 완성도를 일궈냈다. ‘가왕 조용필이 선택한 남자’라는 설명이 붙었던 버벌진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제안 받았을 때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당대의 슈퍼스타로 살아왔지만 그의 삶은 시끌벅적한 모임이나 화려한 인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인간관계는 음악과 관련된 분야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 주변인들의 이야기다. 음악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그와 친분을 갖고 있는 대표적 인사는 영화배우 안성기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조용필과 중학교 동창으로 50년지기다. 한국 코미디사의 한 장을 장식한 이주일은 생전 조용필이 형처럼 따랐다. 이들은 좋은 술친구이기도 했다. 부산에서 각자 공연을 가진 뒤 해운대 백사장에서 소주를 한 궤짝 사놓고 마시다 그대로 백사장에서 잠들었던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조용필이 유명세를 타기 전부터 친분을 쌓은 전 축구 국가대표 이회택 감독도 수십 년간 그와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다. ‘욕쟁이 할매’ 캐릭터를 우선적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배우 김수미는 방송을 통해 “조용필은 속에 있는 말도 편안하게 하는, 내 유일한 남자친구이자 이웃사촌”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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