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한장면
대학생 유지영씨(21)는 얼마 전 PC방에서 날을 꼬박 새웠다.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티켓을 예매하기 위해서였다. 4월 25일 개봉한 이 영화 티켓 예매가 시작된 날은 개봉 12일 전인 13일. 하지만 몇 시에 예매가 시작되는지는 공지되지 않았다. 극장 측이 특정 시간대에 지나치게 많은 인파가 몰려 서버가 다운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유씨는 전날인 12일 밤 11시부터 PC방에서 기다렸다. 예매 페이지를 띄워놓고 예매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새로 고침’을 수시로 눌러댔다.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리던 중 오전 6시가 되어서야 예매 창이 열렸다. 그는 이 영화 관람에 최적의 시설을 갖췄다는 서울 용산 CGV 아이맥스관의 첫 시간 티켓을 가까스로 살 수 있었다.
12일 오후 서울 코엑스에서는 베네딕트 컴버배치, 톰 홀랜드 등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홍보를 위해 내한한 배우들의 레드카펫 행사가 열렸다. 가까이서 이들을 보기 위해 유씨는 11일 밤부터 수백 명의 인파와 함께 현장을 ‘지켰다’. 사실상 이틀밤을 꼬박 새운 셈이다. 그는 “나도 모르게 잠들어 예매를 못할까봐 카페인 알약까지 먹고 버텼다”면서 “‘팬질’하다 코피를 쏟을 지경이지만 즐겁다”고 말했다.
어린이집 교사인 김지윤씨(28)와 회사원 박주영씨(29)는 2015년 <아이언맨>의 주인공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내한했을 때 팬미팅 현장에서 만나 친구가 됐다. 이들은 4월 21일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마블런’ 행사에 함께 참여했다. 마블 히어로의 캐릭터들을 즐기면서 가벼운 마라톤을 하는 이 행사에는 이들 외에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렸다. 박주영씨는 “이번 영화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됐기 때문에 아이맥스관에서 첫 상영을 놓쳤다면 팬 자존심에 용납할 수 없는 상처가 됐을 것”이라며 “영화 관람을 위해 일찌감치 연차도 내놨다”고 말했다. 이들은 27일과 28일에도 각각 서울 상암동과 성남 판교의 아이맥스관에서 추가로 관람했다.
‘마블 덕후’(열성 팬)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피말리는 티켓 확보 경쟁을 하는지. 그러자 김지윤씨는 “팬이라면 남들보다 먼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면서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스포일러를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말했다. 조성진 CGV 전략지원 담당은 “아이맥스관이 생긴 이래 조조상영 시간대가 매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영화팬들의 관심과 열기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밝혔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티켓을 출력하는 관람객들
마블 영화에 대한 국내 팬들의 사랑이 뜨겁다. 어벤져스 세 번째 시리즈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개봉을 두고 벌어진 반응은 신드롬에 가깝다. 일찌감치 매진된 ‘명당자리’ 티켓은 10배가 넘는 가격(최고 11만원)에 암표로 거래됐다. 개봉 이틀째 관객 100만명을 돌파한 것은 국내 영화 개봉 사상 처음이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제작사 ‘마블 스튜디오’가 만든 영화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지만 특히 한국에서의 반응은 열광적이다. 마블 영화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는 국내에서도 대중적으로 친숙한 캐릭터가 된 지 오래다. 아이언맨을 비롯해 캡틴 아메리카, 헐크, 토르, 닥터 스트레인지, 앤트맨, 블랙팬서 등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들이 국내 팬들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미국 영화시장에는 마블과 양대산맥으로 일컬어지는 DC(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의 슈퍼히어로)가 있다. SF의 전설로 꼽히는 스타워즈, 스타트렉 시리즈에 열광하는 관객들도 많다. 그런데 한국 시장에서 다른 영화들은 크게 맥을 못추는 반면 마블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 같은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은 거대하고 탄탄한 팬덤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영화 흥행성적을 비롯해 팬미팅 열기, 캐릭터 상품 매출 면에서 볼 때 마블 팬덤의 ‘화력’은 웬만한 인기 아이돌그룹 못지않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 포스터
영화 커뮤니티 사이트인 ‘익스트림 무비’의 ‘영화 수다’ 코너는 강호에 흩어져 있는 고수 팬들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장이다. 깊이 있고 분석적인 글이 많이 올라오기 때문에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는 빼놓을 수 없는 참고자료로 각광 받는 사이트다. 여기에서도 마블 영화와 관련한 글의 조회수나 댓글 반응은 다른 영화에 비해 월등히 많다.
마블 슈퍼히어로 영화의 시작은 2008년 개봉된 <아이언맨>부터다. 마블 팬덤의 성장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그 전까지 마블은 만화에 기반해 슈퍼히어로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미국과 달리 국내 대중문화 시장에서 코믹스(만화)는 크게 각광 받지 못했다.
영화 <아이언맨>의 세계적인 성공은 마블 슈퍼히어로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아이언맨은 국내에서도 4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이후 <인크레더블 헐크> <토르 천둥의 신> <퍼스트 어벤져> 등을 통해 헐크, 토르, 캡틴 아메리카가 착착 소개됐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한 편에 소개된 캐릭터가 해당 영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화에도 함께 등장하며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즉 마블 슈퍼히어로들이 공유하는 가상세계라는 신개념은 국내 영화팬들에게 신선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여졌다.
2015년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개봉 당시 서울을 찾았던 주연 배우들./이선명 기자
2012년 4월 개봉된 <어벤져스>는 그런 개념을 실체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각각 다른 작품에서 소개됐던 캐릭터들이 <어벤져스>에 모두 등장해 악당에 맞서 싸우는 내용이었다. 7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성공했던 데에는 슈퍼히어로가 팀을 이뤄 활약한다는, 상상 속에의 개념을 눈으로 보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컸다. 영화 홍보마케팅사 호호호비치 이채현 대표는 “이전까지 없던 개념과 구성, 매력적인 내러티브를 보여주면서 영화팬들을 사로잡았다”면서 “하나의 세계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의 연속성은 ‘마블’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신뢰감과 호기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전 세대에 익숙했던 슈퍼맨 등의 슈퍼히어로와 달리 마블의 슈퍼히어로는 인간적인 면모와 약점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화팬들이 동질감을 갖고 몰입할 수 있었다”면서 “아이언맨과 같은 개별 캐릭터뿐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팬덤이 빠르게 확장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초창기 마블 영화 팬들이 관심사를 나누고 호기심을 해소한 공간은 코믹스 전문 블로그,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나 관련 카페였다. ‘아로니안’과 같은 코믹스 전문 블로그는 마블 슈퍼히어로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콘텐츠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 전문 블로거이자 유튜브 크리에이터인 ‘발없는 새’도 마블 팬들이 즐겨찾는 ‘참고서’ 역할을 했다.
4월21일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마블런 행사에 참여한 팬들. /이선명 기자
팬덤이 본격적으로 결집되고 확산된 계기는 유튜브의 활성화다. 2016년 4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개봉을 전후로 영화를 다루는 채널이 꽤 생겨났다. 현재 영화 전문 채널로 인기가 높은 ‘고몽’ ‘삐맨’ 등은 당시 마블 영화를 소재로 한 영상들을 주로 업로드하면서 성장했다. 41만명의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고몽’ 운영자는 “영상을 즐기고 댓글로 소통할 수 있는 유튜브 채널은 영화 팬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모일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을 제공했다”면서 “마블 슈퍼 히어로의 성장은 유튜브의 성장과 맞물리는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마블 영화의 강력한 팬덤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밀도나 영향력 면에서 한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다.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4.2회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인 영화팬들이 모여 있는 시장인 셈이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마블은 18편의 영화를 국내에서 개봉했고 누적 관객 8400만명을 모았다. 2015년 개봉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외화로는 역대 최단기간 1000만명을 돌파했다. 발달한 IT기술문화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전파력, ‘떼창’ 등으로 대변되는 열성적인 팬덤 활동은 특유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마블 역시 이 같은 이유로 한국 시장을 주목한다. 예전만 해도 할리우드 스타들의 아시아 방문은 중국이나 일본에 집중됐지만 최근 몇 년 새 이 같은 관심은 한국으로 옮겨왔다. ‘아이언맨’의 주인공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2008년부터 세 차례나 한국을 찾았으며 로키를 연기한 톰 히들스턴과 스파이더맨의 주인공 톰 홀랜드도 각기 두 차례씩 한국을 방문했다. 올해 2월 개봉한 <블랙팬서>는 아시아 지역 기자간담회와 세계 최초 시사회를 서울에서 열었다. 이 영화에는 부산 광안리가 배경으로 등장했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도 서울의 모습이 담겼으며 국내 배우 수현이 출연했다.
MCU를 총괄하고 컨트롤하는 마블 스튜디오 케빈 파이기 대표는 지난해 한국 팬들에게 영상으로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이 영상에서 그는 “한국은 해외에서 중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시장이며 영화뿐 아니라 마블 상품, 게임도 큰 인기를 끈다는 점이 놀랍다”고 말했다.
2018년 2월 <블랙팬서> 개봉 당시 캐릭터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마블숍 동부산 지점에 줄을 선 고객들/마블 컬렉션 엔터식스 제공
마블은 2016년 세계 최초로 공식 캐릭터숍 ‘마블 컬렉션 엔터식스’를 서울에 열었다. 현재 전국에 마블숍은 6개다. 지난해는 전년 대비 매출액 성장률이 108%였으며 올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2% 늘어났다. 의류, 이어폰, 스피커, 피규어 등 3000여가지 상품이 갖춰져 있다. 30만~100만원에 이르는 고가의 피규어도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마블 컬렉션 엔터식스 영업·마케팅 담당 김홍빈 이사는 “이번처럼 영화가 개봉하는 달은 다른 달에 비해 매출이 2배 이상 늘어난다”면서 “평균 객단가(고객 1인당 평균 매입액)는 5만~6만원 정도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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