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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스코프

우리는 썰매를 탄다

by 신사임당 2018. 3. 6.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오는 9일 같은 장소에서 동계패럴림픽이 막을 올린다. 상대적으로 올림픽에 비해 관심은 덜하지만 우리를 기다릴 감동적 드라마의 열기는 결코 덜하지 않다. 이번 패럴림픽에서 메달 획득 가능성이 가장 높은 종목 중 하나는 파라 아이스하키다. 파라 아이스하키는 스케이트 대신 썰매를 이용하는 장애인 아이스하키로, 비장애인이 하는 아이스하키 못지 않게 격렬하고 속도감 있는 종목이다.

패럴림픽 개막식 이틀 전인 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썰매를 탄다>는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파라 아이스하키 팀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2014년 완성된 뒤 그 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상영됐으나 4년 만인 지금에야 대중적으로 빛을 보게 됐다. 장애인 이야기, 다큐멘터리. 흥행요소가 없기 때문에 좀처럼 상영관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때문에 제작자인 이효승 태흥영화사 전무와 김경만 감독은 그동안 학교와 병원, 관공서 회의장 등을 찾아 상영을 해오면서 선수들의 이야기를 알리겠다는 의지를 놓지 않았다. 이 전무는 “비록 늦은 개봉이지만 패럴림픽에 맞춰 대중들을 만나게 된 것이 한편으론 다행인 것도 같다”고 말했다.

파라 아이스하키는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패럴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국내에서는 2006년 처음으로 강원도청에 실업팀이 창단됐다. 이후 3년 만에 동계패럴림픽 본선에 진출하더니 2012년에는 월드챔피언십 은메달을 차지했다. 영화는 대표팀이 이 대회를 준비하는 2011년부터 2014년 소치올림픽 직전까지의 과정을 따라간다.

상업영화를 주로 제작해 온 이 전무가 영화 제작에 나서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선수들의 연습현장을 보고서다. “현장에서 땀 흘리며 연습하고 난 선수들이 짬을 내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더라고요. 몸도 불편한데 비장애인도 하기 힘든 과격한 운동을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도 새로웠고요. 이건 내가 ‘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함께 연습현장을 찾은 SBS PD 출신 김경만 감독도 같은 감정을 가지며 의기투합하게 됐다.

김 감독은 처음에 선수들의 냉랭한 반응에 당황했으나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존 방송에서 장애인들을 다루는 태도에서 그들이 불편함을 느껴 왔던 거죠. 제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장애인을 불쌍한 사람, 특별하고 동정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그리는 것이 가장 편하고 자극적이거든요. 보통은 ‘이렇게 힘든 사람들도 있으니 힘내라’는 식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소비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한 선수가 그래요. 방송에서 나온 촬영팀이 식사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밥상 위에 놓인 고기반찬을 치워달라고 했다고. 고기가 있으면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고.”

김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꾸준히 연습장을 찾아가 대화하는 것, 변함없는 모습으로 기다리는 것이었다. 상처 받고 닫혔던 선수들의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열렸다.

“언제가 가장 행복했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당연히 예전에 건강할 때, 과거의 어느 때를 답할 줄 알았는데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거예요. 그 순간 깨달았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하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제 마음엔 편견이 단단히 남아있었던 거죠. 그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영화 속의 장면은 어느 하나 연출된 것도, 손 댄 것도 없다. 그저 감독은 이들을 따라다니며 일상을, 나누는 대화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촬영기간이 3년 가까이 걸린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는 장애인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와 질감이 사뭇 다르다. 오히려 치열하고 땀냄새가 물씬 풍기는, 여느 스포츠 선수의 일상을 좇는 다큐멘터리와 큰 차이가 없다. 김 감독은 “내레이션이나 자막을 배제한 채 불친절하고 건조하게 편집한 것도 감정을 재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보는 이들이 최대한 상상하고 해석하고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피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다리가 없는 선수들이 휠체어를 이용해 경기장 문턱을 힘겹게 넘어가는 장면을 무심한 듯 보여준다. 그리고는 월드챔피언십이 열렸던 노르웨이의 문턱 없는 경기장을 지나다니는 선수들을 슬쩍 비춰준다. 세계대회에서 은메달을 따고 환호하는 빙판 위의 선수들은 뜨겁지만 언뜻 잡히는 관중석은 썰렁하기 그지 없다. 은메달을 따고 금의환향한 고국의 공항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다. “형은 꿈에서 걸어다녀, 휠체어를 타?” “내 딸이 나중에 결혼하겠다고 장애인 데려오면 가만 안둘 것 같아” “사고 난 뒤에 얼마나 울었어?”.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선수들이 툭툭 던지듯 나누는 대화들 역시 가슴에 와서 콕콕 박힌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어떻게 희망을 찾으려 노력했는지 따위를 구구절절 보여주지 않는다. 다리를 절단한 중도장애인이 대부분인 만큼 이들이 이전에 어떤 일을 했고,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와 같은 사연이 간략히 드러나긴 하지만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이들의 현재에 집중한다.


“나중에 죽은 뒤 하늘나라에 가서 어떤 삶을 살았느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거래요. 남들은 한 가지 인생만 살았지만 자신은 두 가지 인생을 살아봤기 때문에 더 풍요롭고 행복했다고.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는 것이고 그래서 지금의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한 거예요. 이들이 썰매를 타는 것도 행복하기 때문인 거고요. 영화가 말하려는 것도 결국 행복입니다.”

촬영과 개봉에 꽤 시차가 있지만 당시에 뛰었던 선수들은 지금 평창 패럴림픽 무대에 그대로 선다. 선수층이 두텁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서 파라 아이스하키 선수로 등록된 이들은 40명도 안 된다. 대신 영화에서 초음파 사진으로 보였던 아기는 태어나서 유치원생이 됐고 초등학생이던 어린이들은 중·고생이 됐다. 안타깝게도 촬영 때 폐암을 앓았던 정승환 선수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이 전무는 영화 개봉이 지연되면서 걱정스러웠던 것 중 하나로 이종경 선수의 사랑 이야기를 꼽았다.

“촬영 당시 이종경 선수는 연애 중이었어요. 여자친구 부모님의 반대가 컸던 중에도 사랑을 키워왔지요. 만일 개봉 전에 두 사람이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영화를 그대로 상영할 수 없잖아요. 상대쪽에서 초상권 보호를 요청한다면 해당 부분은 삭제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기우였어요. 그 두 사람이 드디어 올 가을에 결혼을 합니다.”

의도적으로 건조하게 만들겠다고 작정했지만 최근 몇 차례 열린 시사회에서는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김정숙 여사도 눈물을 흘리며 감상한 뒤 “가슴에 잘 새겨놓겠다”고 선수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 전무는 “7일 개봉하는 영화를 보든, 아니면 경기장을 찾아가 관람하든 선수들을 응원해주시면 좋겠다”면서 “더 많은 장애인들이 행복하게 썰매를 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한국 아이스 슬레지하키 대표팀의 정승환(왼쪽), 이종경(가운데), 한민수가 지난해 4월 강릉 하키센터에서 열린 2017 강릉 세계장애인아이스하키선수권 A-Pool 대회 예선 5차전 이탈리아와 경기가 끝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 아이스 슬레지하키 대표팀의 정승환(왼쪽), 이종경(가운데), 한민수가 지난해 4월 강릉 하키센터에서 열린 2017 강릉 세계장애인아이스하키선수권 A-Pool 대회 예선 5차전 이탈리아와 경기가 끝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동계패럴림픽의 꽃 파라 아이스하키>

파라 아이스하키(Para Ice hockey)는 원래 아이스 슬레지하키(Ice Sledge hockey)로 불렸다. 슬레지(Sledge), 즉 썰매를 이용하는 장애인 아이스하키이기 때문이다. 경기 룰은 아이스하키와 같다. 각 팀은 골리(골키퍼)를 포함해 6명의 선수로 편성되며 빙판 위에서 골대에 골을 넣는다. 썰매 추진을 위해 스틱의 한쪽 끝에 톱니 모양의 픽(pick)이, 다른 한쪽 끝에는 퍽을 칠 수 있는 블레이드가 달려 있어 하반신을 사용하지 않고 팔 힘으로 경기할 수 있다. 동계패럴림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으로 꼽힌다. 1991년 최초로 아이스 슬레지하키 월드컵 대회가 열렸다. ‘패럴’(parallel·평행의)이라는 단어를 따서 공식 명칭이 파라 아이스하키로 바뀐 것은 이번 평창대회부터다.

2006년 창단된 국내의 유일한 실업팀 강원도청 선수들은 대부분이 국가대표다. 이들이 2012년 월드챔피언십에서 은메달을 딴 것은 장애인, 비장애인 통틀어 역대 최고 기록이다.


올해 48세인 주장 한민수 선수는 이번 대회를 끝으로 은퇴한다. 정승환 선수는 ‘빙상계의 메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독보적인 스피드를 자랑한다.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세 차례나 최우수 공격수로 선정됐다. 대표팀은 2014년 소치대회에서 주최국 러시아에 맞서 승리를 거뒀으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이탈리아에 패해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대표팀의 이번 대회 목표는 메달 획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