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빙고, 빙블리. 사랑스러운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의 인기를 견인했던 또 다른 인물 서빙고를 연기한 이정은씨를 만났습니다.
화통하고 푸근한 언니같은 그와의 대화는 내내 폭소가 터졌고 화기애애한 재미로 가득했습니다.
그와의 이야기 들어보시겠어요?
*갓빙고. 대단하세요. 신이라는 뜻인데, 정말 최고의 찬사거든요.
=저는 처음에 머리에 쓰는 갓인줄 알았어요. 내가 극중에서 그걸 머리에 쓰고 나왔었나 하면서. 그러다가 신을 모시는 역할이라 갓빙고인가 생각했었죠. 스태프들이 알려줘서 알았는데 그게 엄청난 칭찬이더라고요. 깜짝 놀랐고 지금도 얼떨떨해요.
*뛰는 장면이 정말 많았잖아요.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이 하루에 촬영된게 아니라 며칠 걸쳐 촬영한거예요. 하루에 서너시간씩은 뛰었던 것 같아요. 하기 전에 감독님이 달리기 연습은 좀 해두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무지하게 열심히 뛰시던데요.
=얼굴로 뛰었죠. 얼굴로 열심히.ㅎㅎㅎ. 너무 안하던 운동을 해서 그런지 촬영 중간에 돌발성 난청이 살짝 오기도 했어요. 너무 과로했는지 영양 공급이 안돼서 그랬는지 병원에서도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수가 있다고. 다행히 괜찮아졌어요.
*젊은 친구들과 똑같이 달린거잖아요. 엄살도 좀 부리시지.
=첫 촬영이 달리기였어요. 나이 생각하면 좀 피웠어야 했는데 못 피우겠더라고요. 슬기씨나 보영씨 둘다 정말 너무 잘 뛰어요. 깡도 정말 세고. 특히 보영씨는 여릿여릿해 보이는데 정말 잘 뛰어요. 전작인 영화 <경성학교>에서 멀리뛰기 선수 역할을 해서 그런지 운동으로 엄청 단련이 돼 있더라고
요.
*이젠 많이 알아보지 않나요?
=그렇더라고요. 제가 간간이 한강에 운동하러 나가는데 이번엔 갔더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생이 알아보더라고요. 서빙고 아니냐면서.
*드라마에 대한 댓글도 많이 보셨나요?
=공연할 때는 전체적인 공연 평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검색도 해보곤 했는데 방송하면서는 전혀 못봤어요. 스태프들이 갓빙고라고 보여주더라고요. 사실 누군가 나를 인터뷰하자고 할줄도 몰랐어요.
*어떻게 캐스팅이 됐나요.
=제가 유감독님하고 <고교 처세왕>에서 함께 작품을 했어요. 이하나씨 엄마로 나왔었죠. 그때도 초기에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 많은 분량에 출연하게 됐는데 이번에도 감독님이 서빙고역할에 제일 먼저 떠올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릴 땐 어땠나요.
=제가 할머니 손에 컸어요. 부모님이 장사하느라 바빠서. 그런데 어릴 때 제가 장기자랑 하고 남 앞에서 나서는 걸 좋아했대요. 이야기 만들어서 들려주는 것도 좋아하고. 그정도였고 평범했어요. 고 2때까지는 그저 공부하며 지내다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게 고3때예요. 1987년이었거든요. 세상이 시끄럽고 시국이 어지럽고. 어린 마음에 왜 그럴까 싶었어요. 고민이 많이 됐죠. 어른들이 만들어내고 이끄는 세상의 불합리함과 부조리에 불만과 의문이 커졌고 여기에 사춘기적 고민과 반항심까지 겹쳐진거예요. 어른들이 살라는 길을 순종적으로 무작정 따를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하면 안될 것 같았어요. 내가 원하는대로 못 살았다는 기분도 들었고. 입시를 불과 한달 놔두고 진로를 바꿨어요. 연기를 해보자고요. 충동적이었죠. 제 안에 똘끼가 있었나봐요. 그런데 준비가 됐어야 말이죠. 그래서 실기가 적고 인물 안보는 곳, 그나마 성적이 좀 좋았던 편이라.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붙었어요.
*막상 들어가니 어떻던가요?
=짱짱하죠. 다들 엄청난 사람들이더라고요. 연기도 그렇고 영화 연출도 그렇고. 이미 고등학교 때 영화도 여러편 찍어본 동기들도 많고. 그런데 들어가보니 연기보다는 연출이 하고 싶더라고요. 배우로 살아남기에는 경쟁에서 확실히 밀리겠구나 하는 생각도 있었죠. <은교>를 만들었던 정지우 감독이 동기예요. 1학년 때 둘이서 같이 내내 영화를 찍었죠. 야학 학생과 선생님의 이야기였는데 이문식 선배가 그때 야학 학생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막상 다 찍고 보니 필름에 문제가 생겨 결국 완성본을 보지 못했어요. 몇달을 열과 성을 다해 매달렸는데 정말 허무했고 어이없었어요. 그때 이 길은 아닌가보다 하고 포기했어요. 뭔가 이 길이 아니라는 계시같고. 그래서 그냥 다시 연기해야겠다고 하며 오디션을 보러다녔죠. 눈치작전, 하향 지원하면서 어차피 남들 안할 것 같은 역할들을 맡았어요.
*졸업하면서 바로 데뷔하셨나요?
=졸업 후 극단을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마음에 딱 와닿는게 없었어요. 조연출 생활도 좀 하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박광정 선배의 <저 별이 위험하다>에 출연하게 됐어요. 그게 데뷔작이었죠. 동숭아트센터 개관 기념작으로 상연한 작품이었어요.
*그 작품이 반응이 좋았어요.
=다행히 그 이후로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나게 됐어요.
*뮤지컬도 많이 하셨어요. 특히 빨래는 배우 이정은을 널리 알린 작품이기도 하고요.
=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뮤지컬에서 맡은 역할들이나 노래를 보면 뮤지컬스럽지 않아요. 노래가 다 읊조리는 식이거든요. 대사인지 노래인지 구별이 안되는 거죠.
*뮤지컬 출연은 어떻게 하게 된건가요.
=제가 중간에 연극을 접을 뻔한 적이 있어요. 95년이었나. 병석의 아버지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그럴때 설경구 선배가 병원으로 찾아와 저를 설득했어요. 그때 지하철 1호선에 합류했어요. 곰보할매 역할이었는데 꽤 알려지게 됐어요. 그렇지만 당시 연극이나 뮤지컬을 해서 좀 알려져도 돈을 벌수는 없었거든요.
*할매역은 <빨래>가 워낙 유명하셔서.
=제가 지하철 1호선 할 때가 스물 여덟이었어요. 그런데 그 때 이후로 노역이 주로 몰리더라고요.
*연극 제작도 하셨던데 그건 어떤 이유였나요.
=제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것도 있었고 다른 배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너무 틀에 박힌 뻔한 작품이 아니라 배우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그런 무대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트레이닝이 되고 연기에도 도움이 될만한. 2000년과 2003년 두번 제작했는데 다 쫄딱 망했어요. 그러고는 연기를 접고 돈을 벌러 다녔죠. 갚아야 했으니까.
*무슨 일 하셨는데요.
=연기학원에서 레슨하면 좀 더 쉽게 돈을 벌 수는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그럼 안될 것 같았고. 내 오만한 자세와 연기를 대하는 생각들을 쳐내고 싶었어요. 고생을 사서해야 이걸 극복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야채도 팔고 김밥도 팔고 녹즙도 팔고 돈까스 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저 마트에서 판매왕 한 적도 있어요.
*그쪽에서도 굉장히 좋아하셨겠네요.
=같이 하자고 제안도 왔었다니까요. 잘 판다면서. 저는 제 성격이 그때까지 제 성격이 둥글둥글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마감 시간 되면 남은 야채를 떨이해야 하는데 그 순간에 무지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공격적인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때 연기에 대한 깨달음과 배움을 얻을 수 있었어요. 모든 배역은 다 내 안에 있구나, 상황을 인식하는 힘을 더 강하게 가질 수록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낼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죠. 연기란게 어떤 상황을 짐작하거나 상상해서 흉내내는게 아니라 삶과 맞닥뜨린 체험과 교훈에서 나오는 것이란 걸 깨달았어요. 그 순간 느꼈죠. 제가 지금까지 세상 물정 몰고 연기했다고 말이죠. 그전까지 책에서 연기를 배웠다면 그게 아니란걸 안거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기한 사람들의 연기의 질이 달라지는 것은 이유가 있는거예요. 삶에서 배운다는 것. 그때 많이 성장했어요.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채로워졌고. 그렇게 살고 있는데 다시 대학로에서 저를 들쑤셔대더라고요. 결국 돌아갔지요.
*카메라앞에 선 것은 연기 경력에 비해 짧아요.
=그전에 제가 카메라 울렁증이 있었어요.그래서 영상을 오랫동안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대가 좁다는 생각이 들었고 카메라울렁증도 극복해 보고 싶었어요. 학생들이 찍는 독립영화 단편영화 현장을 찾아다니며 1년에 20편씩 찍은 적도 있어요. 그렇게 애쓰고 나이도 들어서 그런지 어느 순간 극복되는 것 같더라고요. 철판을 깔자고 마음먹고 도전했는데 그 첫 작품이 <전국노래자랑>이었어요. 그 작품 찍을 때 편하게 연기하는 저를 발견한거예요. 무척 신났고 편해졌죠.
*연기의 영감을 어떻게 얻나요.
=전 주변에서 배우 포스가 없다고 해요. 하지만 슛 들어갈 때 그때 내가 완벽한 배우로 존재하면 되는거거든요. 끝나면 다시 사람들 속에 있는 그냥 나이고 싶어요. 그래서 평소엔 배우가 아닌 사람들과 많이 섞이고 어울려요. 영어학원도 다니고 춤동호회도 하고 마트가서 아줌마들도 만나죠. 거기서 에너지를 많이 얻어요. 그들의 삶의 모습과 고민을 보면서 저도 성장하고 삶의 현장들을 받아들이게 되거든요. 전 모두가 공평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배우이고 얼굴이 알려진다고 해서 그게 직업적으로 좀 더 유명한 사람이 되는거고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것 그뿐이거든요. 그게 전부이지 내 인격이 일반인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는게 아니잖아요. 모든 부분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공평했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신순애(김슬기)가 서빙고에 빙의한 뒤 서빙고의 모습.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순식간에 신순애 연기를 하는 대박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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