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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통신

암살과 베테랑 1천만 관객이 이야기하는 것

by 신사임당 2015. 8. 23.

 

 

2003년 영화 <실미도>가 처음으로 1천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이후 꾸준히 ‘천만영화’라고 불리는 초대형 흥행작들이 나왔습니다.

특히 지난해 한해 동안은 <겨울왕국> <명량> <국제시장> <인터스텔라> 등 4편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기록이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시장에서 아마 이달 중 또 새로운 기록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한달에 두 개의 한국영화 작품이 연이어 1천만관객을 동원하는 진기록 말입니다.

현재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는 두 작품은 지난 광복절에 1천만명 고지를 넘긴 <암살>,

그리고 무서운 기세를 이어가고 있는 <베테랑>입니다.

전자는 개봉 14일만에 관객 700만명을 돌파한 뒤 25일만에 1천만명을 넘어섰습니다.

후자는 전자와 마찬가지로 개봉 14일만에 700만명을 기록했습니다.

 

흥행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 두 작품이 지금 이렇게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시사점이 있습니다.

연중 영화시장 최고의 성수기를 이끌고 있는 상업 영화 두 작품이

현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의 뿌리를 나란히 짚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친일 문제라면 후자는 재벌문제입니다.
 

이전에 1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던 영화를 보면 공통적인 요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 시대가 갖고 있는 결핍과 갈증을 담아내는 것,

그리고 그 요인들이 영화적 재미라는 옷을 입고 전 연령층을 아우른다는 것입니다.

<변호인>은 좌도 우도 아닌 정의의 문제를,

<광해>는 진정한 리더에 대한 고민을,

<국제시장>은 기성 세대의 상실감을 풀어냈습니다.

영화자체의 만듦새도 중요하겠지만

어떤 타이밍에 그 작품이 나왔는가 하는 점도 흥행을 좌우하는 큰 요인인 셈입니다.

(물론 <도둑들>처럼 완벽한 오락영화도 있었고 <7번방의 선물>처럼 최루성 휴먼드라마도 있었습니다만.)

그런 점에서 <암살>과 <베테랑> 이 두 작품이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격렬하고 뜨거운 고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먼저 <암살>을 볼까요.

최동훈 감독은 이 작품에서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친일파 문제를 다룹니다.

최감독은 인터뷰에서도 여러차례

“친일은 우리 역사의 트라우마이자 상처고 친일파 청산 문제는 대한민국의 숙제”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다고 영화는 친일파 청산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충무로에는 일제강점기나 친일파, 독립운동 등의 소재로 영화를 만들면 흥행에 참패한다는 징크스가 있었습니다.

제대로 되새기고 고민도 하기 전에 누구나 아는 뻔한 메시지로 치부될 위험이 있어서일 겁니다.

다행히도 이 묵직한 메시지는 오락적 요소, 영화적 재미와 적절히 결합돼 오히려 더 뜨겁고 여운 있게 다가옵니다.
 

우연찮게 광복 70주년과 영화 개봉이 맞아떨어졌는데,

그 친일파 청산 문제가 7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현실이자 비극입니다.

영화 후반에는 친일파가 광복 이후 이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는 과정이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그대로 21세기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겹쳐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 되찾은 나라지만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

가까운 10여년의 역사만 되짚어봐도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과 시도가 번번이 실패했던, 기가 막히고 쓰라린 고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은 액션과 유머가 전면에 드러난 오락영화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으로 꼽히는 재벌을 다루고 있습니다.

안하무인에 공감능력이 결여된 괴물인 재벌 3세 조태오,

그리고 그를 둘러싼 환경은 이 사회의 법체계와 도덕, 상식 위에 군림합니다.

그에 맞서는 형사 서도철의 도전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개인들의 그런 작은 도전들이 더해지면서 어떤 결과와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를 통쾌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개인 조태오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같은 방식은 막연한 저항의 대상을 구체화시키는 동시에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고민하게 만들어줍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류승완 감독이 “어차피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패배감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극복하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했던

의도와도 통하는 부분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왜곡된 재벌문화 개혁.

이 둘은 ‘어차피 안될 것’이라는 패배감을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 최근 몇년간 우리 사회는 짙은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암살>에서 안옥윤이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하던 대사가 생각납니다.

마음 깊은 곳에 쌓여 있던 패배감을 자각시킨 날카로운 말.

이들 영화의 흥행이 우리 속의 패배감을 떨쳐내고 극복하는 뜨거운 몸짓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