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씨의 표절 사건이 불거지면서 나왔던 이야기는 99년에 이미 지적이 됐다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이었으나 그땐 그냥 어물쩡 넘어갔다는 거지요.
한겨레 기사에서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는
“의혹이 제기됐던 99년과 달리 지금 그는 아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주요 작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 의혹이 과거처럼 간단하게 봉합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어쨌거나 소설가 이응준씨가 허핑턴포스트를 통해 밝혔던 주장이 일파만파 전국을 들끓게 만든 지금...
당시의 기사들을 한번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한겨레 1999년 9월21일자 24면
왜 신경숙씨 ‘딸기밭’에 남의 글이 그대로 담겼나
“귀하./저는 이제는 고인이 된 안승준의 아버지입니다. 그의 주소록에서 발견된 많지 않은 수의 친지 명단 가운데 귀하가 포함되어 있었던 점에 비추어, 저는 귀하가 저의 아들과 꽤 가까우셨던 한 분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이미 듣고 계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그의 아버지로서 그의 돌연한 사망에 관해 이를 관련된 사실들과 함께 귀하께 알려드려야만 할 것 같이 느꼈습니다.”“귀하./저는 이제 고인이 된 유의 어머니입니다. 유의 수첩에서 발견된 친구들의 주소록에서 귀하의 이름과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귀하의 주소가 상단에 적혀 있었던 걸로 보아 저의 딸과 꽤 가까우셨던 사람이었다고 짐작해봅니다. 귀하께서 이미 알고 계실는지도 모르겠고, 참 늦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마는 그의 어머니로서 그의 돌연한 사망에 관해 알려드립니다.”
위의 인용문은 지난 91년에 숨진 재미 유학생 안승준씨의 유고집 (살아는 있는 것이오)(1994, 삶과꿈)에 서문을 대신해 실린 부친 안창식씨의 글이고, 뒤엣것은 신경숙씨의 소설 ‘딸기밭’((문학동네) 1999년 여름호)의 한 대목이다. ‘안승준의 아버지’가 ‘유의 어머니’로 바뀐 것을 제하면 거의 동일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인용문에 이어, 바위 언덕에서 추락하면서 뇌에 손상을 입는 바람에 얕은 개울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고 사망 원인을 서술하는 부분 역시 대동소이하다. 두 개의 글을 비교해 보면, 모두 여섯 문단에서 동일하거나 거의 유사한 문장과 표현이 발견된다.
‘딸기밭’은 안승준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작품이다. 젊은 여자들 사이의 동성애라는 금지된 사랑의 관능을 그린 이 소설에서 ‘유의 어머니’가 ‘귀하’에게 보낸 편지는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소설 전편을 통해 간헐적으로 삽입되는 여섯 문단의 편지 전부가 안창식씨의 편지를 약간 변형한 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이다.
“그는 평소 인간과 자연을 깊이 사랑하였으며, 특히 권위주의의 배격이나 부의 공평한 분배 및 환경보호와 같은 문제들에 관해 다양한 관심과 깊은 의식을 가졌습니다.”(안창식)
“저는 평소 그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인간과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 기아 문제와 부의 공평한 분배, 그리고 환경 보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신경숙)
작가 신씨는 “승준씨의 어머니에게서 책을 받아 읽고 너무도 슬프고 감동적이어서 언젠가 소설로 써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유족에게 누가 될까 봐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필요하다면 창작집을 낼 때 출처를 밝히겠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박철화씨는 (작가세계) 99년 가을호에 기고한 ‘여성성의 글쓰기, 대화와 성숙으로’라는 글에서 신경숙씨의 장편 (기차는 7시에 떠나네)와 단편 ‘작별인사’가 각각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와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를 표절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거론한 바 있다.
‘딸기밭’의 경우가 비록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작가 쪽의 부주의와 몰양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겨레 1999년 9월28일 24면
‘글마을 통신’에 대한 기고문
*출처 안밝힌 인용은 죄송 표절혐의 이해할 수 없다. 9월21일치 (한겨레) 24면 기사를 보고 해명과 거론의 필요를 느껴 이 글을 쓴다.
작년 9월께, 원주의 토지문학관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재미 유학생 안승준씨의 유고집을 그의 어머니께서 주셔서 일행들과 함께 받았다. 서문을 읽으면서 아픔과 감동을 느꼈으며 소설로 차용해 오겠다고 옆자리의 동료에게 말하기도 했다.
내 소설 ‘딸기밭’을 보면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가수의 노래말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멘트가 생략되거나 변용된 채 출처 없이 인용된다. 그 편지 역시 그 차원에서 내 소설 속에 용해될 수 있을 거라는 소박한 생각을 했고, 또 소설화되면서 맥락이 달라져 유족에게 누를 끼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앞서서 굳이 해당 부분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최근 다시 생각해 보고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보니 그것은 내 불찰이었다. 전화를 통해 늦게나마 양해를 해 주신 유족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사의를 표한다.
이번 기사에서 유감인 부분은 내 작품에 부당하게도 표절 혐의를 씌운 박철화씨의 글이 언급된 데 있다. 박씨가 거론한 파트릭 모디아노와 마루야마 겐지는 내가 존중하는 작가들이긴 해도 그들의 작품과 내 작품은 전혀 다른 줄거리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혹시 이들의 작품과 내 작품에서 유사한 모티프 한두 개를 발견해서 표절 운운 하는 것이라면 그건 위험천만한 단세포적 주장이다.
더욱이 최윤의 ‘회색 눈사람’(제목도 틀리게 ‘회색 그림자’라고 표기했다)이나 윤대녕의 ‘3월의 전설’이 (기차는 7시에 떠나네)와 어떤 유사성이 있나?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스스로도 “이러한 예단은 세심한 실증 작업을 거치기 이전의 성급한 견해일 수 있다”며 예문 하나 없이 “표절이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돌았었다”고 각주 처리를 해 놓은 점이다.
박씨 자신, 장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한 만큼 다른 작가에 대해 언급할 때는 섬세한 배려와 치밀한 분석이 따라야 했다. 사안에 따라서는 작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악의적인 발언을 평론의 기본 의무도 거치지 않고 어떻게 그리 무책임하게 할 수 있나?
거론할 의욕도 없던 차에 나의 불찰에 대한 지적이 박씨의 터무니없는 주장과 같이 배치되어 심적 부담을 느낀다.
나는 내 글쓰기가 적어도 사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칙 삼아 작가생활을 해 왔다. 하나 그 원칙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이런 글을 남기게 되어 안타깝다.
신경숙/소설가
한겨레 1999년 10월5일 24면
신경숙씨 주장에 대한 반론
비슷한 문장과 모티프 모든 것이 우연인가?계간 (작가세계) 99년 가을호에 발표된 나의 ‘여성성의 글쓰기, 대화와 성숙으로’는 신경숙씨 외에도 다른 두 여성 작가의 장편소설을 점검하는 글이다. 신씨와 관련된 부분도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표절 시비 때문이라기보다는 (기차는 7시에 떠나네)라는 작품의 서사 구조의 어설픔과 신씨의 작품세계 대부분을 감싸고 있는 소녀 취향의 미성숙한 퇴행 의식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 한 단면으로 본문 아래의 각주에서 표절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인데, 신씨가 그 근거를 물으니 예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표절에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신씨가 (문학동네) 99년 여름호에 발표한 ‘딸기밭’처럼 남의 문장을 슬쩍 도용하는 일이다. 이런 짓은 분명한 증거가 있어 쉽게 해결이 된다. 어쨌거나 불가피하게 남의 글을 빌려 쓸 경우에라도 인용과 함께 최소한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이 글쓰는 이의 정직함이다. 그런데 신인을 한참 벗어난 신씨가 그것을 잘 몰랐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더 심각한 표절로서, 신씨 스스로 “유사한 모티프”라고 말한 것과 관련이 있다. 남의 글의 구조를 빌려오는 일, 이미지를 차용하는 일 등이 그것인데, 작품의 배경과 등장인물의 이름과 글의 서사적 문맥만 바꾸어 놓는다고 해서 혐의를 벗지는 못한다. 다른 작가들의 정신의 매혹을 충분히 저작하여 소화시키는 대신 무늬만 자신의 것으로 해서 다시 포장을 하는 일이 더 위험한 표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표절이 단순한 아둔함에 가깝다면, 뒤의 것은 고의적인 은폐 기도로 해서 이중으로 독자를 속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신씨의 ‘작별 인사’를 두고 (물의 가족)의 표절이라고 말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우선 문장 차원에서. “물기척이 심상치 않다.”:“물마루 기척이 심상치 않아.” 앞의 것은 (물의 가족)에서 화자의 죽음과 함께 전체 작품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첫 문장이고, 뒤의 것은 ‘작별 인사’에서 별 뜻 없이 폼을 잡은 소단락 표제에 해당하는 한 문장이다. 흩어 놓기는 했지만 아래의 경우도 혐의가 있다. “헤엄치는 자의 기척이 한층 짙어져 오고 있다.”:“먼데서 나를 데리러 오는 자의 기척이 느껴진다”, “지척에서 나를 데려가려는 자의 기척이 느껴진다.” 앞과 뒤 모두 각기 소단락의 표제를 이루는 문장이다. 뒤의 두 문장은 ‘작별 인사’에서 그저 작품을 열고 닫는 허사들인데-왜냐하면 둘 앞에 각기 “눈을 떴다” “눈을 감았다”는 기능 단위의 문장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마루야마 겐지를 멋지게 가져다 장식으로 쓰려 한 것이다.
게다가 상징적으로 압축된 잠언투의 표제와 그에 뒤이은 짧거나 긴 서술 단락으로 이루어지는 구조는 두 작품이 동일하다. 그리고 둘 다 죽은 자의 영혼인 작중 화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를 굽어보며 설명하고 묘사하고 회고하는 구조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두 작품 모두 사자와 살아 있는 자 사이에서 온통 생과 죽음을 가르는, 혹은 그 둘을 잇는 물의 이미지가 출렁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고의성 없는 우연일까?
그러니 적어도 (풍금이 있는 자리)의 신씨라면, 지금 상황에서는 자신이 표절을 하지 않고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도 유일한 선택일 것이다.
박철화/문학평론가
문화일보 2000년 9월4일 19면
평론가 정문순씨 주장, 신경숙 또 ‘표절’ 도마에
“단편 ‘전설’ 日극우작가 작품과 유사”작가 신경숙(35)씨의 소설이 또다시 표절혐의의 도마에 올랐다.문학평론가 정문순씨는 계간문예지 ‘문예중앙’ 가을호에 실린 ‘통념의 내면화, 자기 위안의 글쓰기’란 글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95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에 실린 (신씨의)단편 ‘전설’은 명백히 일본의 극우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학원사)의 표절작이다”고 주장, 문단의 파문이 예상된다.
정씨는 “일제 파시즘 때 동료들의 친위 쿠데타 모의에 빠진 장교가 대의를 위해 자결한다는 ‘우국’의 내용과 한국전쟁 때 한 사내가 전쟁터에 자원입대하여 실종되는 ‘전설’은, 남편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때 남은 아내들의 선택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점에서 주요 모티브가 유사하다”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정씨는 두 소설이 “10여개의 비슷하거나 거의 동일한 문구는 물론이고 남편의 죽음이나 참전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아내의 태도, 역순적 사건 구성, 서두에 역사적 배경을 언급한 전개방식 등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나 영향관계로 해석될 여지를 봉쇄해버린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씨의 작품에 대한 표절시비는 지난해 문학평론가 박철화씨가 신씨의 단편 ‘딸기밭’과 ‘작별인사’의 표절문제를 지적하면서 제기된 바 있다. ‘딸기밭’은 본문에 실린 편지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그대로 전제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 ‘작별인사’는 일본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현대문학)과의 연관성이 문제되었었다. 또 박씨는 신씨의 장편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프랑스의 작가 파트리크 장 모디아노와 한국 작가 최윤, 윤대녕과의 관련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박씨의 지적이 신씨의 근작들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면 이번에 정씨가 문제제기한 것은 신씨의 옛단편의 표절혐의를 주장한 것.
특히 정씨는 “신경숙이 어떤 연유로 군국주의를 한껏 미화한 소설의 인물들을 비판없이 따왔는지 참으로 괴이쩍다”고 비판의 강도를 높이며, “두 소설의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인물들의 내면에서 작가의식의 근친성이 감지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정씨는 “90년대 문학은 표절 시비로 시작해서 표절시비로 끝났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당대에 격찬받는 작가도 얼마든지 표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위태로운 자리에 있음을 본다”고 주장, 90년대 활동한 다수의 작가들이 표절의혹이 있음을 내비쳐 문단의 파란이 예상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우국> 표절 이야기는 15년전과 지금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같은 주장인데 그때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 현재 이같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당시와 현재의 달라진 위상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신경숙씨는 상당한 인기작가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달라진 미디어 환경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SNS의 발달로 누구나 정보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환경 말입니다.
이응준씨의 주장은 SNS를 통해 유통되는 허핑턴포스트코리아를 통해 소개됐고
이는 수많은 구독자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퍼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과거의 미디어 환경에서 봤을 때 특정한 문학계간지가 이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독자층은 문학과 관련된 일부 계층에 한정돼 있습니다.
전문지에 실린 주장을 본 문학관련 기자가 이 내용을 기사화할 때라야 일반 독자층에 전해집니다.
그것도 당시의 전 언론사가 이를 기사화한 것은 아니었고 소수의 매스미디어만 이를 다뤘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SNS가 활발히 공유되는 시절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전파하는데는
명백히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던 거지요.
비단 이 문제 뿐 아니라 SNS가 아니었으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도 잘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초기에 문제가 불거지고 유야무야 넘어갔을 당시,
그 당사자들은 속으로 “정말 다행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오류와 착각은 결국 한국 문단에 씻기 힘든 치욕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23일 오후 서울 서교동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 공동주최로 <신경숙 작가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경향신문 정지윤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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