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신해철씨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지난 22일 심정지로 응급 수술을 받았던 그는 27일 오후 8시19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짧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마흔 여섯의 나이입니다. 사인은 저산소허혈성 뇌손상이라고 합니다.
그가 털고 일어나기를, 잘 버텨주길 바랬는데 이렇게 안타깝고 허망하게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네요.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남은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만
왜 이리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네요.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들, 평생 부딪히고 싸워오면서 만들어왔던 그의 길이
후배들이 더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는 바탕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윤상과 함께 했던 프로젝트 노댄스 당시의 사진입니다.
96년 넥스트의 새 앨범 발표장에서.
제가 고등학생 시절 데뷔한 그는 제 청소년기 정서적 지분의 상당부분을 차지한 뮤지션입니다.
그가 데뷔했던 것은 1988년 대학가요제입니다.
무한궤도라는 팀으로 출전해 이 때 대상을 받았지요.
이들이 불렀던 ‘그대에게’는 지금도 젊은 층에 익숙한, 늙지 않은 곡입니다.
밝고 화려한 키보드 사운드가 듣는 이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이곡은
지금 들어도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며 흥분되는 느낌을 억누르기 힘듭니다.
가사는 자칫 유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내 전부이고 그 사랑앞에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그런 사랑 노래.
하지만 이 가사는 당시 더할나위없이 로맨틱했고
스펙좋고 비주얼 뛰어난 꽃미남들을 통해 박력있는 사운드로 재현되면서
수많은 여고생들의 판타지로 떠올랐습니다.
팝음악 외에 딱히 누릴 것 없던 척박하던 대중문화 토양에서
이들의 등장은 문화적 충격이고 선물이었으니까요.
적어도 그 시절을 공유했던 우리 세대에겐 말입니다.
무한궤도 1집에 들어 있던 곡들은 주로 개인의 존재론, 자아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그 교실’로 시작되던 ‘우리앞의 생이 끝나갈 때’,
이 노래는 정말 많이도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흐르는 시간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질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야자 중간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땡땡이 치면서 듣고 따라부르고
암담하고 답답하던 그 시절을 버티고 이겨내는 친구같은 곡이었습니다.
신나는 리듬에 20대 초반의 순정어린 치기를 담았던 ‘여름이야기’는
나도 대학가서 이런 연애 해보리라 하는
말도 안되는 희망을 불어넣어줬던 곡이랄까...
이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무한궤도의 음악적 수명은 길지 않았습니다
무한궤도는 1집 내고 해체됐고 신해철은 이후 솔로가수로 활동합니다.
여기서 무한궤도의 전 멤버들은 다시 015B라는 팀으로 재결성을 하지요.
97년 서울대에서 대중문화 관련 강의하는 모습
99년 공연하던 모습입니다.
90년대 초반 누구보다 빛나던 가수 신해철은 당대의 아이돌이었습니다.
그가 발표했던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안녕’ 등은
당시 대중가요 트렌드와는 차별화된 포인트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특히 ‘안녕’을 통해 당대 청춘들은 영어로 된 랩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며 대중가요의 신세계를 맛봤습니다.
그의 가사는 무한궤도와 이어졌습니다. 무한궤도에서도 직접 곡을 쓰고 만들었던 그는
솔로에서도 여전히 강한 자의식을 드러냈고 노래했죠.
지금 들으면 자칫 유치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그가 보여줬던 모든 것은
새롭고 신선했고 마음 깊은 곳을 자극했고 멋있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데미안 이상으로
당대의 청춘들을 알에서 깨고 나오게 하는
통과의례적인 의미와 상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위스키 브랜디 블루진 하이힐 콜라 피자 발렌타인데이’로 시작하는 ‘재즈카페’도 정말 재미있는 곡이었죠.
90년대 초반, ‘오렌지족’으로 대변되던 강남 소비문화와 이같은 문화의 최정점에 있던 트렌드세터들을 그대로 포착해낸,
시대의 자화상같은 곡입니다.
지금도 간간이 가사를 줄줄 읊어보게 되는데
그 안에서 묘사하는 내용은 21세기, 현재의 모습이라 해도
별 괴리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2002년 라디오 진행당시 모습
솔로활동을 한 뒤 신해철은 넥스트라는 록그룹을 결성합니다.
넥스트의 ‘도시인’ ‘인형의 기사’ ‘날아라 병아리’ 등 히트곡을 내며 대중성, 음악성 모든 면에서 찬사를 받습니다.
90년대 중반, 그는 넥스트 활동을 하면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OST작업을 하기도 했고
전람회의 앨범 프로듀싱 등 다양한 음악적 활동을 했습니다.
이와 함께 라디오 DJ로도 꾸준히 대중들과 음악적 만남을 이어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 군입대를 했고 대마초 파문으로 공백기를 갖기도 했으나
90년대 음악계를 이끄는 주축으로서 그의 역할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2005년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심혜진씨와 신해철씨. 정말 싱크로율 완벽했던 커플입니다.
2005년 출연했던 백분토론.. 복장으로 살짝 논란이 됐다는..
1997년 넥스트 활동을 중단한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지요.
이후엔 전자음악을 접목한 음악적 실험의 결과물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2000년대들어서 그는 주로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합니다.
강한 카리스마와 독설, 놀라운 언변은 그를 마왕의 지위에 올려 놓습니다.
정치적 성향을 밝히는데도 거침없었고 소신있는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2002년 대선 당시 고 노무현 대통령을 공개 지지했고 시사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의견도 거침없이 펼칩니다.
한동안 음악 활동을 쉬던 그는 지난 6월 새 앨범 <리부터 마이셀프>를 6년만에 내놓았지요.
자신을 재부팅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4개월만에 생각지도 못한 건강 문제로 그를 이리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2008년 김제동씨와 함께 출연한 100분 토론
2008년 데뷔 20주년 쇼케이스에서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추모제에서 노래한 뒤 눈물을 흘리는 모습
신해철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사진...
불과 얼마전 까지도 그는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노래가 이제는 다음 세대를 위한 무엇인가로 이야기의 확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무엇을 이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행복한가가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서로와 이웃,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로 확장되는 노래
그는 그런 노래가 우리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서로에게 그런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2009년 신해철씨가 음악감독을 맡았던 뮤지컬 <진짜진짜 좋아해> 제작발표회
2011년 오페라스타에 출연하셨죠...
지난해 대학가요제 폐지 반대 기자회견장에서
그는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노래를 멈췄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남았습니다.
남은 우리는 그의 노래로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해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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