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신문에 이같은 제목의 기사가 나왔습니다.
소록도에서 20년째 머물며 한센병 환자를 치료해 온 치과의사선생님 오동찬씨 기사인데요
어디서 본 듯하여 기억을 더듬어보니
17년전 제가 인터뷰 했던 분이었습니다.
소록도에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았던 그 당시
그 분을 취재하기 위해
소록도를 찾았고 병원과 댁까지 찾아보았던 기억이 있네요.
사모님 역시 소록도 현지 병원에서 간호사로 계셨습니다.
오선생님, 그리고 사모님과 이런저런 말씀도 나눴고
제가 방문했던 날이 수요일이라
소록도 현지 교회를 찾아
수요 예배도 함께 드렸습니다.
교회 분들과 식사도 했고요.
교회 설교하시던 전도사님도 한센병 환자셨던 것으로 기억이 나네요...
사모님은 야간 교대 당번이라 식사후 곧바로 병원으로 가셨죠.
나중에 밤에 선생님과 함께 사모님이 근무하시는 병원 야간 상황을 보러 갔었는데
입원해 계신 할머니 환자들(한센병 환자들)이
일종의 잠투정을 하시더라구요.
병실을 살피던 사모님은 할머니 환자들과 마치 딸과 엄마같은 대화로
세심하고 살뜰하게 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는 26일 시상식이 서울에서 있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에는 이런저런 고민과 갈등도 있었지만 소록도에 머물겠다고 하셨습니다.
공보의로 계셨던 상황이라 그 이듬해면 복무기간이 끝나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솔직히 얼마나 계실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십수년간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우연찮게 본 기사에서
그분이 그 때의 결심을 뿌리내리고 지금까지 지켜오신 것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감사함과 함께 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땐 결혼한지 얼마 안되셨는데
자녀는 얼마나 두셨는지
그 당시 소록도에 계신 분들이 아들 낳아야 한다며 마늘도 많이 갖다 주셨다는데
아들은 낳으셨는지
결혼 당시 300원, 500원씩이 담겨진 축의금 봉투를 도저히 쓸 수 없어 모아놨다고 하셨는데
그건 아직도 갖고 계신지...
많은 것이 궁금해집니다.
1997년 그때 썼던 기사를 뒤적뒤적 찾아보았습니다.
1997년 11월 4일 경향신문 25면.. 3년차 햇병아리 기자이던 시절 썼던 기사입니다. .
오동찬씨(30)는 소록도의 「인기스타」이다. 나환자 1,000여명중 그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한명도 없다.
소록도 병원 치과 공보의이기 때문은 아니다. 하루 진료시간은 기껏 2시간여. 오전 9시30분에 시작해 12시전에 끝난다.
그는 「진료시간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짧고 가장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의사」일것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일」은 사실 그때부터 시작이다.
그러나 그 일이라는것도 따지고보면 「노는 것」이다.
점심을 먹은후 늘 환자지대(환자들이 모여사는 마을)로 향하지만 치료를 위한 나들이는 아니다.
그저 이집저집 기웃거리며 사람들을 「귀찮게」 할 뿐이다.
『할매, 뭐하고 있소. 밥은 먹었당가』
만나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건네며 안부를 묻는다. 시장하면 밥을 차려달라고 하고 장기를 두거나 아무 집에나 벌렁 드러누워 낮잠을 자기도 한다.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다 보니 「유명인사」가 되지않을 수 없다.
무턱대고 「떼를 쓰는」 철부지 아이같은 치과의사. 그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것은 치과의사 오동찬이 아니고 바로 그런 오동찬이다.
대부분 70세가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인 이들은 모처럼 살갑게 다가온 의사를 손자나 아들 대하듯 한다.
다른사람은 몰라도 이들은 그래서 「치과의사」의 말은 꼭 믿는다.
『이제껏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한 약속은 한번도 어긴 적이 없어요.
그런데 몇달전 내가 금요일 오후에 가겠다고 해놓고선 그만 깜박했지 뭡니까.
이튿날 안 사실인데 그 할아버지가 저녁 10시까지 밖에서 기다리셨다더군요.
보통 이곳 어른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저녁 8시쯤인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진료가 끝난후 환자들의 마을을 찾는 일은 벌써 2년이 넘었다. 한 1년 있다가 「줄행랑」 놓을 계획이었는데 그 몇배의 세월이 흘렀다.
95년 5월 조선대 치대를 졸업하고 서울 강남성심병원에서 1년간 수련을 마친 후 군복무를 대신하는 공보의로 소록도를 찾았다.
큰 뜻없이 「그냥 한번 가 보고 싶어서」 선택했다. 대부분 꺼리기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했지만
소록도에서 1년만 근무하면 다음번엔 원하는 지역으로 옮길 수 있는 「특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실제 일해보니 할 만했다.
환자보는 시간은 짧았고 노는 시간은 많았다. 1년쯤 「쉬었다」가기엔 아주 좋은 자리였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조금씩 변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서로 마음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이빨만 치료해주면 되는 그런 기능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있는 기간만이라도 그들과 더불어 살고 싶었다.
그때부터 동생리, 남생리등 환자지대의 마을을 찾아 나섰다. 눈인사를 건네며 얼굴을 익혔지만 마음의 문을 넘는 일은 쉽지않았다.
경계의 눈빛으로 얼굴을 돌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우리를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의사가 마을까지 찾아온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서는 일없이 놀다가고 밥까지 같이 먹는 의사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먼저 아는 척을 하고 직접 가꾼 귤, 감자, 호박등을 들고 병원을 찾기도 했다.
『꼬박 6개월 걸렸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생각이 변했지요. 이곳이야말로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곳인데 어딜 가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결심을 하자 「빨리 돌아오라」는 지도교수의 이야기나 가끔씩 만나는 치대 동기들의 「개업해서 얼마 벌었다」는 소리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내친 김에 그는 지난 5월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소록도에서 6년째 일해온 간호사 이승희씨(29)와 결혼했다.
오씨 못지 않게 환자들 사이에 인기를 차지 하고 있던 부인이었다. 결혼식을 올리던 날 그는 「덕담」 대신 적잖은 「악담」을 들었다.
『우리 이간호사 울리면 죽을 줄 알어』
마을사람들은 이와함께 「거금」의 축의금을 내놓았다. 봉투속엔 300원, 500원, 많게는 1,000원도 담겨 있었다.
한 할아버지는 바지춤을 뒤져 3만원을 내놓으며
『이돈으로 요강사고 돈 남으면 경대사고 그래도 돈 남으면 베개도 사. 알았지』라고 몇번이나 당부했다.
그날 받은 축의금을 그는 봉투째 고스란히 모아놓았다. 결코 「쓸 수 없을만큼 많은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아들낳아야 한다며 마늘을 가져다 주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
아무 부러울 것 없는 그이지만 한가지 부족한것이 있다. 「조금의 관심과 지원」.
의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다. 지원해주는곳도 없다.
칫솔질도 힘들어 전동칫솔이 필요하지만 혼자힘만으로는 다 사드릴 수 없다.
내년 5월이면 복무기간이 끝나는 오동찬씨.
사람들은 그가 떠날까봐 벌써부터 걱정이지만 그는 「돌아갈곳이 없다」며 「같이 살게해달라」고 부탁하기 바쁘다.
신문에 나오고 싶지않지만 「혹시 할아버지, 할머니를 도와줄 분들이 있을것 같아」 인터뷰에 응한 「소록도의 손자 치과의사」 오동찬씨.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함께 나눌 따뜻한 이웃이 결코 적지않을 것이다.<고흥 소록도=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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