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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통신

패자가 된 인디밴드

by 신사임당 2012. 9. 13.

인디밴드 =2= 패자부활전…?


정말 후딱 깨는 일이 있었죠. 인디밴드를 소외계층으로 끌어안기로 했는지 모르겠는데,  박정희 시절 청년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생각하면 아이러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이러니가 아니라 당시 탄압해서 ‘패자’가 됐으니 위로해주는 이벤트를 벌여보자는 심산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박정희 정권 대중문화 탄압은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록음악과 포크 등 청년문화에 초점이 맞춰졌고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궤멸상태가 됐습니다. 시절을 살아왔던 많은 가수들은 그때를 기억하고 증언하며 사료들도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복판에서 고초를 겪었던 분이 신중현 선생일 겁니다. 예전에 분을 만났을 당시의 이야기들을 들을 있었습니다. 개별인터뷰, 여러 차례의 기자회견에서 들었던 그분의 말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1975 5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고 같은 12 연예계에 대마초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신중현 선생은 대마초 소지 혐의로 5년간 방송출연이 금지됐고 음반판매도 금지조치를 당했습니다. 국민가수로 일컬어지는 조용필씨 많은 가수들도 가요규제 조치로 한동안 방송가를 떠나 있었고요.

신중현 선생은 전만해도 외국, 특히 일본 아티스트들이 한국 대중음악을 인정하고 한 수 배우러 오기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요계에 닥친 한파로 대중음악 수준이 한참을 후퇴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당시 청와대로부터 찬가를 만들라는 요구를 받았다가 거절했는데 일이 탄압과 무관치 않았을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어쨌든 황당할 정도로 살벌했던, 지금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없던 시절, 긴급조치 시절은 경거망동 하는 것도 처단의 대상이 됐었다고 하네요. 경거망동한 노래를 부르는 , 당연히 처단 대상이겠죠. 그래서 이뤄진 가요정화조처로 문화공보부는 가요정화대책을 발표했고 이전에 발표된 수많은 곡들을 금지곡으로 판정했습니다.

                               

어떤 노래가 금지곡이 됐을까요? 그대로 경거망동한 노래들이죠. ㅋㅋㅋ. 불만 불신풍조를 조장하고 냉소적이고, 혐오감을 주고, 폭력적이고, 창법이 저속하고…. 지금 아이돌 노래는 죄다 금지곡일겝니다. 어디 감히 내가 제일 잘나간다고 나대고, 같은 필요없으니 꺼지라고 있겠습니까.

신중현선생의 노래를 비롯해 김민기, 이정선, 송창식, 이장희 당대의 가수들은 대부분 마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당대를 풍미하던 록과 포크음악은 검증대상이 되면서 동시에 가장 피해자가 됐습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음악인들, 이들이 은둔하면서 가요계는 그렇게 웅크리고 위축된 암흑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지요.

현재 자유로운 청년문화 정신을 상징하고 이어오는 한 줄기가 인디밴드 일겁니다. 음악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다양한 장르와 형태를 꽃피우며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 한 축입니다. 

그런 인디밴드를 패자, 2군이는 생각하는 것.... 아마 그분은 지금도 1975년을 살고 계신 건 아닌지... 

 아래는 예전에 서울신문에 나왔던 기사의 토막입니다. 

신씨의 구속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연행 이틀째 새벽에 검사가 취조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국가 방침이니까 들어가 있으라 말을 전했다.정신병동에 1주일 입원해 있은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노래와 인생이 모두 묶이는 신세가 됐다.박대통령이 담당 검사 어깨를 두드리면서 격려했다는 소문을 후에 들었다고 한다.

신씨는 당시 정황을 볼때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문화탄압 표적이 자신과 자신의 노래였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60년대말부터 월남전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습니다.세계적으로 반전(反戰)무드가 강했고 음악은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강하게 담아 전했지요.그같은 록을 따랐던 노래가 금지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당시 히트했던미인이나봄비’‘미련’‘ 여인’‘생각해’‘ 누가 있었나봐등이 모두 현대감각을 살려 사랑을 표현한 노래들인데 모두 금지곡이라니요.평소 알고 지내던 평론가들이 앞장서서 노래에 칼질을 해대더군요
4
년전에 피운 대마초를 핑계 삼아 75 족쇄를 채웠고 87 완전 해금될때까지 50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제가 구속된뒤 가요뿐 아니라 문학 문화예술 장르에서 구속과 금지의 회오리가 거세게 일었지요.당시 대중음악으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던 저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대마초가 핑계로 작용했구요
그저 음악이 좋아 혼자 기타를 배웠고 우리 것이 우러나는 음악 만들기에만 몰두했다는 신씨.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의 대마초 사건이 우습기만 하다.대마초가 무언지도 모르고 피워대던 일이며 대마초 가수 오명을 낳은 시대적 상황들…. 모든 것들이 이제는 기억 속에만 있다.그러나 어쩔수 없이 치러야만 했던 과정 치고는 댓가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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