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대량 생산되는 염소젖 유제품은 대부분 낙농업 강국 뉴질랜드 등 해외에서 수입한 원료를 사용한다.
산양분유, 산양요거트, 산양치즈, 산양우유, 산양단백질…. 시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제품 중 ‘산양’의 젖으로 만들었다는 제품이 꽤 있다. 이 산양은 양일까, 염소일까. 아니면 젖을 생산하는 별도의 동물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산양은 양이 아닌 염소다. ‘시프(sheep)’가 아닌 ‘고트(goat)’다.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흑염소도, 몇 년 전 TV에 방영됐던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에 등장했던 ‘산양 잭슨’도 모두 염소다. 출연자들이 함께 짜서 나눠 마시던 ‘잭슨이 유(乳)’는 염소젖이다.
■ 염소와 양
염소는 세계적으로 570여 품종이 있다. 그중에서 젖을 짜는 염소를 유용종(乳用種)이라 한다. 산양(山羊) 혹은 유산양(乳山羊)이라고 부르며 품종과 개체 수가 가장 많다. 중국과 인도, 지중해 연안에서 많이 키운다. 자넨종, 알파인종, 토겐부르크종, 누비안종이 유용종 4대 품종이다. 이 중 자넨종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육된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털을 얻기 위해 키우는 염소는 모용종(毛用種)이다. 인도 카슈미르 지역이 원산지인 캐시미어종이 대표적이다. 고급 모직물의 대명사인 캐시미어의 원료를 이 염소에서 얻는다. 마리당 생산량이 0.1~0.5㎏에 불과하다. 고기를 얻는 것이 목적인 염소는 육용종(肉用種)이다. 전통적으로 몸보신을 위해 먹던 재래종 흑염소가 이에 속한다. 아무튼 산양의 공식적 명칭은 ‘염소’다.
우리가 아는 양(sheep)과 염소는 어떤 관계일까. 양과 염소는 생물학적으로 속(屬)이 다른 동물이다. 양의 염색체는 54개, 염소는 60개로 서로 다르다. 양 역시 공식적인 이름이 있다. ‘면양(綿羊)’이다.
국립축산과학원 김관우 연구사는 “양과 산양은 면양과 염소로 지칭하는 것이 맞다”면서 “개정된 축산법을 비롯해 관세청 관세통계 통합품목분류표 등에도 면양과 염소로 통일되어 기재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워낙 오랫동안 산양과 염소가 혼재되어 사용되다 보니 도축증명서 등 다양한 공문서에 혼용되기도 하지만 꾸준히 개선작업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참고로 천연기념물 217호인 산양(goral)은 면양도, 염소도 아닌 별도의 존재인 ‘산양’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염소젖 유제품은 대부분 ‘산양’으로 표기되어 있다. 수입된 염소치즈 등 일부 유제품에 염소라는 단어가 표기된 경우도 있지만 드문 편이다.
■ 구별되지 않고 사용된 이름
그렇다면 염소와 면양은 왜 이렇게 다양한 단어로 뒤섞여 사용되어왔을까.
우선 한반도에 먼저 들어온 것은 염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염소는 약 2000년 전 삼한시대 말 즈음부터 사육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면양은 고려시대 금나라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염소가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불렸던 이름은 양이다. 조선시대 이전의 문헌에는 고(羔)나 수염이 난 소라는 뜻의 염우(髥牛)라는 표기도 있었으나 주로 양으로 통용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면양이 들어온 뒤에도 양이라는 명칭이 함께 사용됐다. 여기에다 중국에서 염소를 산양으로 지칭하면서 국내에서도 혼재되어 사용됐다. 옛 중국 문헌에는 평지에서 키우는 면양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산에 사는 염소를 산양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다 보니 양, 염소, 산양 등이 제대로 구별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었던 셈이다.
농촌진흥청 농사로 포털(www.nongsaro.go.kr)에서는 세종실록이 가장 먼저 명확하게 양과 염소를 구분해 기록된 문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세종 13년에 “부잣집과 관(官)에서 고(羔)와 양(羊)을 많이 이용한다”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고는 흑염소를 의미한다. 또 다른 부분에는 “종조제사에 면양을 쓴다. 종전에는 염소를 면양 대신 이용하였다”는 대목도 있다. 연산군실록에는 “제사에 쓸 면양이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아서 염소를 대용하였다”라고 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국가기록원이 2015년 1월 발간한 뉴스레터에는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양은 면양이 아닌 염소로 추측된다고 쓰고 있다. 다양한 자료에 남겨진 양의 모습이 면양보다는 염소에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염소젖으로 만든 유제품. 일동 후디스 산양유아식과 하이뮨 프로틴밸런스. 일동후디스 제공
■산양젖? 염소젖? 소젖?
‘산양’ 유제품이 국내 시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2003년 일동 후디스가 산양분유를 내놓으면서다. 당시 값은 일반 분유에 비해 2배 가까이 비쌌다. 이후 남양유업, 매일유업 등도 잇따라 산양분유를 생산하면서 경쟁이 본격화됐다. 일반 분유에 비해 훨씬 비싼데도 시장이 커졌던 것은 산양유가 모유에 가깝고 소화가 잘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일동후디스의 또 다른 인기 제품 하이뮨 프로틴 밸런스도 산양유의 장점을 내세웠다. 산양유 단백질의 성분과 뛰어난 소화 흡수력이 차별화된 포인트가 됐다는 것이다.
산양젖, 그러니까 염소젖의 장점은 뭘까.
김천호 강원대 수의학과 명예교수는 “산양유는 우유에 비해 지방구(지방입자)가 6분의 1 정도로 작아 소화흡수가 뛰어나고 설사나 변비를 일으키기 쉬운 사람에게도 적합한 유음료”라며 “유성분이나 유질이 모유에 가까워 예로부터 모유가 나오지 않을 때 아기의 대용유로 이용되어왔다”고 말했다. 우유와 영양분을 비교했을 때 셀레늄 함량이 27~28% 많은 것도 염소젖의 경쟁력으로 꼽힌다. 김 교수는 “셀레늄은 항암, 항노화 기능을 갖고 있는 성분”이라며 “셀레늄을 비롯해 단백질, 칼슘, 미네랄 등의 함량이 높지만 엽산은 우유나 모유에 비해 적다”고 덧붙였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염소젖 유제품은 대부분 ‘산양’으로 표기되어 있다. 수입된 염소치즈 등 일부 유제품에 염소라는 단어가 표기된 경우도 있지만 드문 편이다. 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오랫동안 산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이 명칭이 익숙한 데다 이미지나 어감상 염소보다는 산양이 마케팅 측면에서는 나은 것으로 여겨지는 듯하다”고 말했다.
면양젖으로 만든 로크포르 치즈. 세계 3대 블루치즈 중 하나다.
염소젖이나 염소치즈 등 유제품을 맛본 사람들이라면 진한 맛과 특유의 향을 느낄 수 있다. 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일동후디스 생애주기영양연구센터 윤영화 부장은 “산양유에는 특유의 ‘산양취’가 있는데 MCT(중쇄지방산) 함량이 높기 때문”이라면서 “흡수가 빠르고 소화가 잘되는 MCT는 특유의 냄새가 나는 성분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대량 생산되는 염소젖 유제품은 대부분 뉴질랜드 등 해외에서 수입한 원료를 사용한다. 소규모로 유제품을 생산하며 나름의 브랜드가 있는 염소 농가들도 있지만 대기업에 원료를 공급할 수준의 대규모 농가는 없다. 현재 국내에서 사육되고 있는 유용종, 즉 젖을 생산하는 염소는 7000여마리로 추정된다. 홀스타인 젖소가 하루에 30㎏의 원유를 생산하는 것에 비해 염소는 2㎏ 정도에 불과하다. 대규모로 산업화할 수 있는 규모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프랑스에서 널리 사랑받는 셰브르 치즈 ⓒD.Darrault_CRT Centre Valde Loire 프랑스관광청 제공
■ 염소젖, 면양젖으로 만드는 치즈
서양에 비해 치즈 시장의 규모가 크지 않은 국내에서는 대체로 우유로 만든 치즈가 많이 소비되는 편이다. 염소젖, 양젖으로 만드는 치즈의 종류는 한정되어 있고 대중적으로도 낯선 편이다. 그런데 프랑스 같은 치즈 소비대국에서는 염소치즈의 인기가 특히 높다. 염소젖으로 만든 것은 통칭 셰브르(chevre) 치즈라고도 부르는데, 셰브르는 프랑스어로 염소를 뜻한다.
셰브르 치즈는 숙성되면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대형 치즈로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 크기가 작은 제품이 많다. 셰브르 치즈의 명산지로 프랑스 루아르 지역이 유명하다. ‘프랑스의 정원’이라고도 불리는 루아르 지역은 다양한 와인의 산지이기도 하다. 이곳의 대표적인 셰브르 치즈는 ‘크로탱 드 샤비뇰(Crottin de Chavignol)’이다. 이는 샤비뇰 마을의 크로탱 치즈라는 의미다. 새콤한 과일과 섞어 샐러드로 먹기도 하고 바게트 위에 얹어 구워먹는 경우가 많다. 끝이 절단된 피라미드 형태의 치즈 발랑세(Valencay), 피라미드 모양의 풀리니 생피에르(Pouligny Saint-Pierre), 길쭉한 원통 모양의 생트 모르 드 투렌(Sainte Maure de Touraine), 동글납작한 조약돌 모양의 셀 쉬르 세르(Selles-sur-Cher) 등도 유명한 셰브르 치즈다.
피라미드 위쪽이 잘린 모양의 염소치즈인 발랑셰 치즈. ⓒD.Darrault_CRT Centre Val de Loire 프랑스관광청 제공
염소젖과 면양의 젖은 상당히 다르다. 면양의 젖은 응고력이 강하고 농도가 진해 수분을 뺀 고형분의 비율이 높다. 이 때문에 음료로 마시기에는 적합하지
면양젖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치즈는 페코리노(pecorino)다. 이탈리아에서 사랑받는 이 치즈는 풍미가 강하고 짠맛이 특징이다. 원정길에 나서는 로마 병사의 식단에도 빠지지 않는 보급품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현지에서는 카르보나라를 만들 때 페코리노를 많이 사용한다.
프랑스의 푸른곰팡이 치즈인 로크포르(roquefort)도 면양젖으로 만든다. 이탈리아의 고르곤졸라, 영국의 블루 스틸톤과 함께 세계 3대 푸른곰팡이 치즈로 꼽힌다. 육류요리와도 잘 어울리고 달콤한 잼이나 꿀과 함께 먹어도 맛있다. 돈키호테의 치즈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스페인 만체고(manchego) 치즈도 면양젖으로 만들었다. 톡 쏘면서도 고소한 맛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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