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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과 탐식

푸드립 19 일상의 끼니

by 신사임당 2018. 9. 3.





시시각각 쏟아지는 뉴스를 때론 건조하게, 때론 격한 감정에 휘말려 보게 된다. 며칠전 언뜻 본 뉴스는 가슴을 콕콕 찔러대면서 계속 생각나고 시큰거리는 내용이다. 빈 식당에 들어가 계속 뭔가를 훔쳐 먹고 나오다 경찰에 잡힌 도둑 이야기. 고깃집에 가서는 불판을 꺼내 고기를 구워먹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냉장고에 있는 요구르트를 먹고 나오는 식이었다. 먹고 나서는 설거지까지 말끔하게 마치고 나왔다고 한다. 훔치는 것 보다는 먹는 것에 집중하는 도둑인 셈인데, 잡고 보니 스물세살의 청년이다. 할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란 이 청년은 갈 곳도, 가진 것도 없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힘들게 살다가 주린 배를 해결하기 위해 끼니 때마다 빈 식당에 들어가 해결하고 나온 것이었다. 소소한 ‘범죄’가 모여 전과 10범이 넘을 만큼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살아온 삶이다.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이니 잘못은 잘못이지만 안타깝고 짠한 마음이 내내 감돈다. 길지 않은 기사에서 그 청년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알 수는 없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끼니의 지엄함, 그 무거움이 마음을 짓누른다. 밥이 하늘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먹는다는 것’, 그 말의 지엄함이 마음을 쿵 하고 두드리는 것이다. 이 기사와 함께 생각난 인물이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다. 솔제니친의 짧은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소담출판사·류필하 옮김)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이 책에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묘사가 없다. 생각만 해도 밥맛 떨어지는 거친 수용소의 음식들이다.




먼저 그 전에 이 소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의 하루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밤늦게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하루가 묘사된다. 이렇다할 사건도 없고 드라마틱한 구성도 아닌데 은근히 재미있다. 책 제목에 나와 있듯 그의 하루는 이렇게 묘사된다. 책 뒷부분에 나온다.




“슈호프는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을 청했다. 오늘 하루 동안은 그에게 꽤나 순조로운 날이었다. 재수가 썩 좋은 하루였다. 영창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사회주의단지로 추방되지도 않았다. 점심 때는 죽그릇 수를 속여 두 그릇이나 얻어먹었다. /중략/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차례를 기다려 주고 많은 벌이를 했다. 담배도 사왔다. 병에 걸린 줄만 알았던 몸도 가뿐하게 풀렸다. 이렇게 하루가,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가 마감되었다.”




그는 스탈린 치하 범죄자들을 모아 강제노역을 시키는 수용소에 있는 죄수다.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이틀만에 탈출해 돌아왔지만 조국으로부터는 스파이로 회유됐다는 의심을 받아 강제수용소에 갇혔고 10년째, 형기가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복역중이다.




“이런 날들이 그의 형기가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만 10년을, 그러니까 3653일이나 계속되었다. 사흘이 더 많은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그건 중요하지 않다. 들어와 있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하지만 상당수는 납득하기 힘든 그런 이유로 이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체검사를 받고 작업장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와 점호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하루가 꼼꼼히 기록돼 있는데 그는 10년째 이 하루하루를 투쟁하듯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의 투쟁이 집중하고 있는 목표이자 삶의 동력은 바로 ‘밥’, 즉 매끼 식사다. 나오는 사람들은 다들 먹는 것에 집착하는데 그것이 지질하거나 비참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진수성찬과는, 심지어 소박한 밥상과도 거리가 먼 음식들인데 희한하게도 식욕을 북돋운다.




“그는 먹기 시작했다. 우선 한쪽 국그릇의 국물만을 단숨에 들이켠다.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지나 전신에 퍼지자 오장육부가 국물을 반기며 요동을 친다. 살 것 같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중략/ 두 개의 국그릇에서 뜨끈한 국물만을 마시고, 그는 두번째 국그릇의 건더기를 첫번째 그릇으로 옮겼다. 옮겨 붓고 나서 그릇을 손으로 털고 다시 수저로 긁어낸다. 이제야 웬만큼 마음이 놓인 셈이다. 두번째 그릇이 마음에 걸려서, 시종 곁눈으로 흘끔흘끔 바라볼 필요도 없고 한 손으로 국그릇을 감싸안을 필요도 없다. 한눈을 팔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므로, 옆에 앉은 사내의 국그릇을 넘겨다본다. 왼쪽 친구의 것은 거의 국물뿐이다. 살모사 같은 녀석들, 누구나 죄수이기는 마찬가진데 저렇게까지 차별을 하다니! 슈호프는 국물 찌꺼기와 함게 이번에는 양배추를 먹기 시작한다. 감자는 두 그릇 중, 체자리의 국그릇에만 한 개 들어 있을 뿐이었다. 잘지도 굵지도 않은데다 물론 얼어서 상한 것이다. 흐물흐물한 게 어쩐지 달짝지근하다. 생선은 거의 없고 가끔 살이 빠진 가시가 눈에 띌 정도였다. 그러나 생선가시와 지느러미는 씹고 또 씹어서 속속들이 국물을 빨아먹지 않으면 안된다. 가시 속의 국물은 가장 영양분이 많다.”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여 사는 수용소에서 슈호프는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밀고하지도 않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엄격하게 자신을 지켜가지만 그의 내면은 갈등하고 번민한다. ‘내가 남들보다 빨리 죽 그릇을 비우면 작업 반장이 여분의 죽 그릇을 나에게 주지 않을까’, ‘내가 소포를 받을 동료를 대신해 자리를 맡아 줬으니 저 동료가 받은 소포 중에서 나에게 뭐라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조바심이 그의 마음속을 끊임없이 들락거린다.




“슈호프는 그 독수리같은 눈초리와 그의 상상력을 뒷받침해 주는 후각만으로, 이미 체자리가 무엇을 받았는가를 짐작하고 있었다. 소시지, 연유, 훈제된 생선, 소금에 절인 베이컨, 향기로운 건빵, 조금 냄새가 이상한 비스킷, 굳은 설탕 덩어리가 2킬로그램 가량, 그밖에도 크림이며 궐련, 쌈지담배 등 아니,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중략/ 슈호프는 체자리가 벌여 놓은 음식에서 더 이상 바라지 않기로 깨끗이 단념하고 말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처럼 바보짓은 없다.”




배고픔이라는 원초적 욕구 앞에서는 누구나 똑같다. 물론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성격과 성정에 따라 차이가 있을거다. 슈호프처럼 품위를 지키려 애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게걸쟁이’라는 별명이 붙은 페츄코프처럼 늘상 껄떡거리고 궁상떠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마음 속은 다 똑같다. 먹고 싶고, 내게 뭔가를 더 줬으면 좋겠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슈호프는 미리 봐 둔 건더기가 많은 두 개의 그릇이 자기가 앉을 자리의 구석 쪽에 오도록, 방향까지 봐 가면서 쟁반을 내려놓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주지도 않고 품위를 지키는 슈호프도 여분의 빵을 침대 매트리스 속에 감춰둔다. 가만히 있어도 자기 몫을 제대로 배분받을 수 없고 눈깜짝하는 사이에 빼앗기는 수용소에서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챙기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침대 매트리스 속을 파서 빵을 감추고 바늘로 기워서 구멍을 막아둔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돌아와서도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은 빵이 잘 있는지다. 이를 확인한 뒤 안도하는 슈호프를 보며 나 역시 안도감이 든다. 이 얼마나 소중하고 숭고한 감정인가.




“슈호프는 저녁 식사를 끝냈다. 그러나 빵은 먹지 않았다. 국을 곱빼기로 먹어치우고, 게다가 빵까지 먹는다는 건 복에 겨운 일이다. 빵은 내일 몫으로 돌리자. 인간의 배는 은혜를 모른다. 어제의 은혜 같은 건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내일이면 또 다시 시끄럽게 졸라댈 것이다.”




예전에 이 책을 읽으며 괜히 찔렸던 것이, 사람들이 다들 싫어하고 욕하는 게걸쟁이 페츄코프의 모습 때문이었다. 슈호프에게 페츄코프는 ‘염치 없이 남의 입을 지켜보고 있을 만큼 치사한 인간’이다. 문제는 나랑 ‘닮았다’는 것. 내 것을 감춰두고 동생 것을 껄떡대며 빼앗아 먹었던 어린 시절이나, 냉장고 반찬통 뒤에 몰래 감춰둔 요구르트를 딸래미가 먹었다고 성질 부리는 지금이나 내 본 모습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식당에서 옆 테이블 사람이 먹는게 더 맛있어 보여 넋놓고 쳐다본 적도 있다. 단체 메뉴를 먹을 때도 누군가가 N분의 1로 정해진 갯수보다 더 먹는지를 심하게 집착하며, 안 먹겠다고 하는 사람의 것은 눈독을 들였다가 빛의 속도로 챙겨 먹는다. 어쩌다 예상치 못한 먹을 거리를 얻게 되는 그 순간의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설렘과 기쁨이란.... 책에는 그런 내 심정을 그대로 묘사한 부분도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 한 그릇 더 드시오. 그리고 또 한 그릇은 체자리한테 갖다주시오’. 슈호프는 현장 사무실에 있는 체자리에게 죽을 갖다줘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파블로의 손끝이 한꺼번에 두 개의 그릇에 닿는 순간, 심장의 고동이 딱 멎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두 그릇씩이나 주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심장은 곧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늘상 굶주림에 시달리는 슈호프는 과거, 고향에서 배불리 먹었을 때의 일을 생각한다. 고향에서 말에게나 주던 귀리였지만 수용소에서 귀리죽은 고급음식으로 대하는 자신을 보며 상념에 빠진다. 그리고 나름의 식사법에 대한 철학을 설파하는데 그 대목도 무척 인상적이다.




“음식을 먹을 때는 그 진미를 느끼며 먹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 조그만 빵조각을 먹듯이 먹어야 한다. 조금씩 입안에 넣고 혀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양쪽 볼에서 침이 흘러나오게 한다. 그렇게 하면 이 설익은 검은 빵이나마 얼마나 달콤한지 모른다. 수용소 생활 8년, 아니 이제는 9년째로 접어들지만 그동안 슈호프가 먹어 봤던 게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전 같으면 입에 대지도 못할 것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에 이제는 질렸다는 건가? 천만에!”




슈호프는 말한다. 수용소 죄수들은 취침시간을 제외하면 아침 식사시간 10분과 점심식사시간 5분, 그리고 저녁식사시간 5분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그리고 이 시간을 기다리며 전심전력을 다해 땀을 흘리고 노동을 한다. 역설적이지만 자유를 억압당한채 강제 노동을 하는 슈호프는 그 노동 자체에서, 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는 그 자체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정말 하루해가 쥐꼬리보다도 짧구먼. 방금 작업을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끝내야 할 시간이 됐으니!”라며 하루의 작업을 아쉬워하는 슈호프는 자신이 쌓아올린 벽돌 장벽을 점검하며 휘어진 곳은 없는지, 자재를 낭비하지는 않았는지 살피고 또 살핀다. 누구에게는 대충 시간만 때우는 요령의 경연장일 수도 있지만 슈호프는 자신의 손으로 쌓아 올린 벽돌장벽을 바라보며 보람과 자긍심을 갖는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존중이고 감사다. 그리고 그렇게 땀흘린 댓가로 그가 원하는 것은 따뜻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끼니다. 땀흘려 일하는 노동을, 그리고 에너지와 쉼을 주는 삼시 세끼의 지엄함과 고귀함을 어떻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