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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이 힐링

한국 치즈의 대부 지정환 신부

by 신사임당 2018. 8. 28.



예전부터 뵙고 싶었던 지정환 신부님을 드디어 인터뷰했다.  2박3일간 임실, 전주, 완주.... 이렇게 세곳을 신부님과 함께 다녔다. 신부님 집에서 사시는 모습도 보았고 뭘 드시는지, 여가시간엔 뭘 하고 지내시는지도 봤다. 신부님 사시는 집 바로 앞에는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이 있다. 그 양로원에서 매일 아침 7시, 그리고 일요일 10시에 미사에 참여하신다. 내가 방문했을 때 신부님은 21일 화요일 미사를 집전하시면서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부자 청년의 질문에 네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셨다. 


위는 미사를 집전하는 지정환 신부님 아래는 집 앞에서 휠체어를 타고 바람을 쏘이는 지 신부님




다음은 인터뷰 전문    링크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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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임실이 치즈의 대명사가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하긴, 시간이 대수인가. 그저 임실이 치즈의 고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올해 87세인 노 신부 디디에 세스테벤스.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1959년 한국 땅을 밟은 그는 60년간 ‘지정환’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민둥산에 풀밖에 자라지 않던 척박한 땅.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막막한 심정으로 시작했던 치즈 만들기는 임실 치즈, 그리고 국내 치즈산업의 오늘을 일궈냈다. 



우철훈 선임기자 촬영



2016년 이 같은 공으로 한국 국적을 ‘선물’받은 그를 인터뷰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병들고 쇠약해진 몸에 뇌경색이 들이닥치면서 몸을 가누기도, 말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지난해부터 조금씩 건강을 회복한 노 신부는 지난봄에야 인터뷰를 허락했다. “적어도 2박3일간은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조건이었다. 오래 앉아 인터뷰하기 힘든 건강상의 이유가 컸다. 


지난 8월 19일 지정환 신부가 살고 있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을 찾았다. 마흔에 발병한 다발성신경경화증 때문에 주로 휠체어에 앉아 지내는 신부는 “멀리서 손님이 왔다”며 지팡이를 양손에 짚은 채 문 밖에 나와 있었다. 신부의 안내로 들어선 작은 거실에는 주이라크 교황청 대사를 지냈던 작은 외할아버지 사진부터 몇 년 전 지 신부가 직접 컴퓨터로 작업을 마무리한 1800년대 프랑스 선교사 자필문서 자료집까지 차곡차곡 정돈돼 있었다. 노 신부는 서랍 한편에서 빛 바랜 빨간 노트를 꺼내 왔다. 50여년 전 치즈 만들기에 도전할 때 적어둔 메모들이다. “그때 벨기에에 계신 부모님에게 치즈공장을 지어야 하니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렇게 치즈를 싫어하더니 제정신이냐’고 되물었지요.” 



-치즈를 싫어하다니요. 


“한국 사람들이 김치 먹는 것처럼 유럽 사람들도 치즈를 먹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치즈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 아들이 한국 사람들과 치즈를 만들겠다고 하니 의아하셨던 거지요.”


-1964년에 시작한 건데, 한국에선 치즈에 대한 개념도 없던 시절이네요.


“부안에 있다 임실 성당으로 옮겼을 때였어요.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죠. 특히 임실은 농사도 짓기 힘든 산골이라 굶주림이 더 심했어요. 다른 신부님에게 선물로 받았던 산양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 젖을 짜서 팔면 농가가 소득을 올려 자립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팔 곳이 많지 않다보니 남은 산양유가 버려졌어요. 그걸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다 치즈를 떠올렸지요. 유럽에는 집에서도 치즈를 만들어 파는 곳이 많으니까 큰 시설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하겠다 싶었어요.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두부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어요.” 


-무작정 도전한 거네요. 


“벨기에에서도 관심 없던 치즈를 만들겠다고 덤빈 거죠. 산양유를 그저 굳히면 되는 줄 알고 처음엔 두부에 넣는 간수를 부었다니까요. 될 턱이 없죠. 약탕기도 사용해 보고. 나중엔 간장이며 누룩을 넣어 온갖 시도를 해봤는데도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마을청년들과 협동조합을 만들어 치즈 제조에 도전한 지 신부는 부모에게 2000달러를 받아 치즈를 만들고 숙성시킬 수 있는 작은 공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3년 넘게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숙성실을 만드느라 청년들과 굴을 파고 있던 중 동네 어른들에게서 “한창 농사일을 도와도 모자랄 판에 땅이나 파고 있다”며 무수한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청년들도 지쳐갔다.


-결국 유럽으로 직접 치즈 제조법을 배우러 가셨다고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치즈공장을 3개월 동안 다니며 무작정 묻고 또 물었어요.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었지만 핵심 기술을 얻기는 쉽지 않더군요. 아무리 사정하고 부탁해도 원칙상 안 된다는 답만 들었지요. 포기하다시피 했는데 기적같은 일이 생겼어요. 제 사정을 들은 한 이탈리아 기술자가 비법을 적은 노트를 저에게 내놓더군요. 먼나라에서 고생하는 신부님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면서요.” 


-기대감에 차서 귀국하셨겠네요. 


“와보니 한 명 빼고는 다들 산양을 팔아 치우고는 떠났더라고요. 그들 입장에선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겠죠. 제가 돌아올지도, 치즈 만들기에 성공할지도 불투명했을테니까요.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이탈리아에서 받은 기적같은 선물이 있었으니까요. 그 비법 덕분에 균일한 치즈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다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어요.”



1969년. 본격적인 임실치즈의 시작이었다. 이후 치즈 생산과 판매는 순풍을 탔다. 지 신부는 서울로 가 호텔과 남대문 외국인 전용상점으로 판매망을 넓혔다. 당시만 해도 치즈는 미군부대에서 나와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것이 전부였지만 임실에서 직접 농민들이 손으로 만든 신선한 치즈라는 점이 매력으로 작용했다. 조선호텔의 입맛 까다로운 주방장도 임실치즈와 계약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문을 연 명동 피자가게도 임실에서 만든 모차렐라 치즈를 주문했다.


임실치즈가 성장가도를 달리는 동안 지 신부에겐 다발성신경경화증이라는 불치의 병이 찾아왔다. 지 신부는 그동안 일궜던 치즈산업의 기반을 모두 협동조합에 넘기고 1981년 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떠났다. 3년 뒤 휠체어를 탄 채로 귀국한 지 신부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재활에 헌신하기로 하고 재활공동체 ‘무지개가족’을 만들었다. “내가 장애인이 됐으니 그들의 고통과 재활에 동참할 수 있게 됐어요.” 전주 인후동의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된 무지개가족은 전주교구의 지원으로 완주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재활하고 자립한 중증장애인이 100명을 넘는다. 2002년엔 치즈산업을 일구고 장애인 복지에 힘쓴 공로로 호암상을 받았다. 상금 1억원을 기반으로 재원을 마련해 2007년 설립한 무지개장학재단은 사각지대의 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장학재단에서 일하며 지 신부를 보좌하는 오선씨(56)는 무지개가족을 통해 제2의 삶을 개척했다. 체조선수 출신인 그는 가슴 아래로는 감각이 없는 중증장애인이다. 전동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양쪽 엄지손가락만으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장학재단의 대소사를 꼼꼼히 챙긴다.



-무지개가족은 언제까지 돌본 건가요. 


“2004년 은퇴했지요. 후임 신부님이 잘 돌보고 계시니 저는 그저 마음으로 응원하는 거죠. 출가외인이란 말이 있잖아요(웃음). 2학기가 곧 시작될 예정이라 요즘 장학재단 업무가 바쁩니다.”


-상금외에 재원은 어떻게 마련한 건가요. 


“임실치즈가 잘 되면서 피자 브랜드까지 생겼어요. 그러다 나한테 와서 얼굴과 이름을 빌려달래요. 난 성직자일 뿐인데 무슨 사업이냐고 반대하다 피자가 잘 팔리면 임실치즈 소비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득에 나중에 마음을 바꿨어요. 체인이 우후죽순 생기고 장사가 잘 되다보니 이권을 놓고 싸움이 벌어졌어요. 내가 이름 사용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야단법석 통에 괴롭더라고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변호사와 당사자들을 불러놓고 내 이름을 사용할 거면 사용료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매달 130만원씩, 5년 전부터는 매달 250만원씩 받는 돈이 장학재단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지 신부가 살고 있는 소양면 집에는 무지개가족 시절부터 봉사자로 헌신했던 박남숙, 최미자씨가 이웃해 산다. 지 신부가 거주하는 집에는 ‘별아래’라는 이름이, 최미자씨가 사는 맞은편 집에는 ‘달아래’라는 문패가 걸려 있다. 지 신부는 “춘천 교구에서 번역을 요청해 온 옛날 문서를 보다가 발견한 이름”이라면서 “마음속에 간직했다가 집을 지으며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별아래, 그래서 옆집은 달아래예요. 얼마나 예뻐요. 이걸 한자로 표기하면 성하리잖아요. 말 맛이 전혀 없어요.”


-한자에도 조예가 깊으시네요. 


“1960년대에 연세대 어학당에 다니면서 한자도 공부했어요. 그때 독일에서 온 목사님들과 함께 한글을 배웠는데 아무래도 가족 없이 마을사람들과 살다보니 제 한국어 실력이 그분들보다 빨리 늘었어요.” 


지 신부는 벨기에 귀족 가문에서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톨릭 신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사회였고 해외에 나가 봉사하는 선교사들도 많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사제의 꿈을 품게 됐다. 그가 아홉 살이던 해 발발한 한국전쟁은 어린 그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미국과 소련, 중국이 한반도에서 치르는 전쟁이었잖아요. 제 아버지는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당시 주변에선 다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며칠 사이에 상점에선 성냥 한 갑도 사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어른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제겐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지요.” 


-처음에 한국에 온 게 1959년이었습니다. 


“전주에서 보좌신부로 있다가 1961년 부안 성당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농민들과 3년간 바다를 간척해 농지를 만들었어요. 염분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당장 먹고살 돈이 없는 농민들이 그 땅을 헐값에 넘겼어요. 그동안 흘렸던 피와 땀이 실패로 돌아간 거지요. 어찌나 실망이 컸던지 다시는 한국인들 사는 데 개입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까지 했다니까요. 그때 몸이 상해 쓸개 제거수술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쓸개 빠진 놈입니다(웃음).”


그렇게 결심하고 임실로 왔지만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농민들의 삶을 외면할 수 없었다. 부임 당시 문필병 군수가 지 신부의 손을 잡고 “임실 군민 전체에게 뭔가 하나쯤은 꼭 남겨달라”던 당부도 가슴에 걸렸다. 


-지정환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은 겁니까. 


“전주교구 부주교이던 김이환 신부님이 지어주셨어요. ‘지’는 제 이름 디디에에서, 그리고 신부님의 ‘환’자를 따서 적당히 만든 거죠. 나중에 보니 깊은 뜻이 있더라고요. 정의가 환하게 빛날 때까지 ‘지랄’한다. 한동안 그렇게 소개했는데 진짜로 지씨 성을 가진 분을 만나고 보니 괜히 미안해지더라고요. 올 초엔 창성창본을 신청해서 지금은 임실 지씨의 시조가 됐어요.”


-독재정권 시절 시위하느라 추방될 뻔하기도 하셨죠. 정의가 환하게 빛날 때까지 지랄한다는 건 당시 경찰들에게 하셨던 말씀이라고요. 


“인혁당 사건 때 서울까지 와서 시위를 했지요. 추방될 뻔했는데 제가 임실에서 치즈를 만들던 활동이 당시 정권이 보기엔 긍정적이었나봐요. 농촌을 발전시키는 활동이었으니까. 추방은 면한 대신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긴 했지요.” 


-광주 민주화운동 때 우유트럭을 몰고 광주로 가셨다던데요. 


“제가 갔을 땐 진압이 된 뒤였어요. 몸과 마음을 다친 그분들에게 달리 해드릴 게 없으니 우유라도 드리고 오고 싶었지요. 병원에 들어갔는데 외부인을 경계하며 공포와 원망에 가득 차 있던 그분들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눈물을 흘렸어요.”



3년 전 찾아온 뇌경색 때문에 한국사람보다 더 유창하던 지 신부의 한국어는 좀 어눌해졌다. 그래도 구수한 사투리는 여전하다. 걷는 것은 불편하지만 운전은 직접 한다. “내가 이래 봬도 70년 무사고여”라며 능숙하게 운전대를 돌리던 지 신부는 깜빡이를 켜지 않고 옆차선에서 불쑥 들어오는 차를 향해 “저런 썩을 눔” 하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요즘 지 신부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임실 고추씨에서 추출한 캡사이신을 섞어 만든 매운맛 치즈다. 몇 달간의 실험 끝에 시제품 개발에 성공한 지 신부는 21일에도 임실치즈연구소를 찾아 본격 출시계획을 상의했다. 이상천 소장은 “오는 10월 초 열리는 임실치즈축제 기간에 시중에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치즈연구소가 있는 임실치즈테마파크는 연간 20만명이 넘게 찾는 관광지다. 이날도 지 신부를 보고는 함께 사진 찍을 것을 요청하는 어린이와 청년들을 꽤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 임실초등학교에서는 지 신부의 일대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몇 차례 공연했던 터라 이 지역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지 신부는 유명인사다. 


-지난 60년 중 언제가 가장 기억나세요. 


“종종 그런 질문을 받는데 내 답은 항상 같아요. 지금 이 순간. 나에겐 지금이 가장 좋은 시간이고, 내겐 오늘밖에 없어요.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도 물어요.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입니다.” 


-평생 베풀며 사셨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누구를 위해서 한 건 없어요. 누군가를 위한다는 건 그들을 무시하는 거예요. 전 단지 그들과 함께 한 것 뿐입니다. 노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그들에게 가라,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들을 배우고 사랑하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 그것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라. 사제든 목사든, 특히 지도자라면 누구나 이를 새겨야 합니다. 공수신퇴(功遂身退).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없어요. 공을 이루었다면 이내 물러나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바람 같은 건 없으신가요. 



“음…, 하나 있긴 해요. 내 장례식에 노사연의 ‘만남’을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우리들의 모든 만남은 하나라도 우연이 없거든요. 그렇게 귀하게 만났으니 서로 사랑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