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반공, 기득권 등의 단어로 무언가를 지칭하며 설명할 때 많은 사람들은 개신교를 떠올린다. 개독이라는 조롱섞인 용어도 같은 맥락이다. 주변의 많은 개신교인들 중에는 맹목적인 상태에 있는 이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왜 개신교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안타깝고 답답해하는 이들도 많다. 얼마전 4.·3과 관련해 포스팅하면서 개신교계가 이 비극적인 역사를 두고 사죄해야 한다고 썼던 적이 있는데 한 지인은 한국 개신교에 그런 역사가 있는줄은 몰랐다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개신교의 현재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배경과 역사적 연원이 어떠한지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두권 있다. 우선적으로 볼 것은 윤정란씨가 쓴 <한국전쟁과 기독교>다. 이 책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봐야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개신교가 어떻게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고 기득권이 되어왔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며 정리해주는 책이다. 마치 교과서를 보는 듯 시대별로 정리가 잘, 그것도 반복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술술 읽을 수 있다.
다음은 책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보수 반공주의를 대표하는 핵심 집단은 한국 기독교, 즉 개신교회다. 그리고 그 역사적 계보의 중심에는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있다.
왜 서북지역인가.
서북은 평안도 지역을 일컫는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변방으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돼 있던 지역이다. 그래서 신분제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고 신흥 상공인층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출현했다. 신흥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도 빨리 흡수했다. 이들은 기독교와 문명개화사상을 선점해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위해 정치·사회적 활동에도 열심히 나선다. 19세기 말 한반도의 주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제와 경쟁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저자는 자신들의 권리를 위협받자 일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쓰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면 이 지역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교육에 힘쓰는 한편 시민운동을 주도했다.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 청년운동, 농민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민회 활동, 3·1운동, 임시정부수립 등에도 활발히 나서는 등 이들은 일제치하에서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해방 후다. 해방공간에서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월남을 감행해야 했다. 북한지역의 소군정과 김일성 연합정권은 사유재산권을 부정하고 토지를 개혁했는데 이는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던 이들을 뒤흔들었다. 당시 대거 월남한 이들이 이 지역 개신교도들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월남한 개신교 세력의 중심은 영락교회를 설립한 한경직 목사가 있다. 미국 유학을 했던 그는 미국내 학맥 인맥이 바탕이 돼 있던데다 미국 선교사들의 영어 통역을 전담하면서 미국과의 주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동시에 그가 설립한 영락교회는 월남한 서북출신들의 정착기반이 됐다. 악명높았던 서북청년단 역시 영락교회 청년회와 학생회가 핵심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북에서 공산당과 대치하다 월남했기 때문에 반공투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영락교회 50년사>에는 반세기동안의 청년회 활동이 한국교회 반공운동의 보루였음을 자랑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발생한 한국전쟁은 그들에게 신의 축복이자 기회였다. 이들은 전쟁을 통해 남한의 정치, 사회, 종교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는데 그 배경에는 구호물자와 선교자금이 있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원과 협력관계에 있던 기독교세계봉사회(CWS)의 구호물자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이를 모집하기 위해 공산주의의 패륜에 대한 전세계적인 홍보선전전이 펼쳐졌고 이 과정에서 세계 각지의 기독교인들을 반공전선으로 결집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이렇게 모인 물자와 자금을 통해 한국 기독교와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미국 선교사들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했던 서북출신 기독교인들은 이 물자와 자금을 독점할 수 있었고 남한 사회에서 정치, 사회적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전쟁고아 사업을 기반으로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세력이 되었다. 월드비전, 홀트입양프로그램, 기독교아동복리회 등은 이때 생겼다. 이 사업을 성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도 서북출신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을 대표하는 한경직 목사는 월드비전, 홀트입양프로그램, 기독교아동복리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박정희 군사정변 이후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의 지지를 얻어내는데도 한경직 목사의 역할이 컸다. 그는 친분을 맺었던 미국 정관계, 종교계 인사들을 통해 박정희 지지를 호소했고 미국인들이 박정희 정권을 지지할 수 있도록 전쟁고아로 구성된 선명회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을 여러차례 기획해 성공을 거뒀다. 그 결과 서북출신 기독교계와 박정희 정권은 더욱 밀착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서북청년회는 이승만 정권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한국전쟁 후에 이승만 정권은 서북출신들을 견제했다. 하지만 이들은 박정희 군사정변으로 부활했다.
박정희 군사정변에는 서북청년회 출신이 많이 참여했다. 서북청년회는 좌익소탕 활동의 일환으로 육사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5기와 8기로 입학했는데 이들이 군사정변의 주역이었다. 특히 8기는 중앙정보부의 창립멤버가 된다.
서북출신 기독교인과 박정희가 사상적으로 강하게 결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승공주의가 있었다. 광복 이후 월남한 서북출신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전투적 반공주의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다른 대부분의 기독교인에게 전파돼 있었다. 그런데 1950년대 중후반 이후 한국 기독교인들은 반공에 대해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다. 국내외 변화와 현실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 소련은 제3세계로 팽창하고 있었고 북한은 전후 재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반면 국내 현실은 암담했다. 민심은 정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고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관계도 소원해지고 있었다. 여기서 위기를 느낀 기독교계는 전투적 반공주의를 비판하며 반공을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반공이란 민주주의적 국가 수립을 위한 정치 발전과 사회적 빈곤에서 탈피하는 경제발전을 통해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1950년대 중후반 이후 반공을 다시 정의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민주주의 국가 수립을 주장했던 4·19를 지지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후 민주주의 질서를 붕괴시킨 5·16을 다시 지지했다. 이런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4·19이후 한국 사회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북한이 경제부흥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다 남한의 경제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공산주의 체제를 많은 사람들이 선택할 것이라는 공포를 느꼈다.
이 때 한국 기독교인들이 주장했던 승공 담론은 5·16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재구성됐고 군사정권에 의해 국시로 승격됐다. 즉 승공론의 핵심은 북한 체제보다 경제 발전이 더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정권과 기독교계가 경제발전에 한마음으로 총력을 기울였던데는 이같은 배경이 있다.
즉 월남한 서북출신 기독교인들은 한국 기독교의 핵심이 되어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정책으로 전개된 경제개발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세계 교회와 미국 주류교회의 지원과 연대를 얻어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 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박정희 시대 경제발전을 주도하고 선점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강준만, 김환표 공저의 <희생양과 죄의식>이라는 책 역시 한국 기독교 반공주의 뿌리를 볼 수 있다. 책은 전체적으로 반공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앞부분에 개신교와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나온다. 뒷부분은 군사독재정권 치하의 반공이 주된 내용이다. 앞서 소개한 책과 마찬가지로 그 뿌리는 서북지역에서 내려온 개신교인들에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 반공은 서북출신 기독교인에 의해 주도됐기 때문에 자연히 유사종교의 형태를 띠었다.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를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붉은 용으로 간주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이었다. 반공투쟁은 천사와 악마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책 24쪽 =
반공투쟁에 나선 기독교인들은 성전에 참여한 군대 곧 십자군이 되며 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순교자가 된다. 또 초기 월남자들의 대부분이 계급적 혹은 종교적 이유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치열하게 대결한 체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반공투쟁은 절박한 현실성을 갖는 것으로 전파되었다. 한국전쟁은 이같은 인식이 모든 기독교인들에 의해 공유되는 계기가 되었다. 악마와 천사간의 전쟁으로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립을 인식하는 태도는 그 논리구조 상 전후 냉전시대의 양진영관과 강한 친화력을 갖는다. 따라서 기독교의 반공주의는 기독교 전체가 냉전체제 안으로 자연스럽게 흡인되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매개체이기도 했다.
한반도에서의 반공 투쟁이 유달리 잔인했던 건 그것이 상당부분 악마와 천사 간의 전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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