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책 읽는 평범한 사람들을 만났다. 대단한 독서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생활 속에서 습관과 규칙을 만들어 책 읽으려 노력하는 이웃들이다. 이들의 비법이 꽤 쏠쏠했다.
오죽하면 ‘책혐시대’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 반박하기 힘든 정언명령이다. 읽지 않는다고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니지만 이처럼 평생을 두고 부채의식이 따라다니는 ‘명령’도 찾기 힘들다. 그래서 책에 관한 책들이 쏟아지고, 책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 심지어 TV 예능 프로그램까지 나오고 있다.
책 읽기는 쉬운 일상이다. 허나 다수의 사람들은 그 ‘일상’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데 공감한다. 누구는 3년에 1000권을 읽었다는 식의 풍문이나 권위있는 누군가가 선정했다는 필독서 목록을 접할 때면, 혹은 자기계발서 대신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지적질’에 노출될 때면 책 읽기는 일종의 강박이 되고 만다. 하지만 책 읽기가 별건가. 그저 읽을 줄 안다면 읽고 맛보고 즐기면 그뿐이다. 생각이 정리되는 것은 덤이다. 책 읽는 사람이 드물다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책을 향한 구애를 멈추지 않는다. 책을 향해 조금 더 다가가려는 평범한 이웃들을 만나봤다. 참, 올해는 정부가 지정한 ‘책의 해’다.
■내가 찾은 나만의 비법
6년차 직장인인 최유리씨(30)는 월평균 2~3권의 책을 읽는다. 일반적인 회사원이 그렇듯 입사 후 몇 년간은 바쁜 업무에 치여 책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답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SNS)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SNS를 통해 좋은 글귀나 콘텐츠를 공유하고 읽는 데서 만족감을 느꼈지만 문득 회의가 찾아왔다. “회사생활에 허덕이다 보면 바보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잖아요. 게다가 머릿속에 쌓이는 건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정보들뿐이고. 내 주장을 하거나 생각을 표현할 때 그 근거를 확인하고 싶었는데 페이스북에서 봤었다는 기억밖에 없었거든요. 책을 통해 내 근거를 다지고 구조적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자신의 생활패턴에 적합한 독서법으로 택한 것은 전자책이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다운받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리디북스, 구글플레이, 알라딘, 밀리의서재 등은 그가 자주 이용하는 앱이다. 얼마 전에는 하루 한 편의 시를 읽을 수 있는 창비의 ‘시요일’ 앱 서비스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있는 다양한 유혹을 뿌리치고 독서 관련 앱을 실행시키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그가 시도한 과감한 결단은 데이터 제공량을 월 400메가로 최소화하는 휴대폰 요금제로 바꾼 것이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전자책을 다운받은 뒤 이동할 때나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는다. “SNS를 하거나 자잘한 쇼핑을 하려면 데이터가 있어야죠. 하는 수 없이 다운받아 놓은 책을 볼 수밖에 없어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오디오북을 켠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거나 함께 생각을 나누고 싶은 책을 만날 때면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즉석 스터디 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시간이 되는 친구, 지인들과 함께 카페에 모여 각자 책을 보거나 공부·업무 등을 하는 ‘팝업 스터디’도 그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는 습관이다.
엔지니어링 관련 공기업에서 일하는 3년차 직장인 김종현씨(30)는 학창시절에도 독서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 일본 여행에서 만난 친구를 통해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다. 출판일을 하던 친구가 게시해 놓은 동네 서점의 아기자기한 모습이나 각종 출판물 사진으로 그는 독립서점, 독립출판의 존재를 알게 됐다. “회사 선배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취미나 여가생활이 화제가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대부분 피곤하고 바쁜데 그런 게 어딨냐는 반응이 대다수예요. 가정을 꾸리다보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저렇게 일만 하다 죽겠구나’ 하는 암울함, 두려움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마침 접하게 된 독립서점은 그의 ‘위기감’을 파고들었다. 라디오와 팟캐스트, 유튜브의 책 관련 프로그램과 채널을 구독하는 한편,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독립서점을 찾아다녔다. 공익적인 목적으로 운영되는 한 독립서점에서는 격주 주말마다 자원봉사도 하고 있다. “주제의식과 나름의 콘셉트를 갖고 있는 작은 책방들이 많거든요. 그곳에서 추천받은 책을 읽고 난 뒤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또 다른 책을 발견하는 일이 점점 흥미로워지더라고요.”
한 달에 책값으로 지출하는 금액은 평균 5만~6만원. 찾아가고 싶은 독립서점 리스트를 정리해놓은 그는 누군가를 만날 때 약속장소를 해당 서점 근처로 잡는다. 정해진 시간보다 한두 시간 먼저 나가 서점에 들러 책을 읽는다. 서점을 방문하기 마땅찮은 경우에도 일찍 나가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한다. 그는 “주말에 집에 있다보면 하는 일 없이 늘어지게 마련”이라며 “책을 들고 집 근처 카페에 가는 것도 꾸준한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함께 모여 읽는다
경기 가평 설악면 토박이인 김명숙씨(47)는 매주 수요일 또래의 동네 주부들과 함께 모여 책을 읽는다. 각자 묵독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소리내어 낭독한다. 이름하여 수요낭독회. 요즘 읽는 책은 마르케스가 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다. 제법 ‘야한’ 묘사가 많다보니 진지하게 읽다가도 능청스러운 농담과 폭소가 터지기 일쑤다. 모임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봄. 미술사를 다룬 <시대를 훔친 미술>로 시작한 이 낭독회에서는 클래식과 페미니즘 관련 책에 이어 벌써 4권째를 읽고 있다. “혼자였으면 엄두도 못냈을, 아니 있는 줄도 몰랐던 책들이지요. 게다가 남들 앞에서 내 목소리로 소리를 내어 읽다보니 오래전에 사라진 것 같았던 설렘과 긴장이 살아나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일주일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됐어요.”
김씨와 함께 모여 책을 읽는 동네 주부들은 7~8명이다. 김씨는 “살림과 일상에 매몰되다 보면 책 읽는 것은 딴세상 이야기 같고 실행으로 옮기기 어렵다”면서 “부담없이 시작한 이 작은 모임 덕분에 독서에 큰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자연과 식물에 관심이 많은 그가 요즘 따로 읽고 있는 책은 과학자의 나무 사랑 이야기를 그린 <랩걸>이다. “내 생각을 내 말로 표현하기 위해 독서가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얼마 전엔 남편의 직장 상사에게 책을 추천하기도 했다니까요.”
김씨가 낭독모임을 갖는 곳은 가평 터미널 옆의 작은 책방 ‘북유럽’(book you love)이다. 김영우·이재영 작가 부부가 2년 전 이곳에 정착하며 낸 서점이다. 누구에게나 열린 문화 사랑방으로 공간을 꾸미고 싶었던 이재영 작가는 김씨를 비롯한 동네 주부들과 함께 낭독 모임을 시작했다. 이 작가는 “독후감을 쓰거나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감동을 얻는다”면서 “지난해에는 <시대를 훔친 미술>의 저자인 이진숙 작가가 직접 이곳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책 읽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다같이 느낀 놀라운 변화”라는 김씨는 “나중에 나이 들면 마을회관에 모여서도 계속하자고 약속했다”며 웃었다.
작가 이재영씨와 낭독 모임에 참여하는 김명숙씨(오른쪽0
■뒤늦게 발견한 책의 재미
대학생 강웅희씨(24)가 보여준 스마트폰 메모장에는 380권이 넘는 책 제목과 간단한 감상문이 쓰여 있었다. 2016년 1월부터 그가 읽기 시작한 책 목록이다. 불과 2년 반 전까지만 해도 독서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친구들과 운동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SNS에 중독돼 있다시피 했던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2015년 겨울 속초의 한 리조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때 사장님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책을 안 읽어서 큰일이라는 이야기를 잔소리처럼 했는데 괜히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제 미래에 대해 이런 저런 고민이며 현실에 대한 회의가 많았던 때였거든요.”
책을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에 추천받았던 것이 <15명의 리더들의 성공이야기>였다. 성공한 사람들의 비법이 독서였다는 책의 메시지에 끌렸던 그는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독서를 결심했다. 무엇을 읽어야 할지도 막연했던 그에게 길잡이가 됐던 것은 전자책 앱에서 추천하는 인기책 목록. <1등의 독서법> 따위의 독서 관련 서적을 비롯해 <마시멜로 이야기> <연금술사> 등이 초창기 읽었던 책이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그렇게 재미있는 책인 줄 몰랐어요. 내용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장면을 상상해보는데 소름이 끼칠 만큼 생생할 뿐 아니라 뒤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책, 특히 고전은 따분하다는 고정관념이 바뀌는 계기가 됐어요.”
읽은 책은 한 줄이라도 간단하게 스마트폰에 메모를 했다. 한두 권에서 시작해 10권 넘게 메모가 쌓여가다보니 성취감도 느껴졌고 욕심이 더 생겼다. 시험공부와 조별과제가 끊임없이 밀려드는 학교생활을 하며 책 읽을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 지난해 7월엔 작심하고 휴학을 했다. 1년 독서 목표는 365권. 내공이 쌓이다보니 이젠 책을 고르는 안목도 생겼다. 마크 트웨인의 작품은 지금도 틈날 때마다 반복해 읽을 정도로 좋아한다.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SNS를 딱 끊게 됐어요. 남들 사생활 보는 시간에 내 시간을 더 갖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친구들이 저더러 미쳤다며 이젠 술자리에도 안 불러요.(웃음)”
■책이 있는 일상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탄탄한 대기업 직원. 6년째 그 명함을 갖고 있던 박초롱씨(32)는 서른이 되기 직전 퇴사했다. 안정되고 평범한 미래가 보였지만 그렇게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워낙 책을 좋아했던 터라 책을 읽으며 더 많은 사람들과 책을 나누는 삶이 ‘고팠다’. 독립출판사를 차린 그는 소위 ‘딴짓’하는 사람들을 위한 매거진 <딴짓>을 3개월에 한 번씩 내고 있다. 출판사와 서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이런 저런 글도 쓴다. 얼마 전까지는 서울 동교동에서 북스테이 ‘낮섬’도 운영했다. 북스테이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한 게스트하우스다. ‘힙하다’(새롭고 개성 강하다는 뜻의 인터넷 신조어)고 소문나면서 손님들이 꽤 몰렸지만 얼마 전 4개월에 걸친 긴 여행을 다녀오느라 문을 닫아야 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모험을 이어온 그는 오는 6월 8일 성산동에 술과 책을 함께 즐기는 북바(book bar) ‘낮섬’을 연다.
“책에 등장하는 술이 많잖아요. 낯선 이름의 술을 묘사해놓은 문장을 읽을 때마다 어떤 맛일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언젠가 책을 보며 동시에 그 술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는데 마침 적당한 곳을 발견하게 돼 충동적으로 저질렀어요. 술을 즐기듯 책도 함께 즐길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일반적인 바처럼 취하도록 술을 마시거나 시끄러운 대화를 나누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술을 음미할 줄 아는 ‘혼술족’이라면 대환영이다. 책을 읽으며 술을 맛보고, 기분 내키면 옆사람과 함께 책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껏 들어본 적도, 참고할 만한 곳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호기심과 기대감만 갖고 출발하기로 했다.
현재 생각하고 있는 메뉴는 키안티(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없는 남자들>), 루체 델라 비테(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드라이 마티니(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위스키티(박경리의 <토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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