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 하원 연설에서 조국전쟁과 대조국전쟁을 언급했다. 연설문의 표현처럼 이 두 전쟁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국전쟁, 대 조국전쟁은 러시아 사람들이 붙인 이름인데 세계사에서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이름은 각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그리고 독소전쟁이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를 침공했고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함으로 나폴레옹의 몰락이 본격화됐다. 대조국전쟁은 2차대전 시기이던 1941년 히틀러의 독일이 당시의 소련을 침략했다.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즉 당시의 레닌그라드로 진격한 독일군은 도시 레닌그라드를 봉쇄하고 거의 900일 가까이를 대치했다. 결국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지만 3년 가까이 포위되어 모든 물자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굶어죽는 비극을 낳았다. 당시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던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가죽장화와 톱밥까지 끓여서 먹고 망가진 가구에서 아교를 긁어내 수프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인류의 생존 이래 어느 도시에서나 득시글거리기 마련이었던 쥐조차 이곳에서 멸종하다시피 했으니 그 참상이 어떠했는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영화 전쟁과 평화
하지만 이런 참혹한 환경속에서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쇼스타코비치를 들으며 버텼고 전쟁중인데도 러시아 사람들은 문화예술을 지키고 이어왔다. 당시에도 도시관이 운영되었고 책이며 음악가들의 악보, 화가들의 화집이 꾸준히 출판됐다고 한다. 소비에트 시절을 제외하고는 국제 주류 무대에서 변방취급을 받아왔지만 이들은 찬란한 문화 유산을 쌓았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경제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폄하하는 분위기가 국내에도 팽배했는데 사실 그들의 저력과 잠재력을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류사에서 전쟁만큼 극적인 사건도 없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역사적인 걸작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했거나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조국전쟁과 대조국전쟁 역시 많은 예술작품들을 낳았다.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은 그 이름 자체가 조국전쟁을 의미한다. 1812년에 일어난 전쟁을 기리는, 러시아인의 자긍심을 표현하는 곡이다. 제정 러시아의 국가와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그리고 러시아의 민요가 얽히는 이곡은 애통하고 불안한 듯하게 시작되지만 곡이 진행되면서 장엄하고 화려하게 마무리된다. 심지어 후반부에는 대포소리까지 꽝꽝 나온다.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을 받았으나 이를 잘 무찔러낸 러시아 민중들의 입장을 그림 그리듯 표현한 곡이다. 클래식 하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지 모르지만 이 곡은 너무나 유명해 누구나 들어봤을 가능성이 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제곡으로 쓰인 것도 이 곡이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승리를 쟁취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보니 미국 독립기념일에도 이 곡이 자주 연주된다. 아무튼 축제 분위기를 내고 즐기는데는 적격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 너무나 유명한 마지막 장면. 여기서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 울려퍼진다
문득 궁금한 점은 아마 프랑스에선 이 곡이 연주 금지곡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유럽 각국들이 오랜 기간동안 수도 없이 전쟁을 치르고 서로 이기고 지고를 반복했지만 이 전쟁은 고작 200년 전, 근래의 일인데다 프랑스의 역대급 대패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곡인만큼 프랑스 악단이 연주하거나 프랑스에서 연주되는 경우가 있는지는 궁금하다. 아직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톨스토이의 대작 소설 <전쟁과 평화>도 조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압도되는 듯한 느낌을 주기로는 아마 이 작품을 넘어설만한 게 있을까 싶을 정도의 소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읽은 사람은 웬만해선 찾기 쉽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는 전쟁은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 중 가장 큰 죄악이라고 했는데 전쟁이 없었다면 이 작품이 나왔을까 싶은, 무한 루프같은 갈등이...ㅠㅠ 아무튼 엄청난 분량에 질릴 수도 있지만 정말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주옥같은 ‘띵언’(명언)도 넘쳐난다. 성경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구절도 꽤 많았던 것 같고. 내 개인적으로는 <부활>보다는 <전쟁과 평화>가 더 잘 읽혔다. <부활>은 왠지 지루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는.
쇼스타코비치 /위키백과
톨스토이의 이 소설을 프로코피예프는 오페라로 만들었다. 오페라 전막이 4시간을 넘는데 십수년전에 국내에서 초연됐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있으나 아마 그 뒤로 다시 공연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이 오페라는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어 딱히 할 말은 없다. 음악 좀 들어봤다 하는 사람 중에서 이런 오페라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도 꽤 되지 않을까 싶다. 나도 한때 심하게 ‘덕질’ 했던 러시아 소프라노 가수 안나 네트렙코 아니었으면 이 오페라의 존재를 몰랐을거다. 이 작품은 그가 글로벌 스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조국전쟁을 대표하는 작품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제목도 레닌그라드다. 포연이 자욱한 레닌그라드에서 당시 이곡은 연주됐다. 곳곳에 스피커를 설치해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얼마전 미국 작가 M.T. 앤더슨이 쓴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이 교향곡이 어떻게 쓰여졌는지와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지난해 나온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도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잘 그려냈다. 거대한 권력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그의 삶을 두고 일었던 논란과 오해에 대해서도 납득이 된다.
러시아 작품은 아니지만 재치와 위트로 가득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도 대조국전쟁, 즉 독소전쟁이 묘사된다. 물론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다. 동물들이 벌인 ‘풍차 전쟁’이 2차대전 당시 독소전쟁의 상황을 비틀어 비유한 것인데 독소전쟁을 잘 모르던 상태에선 별 생각없이 읽었지만 그것을 알고나면 기막힌 표현들이 짜릿짜릿한 재미를 준다.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도 많다. <에너미 엣 더 게이트> <스탈린그라드> 등등. 좀 뜬금없는지 모르겠으나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영화 <해바라기>도 남편을 이 전장으로 보낸 여인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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