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4.3 진상규명 과정, 그리고  사람들

왜 이렇게 오래도록 묻혀 있었을까. 그것은 파란만장한 우리 현대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군사독재 권위주의 정권 기간 동안 이 사건은 지하에 꽁꽁 묻혔다. 그들의 치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면서 4.3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모든 것이 중단됐다. 진상규명을 하려든 이들이 구속돼 옥고를 치렀고 유족들 역시 고초를 겪었다. 게다가 경찰은 모슬포 지역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들이 세웠던 ‘백조일손 위령비’를 부숴 땅에 묻어 버렸다. 20년 가까이 군사정권이 집권하며 이에 대한 논의가 금기됐다. 1978년 소설가 현기영이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지만 그 역시 이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4.3을 쓰지 않고는 문학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4.3은 내 숙명이었다"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다. 1989년에는 제주에 4.3 연구소가 발족됐고 이듬해 제민일보가 창간기획으로 ‘4.3은 말한다’를 연재하면서(1993년 한국기자상 수상) 체계적인 기록으로 남기게 됐다. 당시 제민일보 취재팀장이던 양조훈 기자는 현재 4.3평화재단 이사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민일보 보도를 보면 연재 종료 직후인 1999년 9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씨가 제민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지난 3월16일 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과의 만남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줬다.

"1992년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특집기사로 20세기 100년간 세계에서 일어난 100대 사건을 꼽아서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 꼽혔던 것이 전세계 수많은 사건 중 한국의 제주 4.3사건이었다. 제주를 방문한 요미우리 편집위원에게 왜 이사건을 선택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2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번째는 이 작은 공간에서 수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는 점, 두번째는 이 중대한 사건이 한국 안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 그래서 이 사건에 주목하게 됐다고 말했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4.3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새정치국민회의는 당내에 제주도 4.3사태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공청회도 개최했다. 도민들 역시 특별법 제정운동에 합심해 뛰어들었고 결국 2000년 4.3특별법이 공포됐다.

2003년에는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으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4.3사건에 대해 유족과 희생자, 도민에게 사과했다.

제주도민에게 사과하는 고 노무현 대통령

 

제주 4.3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특별법이 제정되는데는 민주당 추미애 의원의 역할이 상당했다. 양조훈 이사장은 제주 4.3특별법 통과의 최대 공로자로 추의원을 꼽는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추의원은 4.3과 어떤 인연이 있을까.

2011년 10월 제민일보에서 연재한 양조훈 이사장의 기록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추 의원은 DJ가 대선에서 승리한 뒤 당의 4.3특위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4.3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당시의 기록을 찾기 위해 정부기록 보존소를 뒤졌고 그곳에서 수형인의 명부와 재판기록을 발굴하게 된다. 이후 추의원은 1650명에 대한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1321명의 일반재판 기록을 발굴해 공개했다.
이 자료는 당시의 군법회의가 모두 불법적인 재판이었다는 것, 그리고 총살해놓고도 유족들에게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그 대상자들이 대부분 행방불명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유족들은 자기 가족이 어디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도 모른 채 한을 삭히며 살아왔던 것이다. 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 3895기는 이들을 기리는 것이다. 사흘만에 345명을 사형선고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고 국내외 언론에도 당시 보도되지 않았다.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4.3특별법 개정안은 이때 이뤄졌던 군사재판의 불법성을 밝히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다음은 기사 링크

 "4.3이 뭔지 몰랐다"

수형인 명부 발굴


1999년 9월16일 동아일보 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