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 앞에 세워진 작품... 표정을 보는 순간 그저 먹먹해졌다. /정지윤 기자 촬영
얼마전 제주에 다녀왔다. 4.3을 앞두고 이에 대해 기억하고 기록해보고 싶어서였다.
올해가 4.3 70주년이라서 생각해 본 기획이었는데 내내 반성을 많이 했다. 과연 내가 4.3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었던건지, 왜 지금까지도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건지 하나하나가 마음을 찔렀다. 마치 내게 4.3은 그저 막연한 현대사의 사건, 임진왜란 정도의 거리감을 가졌던 것 같다. 아니, 임진왜란이라면 그래도 기승전결을 대략 알기라도 하지, 4.3에 대해선 어떤 이해의 시도조차 안했던 것 같다.
제주에 출장갔는데 여전히 관광객은 많았다. 길거리 곳곳엔 ‘4.3 70주년 추념식’을 알리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우연히 관광객으로 보이는 두 중년여성의 대화를 듣게 됐는데 그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는 이랬다. 4.3이 뭐야?/ 예전에 제주 사람들 많이 죽었다는 그런거 같은데. /언제? 일제시대에? /아니, 해방되고 나서지 아마./ 5.18 같은 건가? /몰라, 빨갱이 어쩌구 했던 것도 같고.
나도 그랬었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 역시 크게 다른 수준은 아닐 듯 하다. 그래서 한번 정리해 봤다.
4.3은 무엇인가?????
정부는 공식적으로 ‘제주 4·3’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해방 후 남한을 지배한 미군정은 효율적 통치를 위해 일제 강점기 때 관리들을 그대로 등용했다. 제주도 마찬가지였다. 불신과 실망이 커지는 중에 흉년과 질병까지 겹치면서 도민들의 삶은 피폐해갔다. 1947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열렸던 3·1 기념 대회에 제주시에만 3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의 표출이었던 셈이다. 비극의 씨앗은 이 때 뿌려졌다. 당시 기마경찰이 말발굽으로 어린 아이를 치고서도 그냥 가는 모습에 분개한 시위대가 기마대에게 항의하자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관덕정 광장 앞에서 울린 총성으로 6명의 무고한 도민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경찰은 잘못을 인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대신 시위대 검거에 나섰다. 도민들은 이에 항의하며 총파업으로 맞섰다. 3월10일 시작된 제주 총파업은 민·관 할 것없이 당시 직장인의 95%가 참여했다.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미군정은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 즉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강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여기에 앞장선 것이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컸던 ‘서북청년회’(서청)다. 경찰로 들어온 이들은 이듬해인 1948년 4·3 이전까지 제주 전역에서 2500여명을 검거하며 폭압과 약탈을 일삼았다.
법위에 군림하는 서청 등 공권력의 폭력, 그리고 남쪽만 단독으로 치러질 ‘5·10선거’를 앞두고 도민들의 반감과 불안감은 커져갔다. 이같은 상황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300여명이 제주 전역에서 지서(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무장 봉기에 나섰고 도민들도 심정적으로 이를 지지했다. 봉기세력과 도민들은 공통적으로 도민 탄압을 중단할 것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외쳤다. 김구, 김규식 등 민족지도자들도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했다.
5·10선거 결과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 내 2개의 선거구에서만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산됐다. 미군정은 이를 불순 세력의 음모이자 미군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그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강경 토벌 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면서 본격적인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초토화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대 학살극이었다. ‘4·3사건’ 전체 희생자 3만여명 중 상당수는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집중된 ‘초토화 작전’ 기간 동안 목숨을 잃었다.
당시 제주 경비 사령부는 해안에서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면 무조건 사살한다고 공표했다. 이어 계엄령이 내려진 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간인의 연계를 막는다며 중산간지역 마을 대부분을 불태웠고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이주시켰다. 하지만 쉽게 삶터를 떠나지 못하고 남은 주민들은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해안마을로 내려왔어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같은 운명을 맞아야 했다.
한동안 잦아들었던 피바람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거세졌다. 일명 ‘예비검속’. 입산자의 가족이나 요시찰자로 분류된 이들은 대대적으로 체포돼 처형당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형량도, 죄목도 모른 채 형식적인 재판만을 거쳤을 뿐이다. 육지의 형무소로 보내져 즉결처분된 희생자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돌아오지 못했고, 4·3평화공원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총 3895기의 행방불명인 표석이 세워져 있다.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인근 섯알오름은 250여명의 예비검속자들이 총살당한 곳으로, 군에 의해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유족들은 7년 뒤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섯알오름 인근의 백조일손지지는 이중 132구의 시신을 안장한 묘역이다.
4·3이 끝난 뒤에도 통곡의 시간은 지속됐다. 3만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은 ‘빨갱이’라는 누명을 썼기 때문에 그 유족들 역시 연좌제에 의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4·3연구소 김은희 이사는 “레드 컴플렉스가 섬을 뒤덮은 상태에서 유족들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 당시 군 입대를 자원했다”면서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해병대 3~4기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고 설명했다.
4.19 혁명,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항쟁 등 이름이 있지만 4.3은 아직 이름이 없다. 정부 보고서에는 그저 ‘4.3 사건’으로 언급돼 있는데 4.3은 그저 ‘4.3’으로 불리고 있다.
4·3평화기념관에 들어서면 관람객을 처음 맞이하는 것은 누워있는 큼직한 비석이다. 비문이 없는 비석, ‘백비’다. 이는 ‘4·3’의 이름이 아직도 정해지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이를 통칭하는 이름은 그저 ‘4·3’이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분단에 반대하고 온전한 독립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항쟁이나 항거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의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를 보는 시각은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반란이었다. 그나마 2003년 발표된 정부의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4·3사건’으로 언급돼 있다. 4·3평화기념관은 백비의 의미에 대해 ‘4·3은 아직도 정명(正名)되지 못한 역사’라며 ‘4·3의 진정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날, 비로소 비문이 새겨질 것이며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질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수십년간 숨죽여 있던 4·3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가 본격화된 것은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다. 도민들의 꾸준한 용기와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됐고 2003년에는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됐다. 그해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도민들에게 국가권력의 과오를 인정하고 공식사과했다. 처음으로 이뤄진 국가원수의 공식사과는 도민들을 짓눌렀던 이념의 멍에를 벗겨내는 계기가 됐다. 2014년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됐다.
하지만 4·3의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가해자를 규명하고 유족의 한을 해소하는 것 역시 현재 진행중인 문제다. 제주4·3유족회 양윤경 회장은 “미군정기에 발생한 사건인만큼 미국의 책임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데도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다”면서 “올해 70주년을 맞아 미국의 책임 규명을 요구하는 10만인 서명을 받아 한미 양국 정부와 UN 과거사 보고관에게 전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상처뿐인 4·3을 지난 보수정권 기간 동안 이념의 잣대로 난도질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4·3평화공원을 찾아 희생자의 위패 화형식을 갖거나 폭도공원이라는 망언을 일삼은 사례도 많았다. 양 회장은 “희생자를 재심의하자거나 4·3을 모욕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한다”면서 “후세에게 4·3을 제대로 알리고 교육해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알리는 것이 4·3해결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회에는 ‘4·3특별법’ 개정안이 제출돼 있다. 핵심내용은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 그리고 불법적인 군사재판을 받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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