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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통신

4.3의 처참한 기억들

by 신사임당 2018. 3. 25.

 

 

4.3이라는 비극을 이념으로 난도질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도 실상은 3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 대다수가 군경토벌대에 의해 희생됐다는 사실엔 변화가 없다.
 

무장해서 산으로 올라간 ‘무장대’의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원인 때문에 ‘정당한 진압’이라는 주장이 지난 권위주의 정권동안 힘을 얻어 왔는데 실상 가해 현황을 보면 군경 토벌대에 의한 희생이 전체의 84.3%였다. 희생자의 현황을 보면 여성이 20.9%, 10세 이하 어린이가 5.4%, 61세 이상 노인이 6.3%다. 5.4%라는 비율을 숫자로 보면 772명에 이른다. 특정한 공간, 특정한 시간 동안 어린이 772명을 죽였다는 것은 어떤 변명과 설명으로도 납득이 안된다. 10살도 안된 아이들이 불순한 뒷배경이었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당시 제주 도민은 30만명 정도였으니 10분의 1이 희생을 당한 것이다. 전체 170개 마을 중에서 희생자가 없는 마을이 없다.

제주에서 만난 희생자와 유족들의 증언, 악몽같은 기억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듣기도 읽기도 힘겨웠지만 그럴수록 정신차리고 꼼꼼히 읽어야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풍광 곳곳은 관광자원이기도 하지만 4.3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주요 유적지들을 찾아 둘러보는 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중산간지역을 싹쓸이하기로 했던 군경은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때문에 터전을 잃고 토벌대에 쫓긴 사람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굴 속에 몸을 숨겼다. 제주 지역의 굴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언뜻 보면 땅 속에 난 구덩이처럼 보이기 때문에 외지인이라면 좀체 찾기 쉽지 않다. 조천읍 선흘리 도틀굴, 목시물굴,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굴,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궤는 제주말로 작은 동굴을 의미한다) 등은 당시 주민들의 은신처였다. 하지만 현지인을 앞세운 군경은 사람들이 피신한 동굴을 찾아내고 그 자리에서 총살하거나 입구에 불을 피워 죽였다. 1991년 발견된 세화리 다랑쉬굴 내부에는 당시 질식사 한 11구의 유골이 그대로 남아 있어 큰 충격을 줬다. 제주 4·3평화기념관에 마련된 ‘다랑쉬 특별전시관’에는 유골 발견 당시의 동굴의 유골 모습과 내부에 놓여 있던 안경이며 비녀, 고무신, 놋숟가락 따위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120여명이 숨어 살 정도로 규모가 컸던 동광리 큰넓궤는 영화 <지슬>의 무대가 됐던 곳이다. 현재 이 동굴들은 안전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입구에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안내판이 세워져 비극의 현장임을 알리고 있다.

 

선흘리 도틀굴

4·3 희생자 분포지도를 보면 유독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이 있다. 남쪽에선 가시리와 의귀리, 북쪽은 노형리와 북촌리다. 이중에서도 북촌리는 이틀동안 300명이 넘는 주민이 집단학살 당했다. 1949년 1월 북촌 너븐숭이 인근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으로 숨진 데 따른 보복이었다.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은 이 곳의 비극을 배경으로 4.3을 알린 것이다. 북촌마을에 가면 순이삼촌 문학비가 있다. 관처럼 생긴 비석들이 이리저리 눕혀져 있는데 당시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널브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비석 위에는 소설 ‘순이 삼촌’의 구절들이 새겨져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교문밖에 맞바로 잇닿은 일주도로에 내몰린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불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군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는 할머니들, 총부리에 등을 찔려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아낙네들, 군인들은 총구로 찌르고 개머리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사람들은 휘둘러대는 총개머리판이 무서워 엉금엉금 기어갔다. 가면 죽는 줄 번연히 알면서 어떻게 제 발로 서서 걸어가겠는가. 뒤쳐지는 사람들에게는...’

 

 

북촌마을 노인회장인 고완순씨는 올해 여든이다. 당시 11살 소녀였던 그는 죽음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북촌초등학교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몇명씩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갔는데 어김없이 총소리가 들렸지요.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결국 우리 차례가 왔어요. 옴팡밭에 끌려가 엄마와 언니 손을 꽉 잡은 채 앞만 보고 있었어요. 이미 우리 앞엔 죽어서 널부러진 시신들이 즐비해요. 늦은 오후였는데 구름 속에 들어갔던 해가 잠깐씩 나올 때마다 피가 엉겨붙어 시커멓게 된 흙바닥이 반짝거리던게 지금도 생각나요. 뒤에선 총알을 장전하는지 계속 철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지프차가 나타나더니 ‘사격중지’ 하더라고요.”
 

목숨은 부지했지만 집도, 마을도, 이웃도 사라진 뒤였다. 엄마 등에 업혀 울던 세살배기 남동생은 군인이 내려친 몽둥이에 머리를 맞은 뒤 3년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 외할머니와 이모, 외삼촌도 죽음을 당했다. 그는 “학교로 끌려 나오던 길에 손을 묶인 채 군인 트럭에 타고 있던 이모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면서 “가슴과 국부가 모두 도려내진 이모의 시신을 엄마가 수습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북촌 학살에서 살아남은 고완순 북촌리 노인회장

 

남원읍 의귀리에 있는 현의합장묘도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한 80여명의 넋을 기린 곳이다. 1949년 1월 초 이곳에 주둔했던 부대는 무장대의 습격을 이유로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뒤엉켜진 모습 그대로 인근 구덩이에 묻혔던 시신은 2003년에야 유해발굴작업이 이뤄지며 현재의 위치에 안장됐다. 전 유족회장이자 현재 4·3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양봉천씨(72)는 “처참하게 뒤엉켜 있는 유해를 수습할 때 다들 ‘멜젓 담그듯 시신을 던져 넣었다’며 가슴을 쳤다”고 말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양봉천 해설사

 

 

현의합장묘와 의귀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송령이골’은 무장대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일제가 남긴 구식총이나 죽창을 들었던 무장대가 신식무기를 갖춘 정예군대에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당시 전투에서 무장대는 50명 이상이 사망하며 전멸하다시피 했다. 4·3의 많은 흔적들 중 거의 유일한 무장대의 무덤, 즉 ‘불순한’ 곳으로 터부시되고 방치되어 있던 이곳은 2004년 도법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찾아 천도제를 지낸 뒤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4.3평화공원에 있는 기념관에 가면 전후의 사정이 자세히 설명돼 있다. 덤덤하게 기술해 놓은 역사적 사실들인데도 워낙 끔찍해 읽는 것도, 사진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곳곳에 설치돼 있는 아트워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고길천 작가의 '죽음의 섬'이다. 오랜 일제강점기를 통해 배운 잔악한 학살과 관련한 여러 사례가 4.3당시 군경에 의해 그대로 재현됐다고 판단한 작가는 당시의 여러 죽음의 유형들을 자료, 증언을 통해 조사하고 제작했다. 학살의 유형들을 특정 이미지로 나누어 표현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릿할 정도다.

 

그리고 전시관의 사진.  '몸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