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쌓이고 삭혀낸 한(恨) 때문이었을까. 발을 디딜 때마다 붉은 흙먼지가 바짓단을 타고 피어 올랐다. 아득하게 너른 벌판엔 햇살을 피할 나무 한 그루도 없다. 대신 흉물스럽게 앉은 콘크리트 덩어리 사이로 무성하게 푸른 잎을 낸 밭들이 뒤엉켜 있는 곳. 서글픈 스산함이 맵싸한 마늘향과 함께 스며든다.
제주 남서쪽 모슬포 근처 알뜨르비행장. 제주 말로 ‘아래뜰’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모슬포 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비행장이다. 콘크리트 덩어리는 격납고다. 80만평이나 되는 벌판엔 19개의 격납고와 활주로, 벙커, 땅굴 등이 남아 있다. 중국 대륙에 폭격을 하기 위한 일제 전투기의 급유지이자 ‘가미가제’ 즉, 일본군 자살특공대의 훈련이 이뤄졌던, 살육의 전초기지였다. 해방 뒤에도 미군의 군사기지를 거쳐 현재까지 국방부가 소유한 이곳은 제주 사람들도 잘 모른다. 그저 인근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척박한 땅을 조금씩 갈아 콩과 깨, 옥수수, 고구마를 키우던 이곳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공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일 제주에서 처음으로 ‘2017 제주 비엔날레’가 막을 올렸다. 주요 전시장은 제주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알뜨르비행장 등 세 군데다. 이중 알뜨르비행장은 가장 눈여겨 볼만한 곳이다. ‘투어리즘’을 주제로 하는 이번 비엔날레는 제주의 자연환경과 사람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관광’의 역사와 현실을 성찰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15개국에서 70개 팀의 작가들이 참여한다. 알뜨르 전시장은 ‘다크 투어리즘’(아픔과 상처의 현장을 찾아 역사적 교훈을 얻는 여행 방식)을 전면에 내세웠다. 인명 살상용 비행기가 들어섰던 격납고에는 일본군 전투기를 형상화 한 박경훈·강문석 작가의 작품이 설치됐으며 비행장 입구에선 최평곤 작가의 대나무 조형물 ‘파랑새’가 방문객들을 맞는 등 모두 13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김지연 예술감독은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지만 농사를 통해 곳곳에서 생명을 품어내며 치유의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달라”고 말했다. 제주도측은 비엔날레 행사가 끝난 뒤에도 향후 3년간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이곳을 활용할 계획이다. 비엔날레 기획 과정에 참여한 주진오 상명대 역사학과 교수는 “록 페스티벌이나 평화 캠프와 같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알뜨르비행장이 가진 역사성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현대미술관에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사라진 것들을 성찰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살펴보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김유선 작가는 유리알 조각과 자개 조각으로 이원화된 제주의 모습을 표현했으며 정연두 작가는 인종대학살의 비극을 겪었던 르완다를 여행하며 찍은 영상을 통해 아직 씻기지 않은 아픔을 떠올린다. 도립미술관에는 전지구적 이슈로서의 투어리즘을 다룬 작품들이 전시된다. 부정적 측면부터 긍정적 부분까지의 폭넓은 투어리즘의 스펙트럼을 살펴본다.
제주 비엔날레(www.jejubiennale.com)는 오는 12월3일까지 계속된다. 1688-8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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