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 마이 힐링

종교와 음식 6/ 두부

by 신사임당 2017. 4. 10.



두부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 가장 친근한 식재료 중 하나로 꼽히는 두부는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아마도 불교가 없었다면 현재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내에 두부가 전래된 것은 중국과 불교문화 교류가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 즈음인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부터 서민층의 음식은 아니었고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상류층의 음식으로 발달했다. 특히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시대에 두부는 사찰에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귀한 음식이었다. 이 때문에 사찰에서 주로 두부를 만들었다. 당시 사찰은 많은 토지를 소유했고 부가 집중되어 있었던 터라 음식문화를 선도했고 자연히 두부 제조법도 사찰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두부가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썼던 <시무 28조>로 알려져 있다. 성종이 미음과 술과 두붓국을 길 가는 사람에게 보시했다고 한다. 고려말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도 두부에 관한 시를 썼다. ‘대사구두부내향’이란 작품에서 그는 두부가 방금 썰어낸 비계같이 기름지고 맛있을 뿐 아니라 양생에 더없이 좋다고 했다. 권근 역시 <양촌집>에서 두부를 만드는 방법을 묘사했다.




조선시대에도 두부는 왕실과 양반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 시기 역시 두부는 주로 사찰에서 만들어졌으나 배경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억불정책이 펼쳐졌던 조선시대에 불교는 능침사찰(왕릉을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던 사찰)로 그 명맥이 유지됐다. 사찰 수가 크게 줄었고 승려에 대한 탄압도 심했다. 하지만 제사상에 올릴 두부는 여전히 필요했고, 이를 위해 두부를 만드는 사찰을 ‘조포사’로 지정해 두부와 제수음식을 만들어 바치도록 했다. 사찰음식 전문가인 대안 스님은 “조포사는 불교 역사로 봤을 때 굴욕적인 명칭”이라고 설명했다.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여러 임금님의 능원에는 각각 절이 붙어 있어 여기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게 하니 이 절을 조포사라고 하였다”고 썼다. 또 <경세유표>에는 “여러 능에 두부를 공급하는 절은 면세토록 함이 마땅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세조의 능인 광릉 인근의 봉선사는 두부제조로 유명한 조포사였다. ‘봉선사 두부’와 같은 이름이 생겨난 것도 이 같은 역사 때문이다.


두부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탐했던 음식으로도 꼽힌다. 닭을 삶은 국물에 꼬치에 꿴 두부를 끓인 ‘연포탕’을 즐기는 사대부들의 모임을 연포회라고 불렀다. 



<조선의 탐식가들>(김정호 지음·따비)이라는 책에서는 양반들이 맛있는 연포탕을 먹기 위해 사찰로 몰려갔으며 승려들에게 맛있는 연포탕을 내놓으라고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조선의 두부 맛은 명나라 황제도 극찬할 정도였다. 또 이 책에는 조선시대의 두부애호가들도 소개돼 있다. 서거정은 <사가집>을 통해 두부를 예찬하는 시를 남겼으며 미식가였던 추사 김정희가 위대한 음식의 하나로 꼽은 것도 두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