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알게 된 재미있는 단어가 있다. 랫퍼킹. ratfucking. 무슨 뜻일지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 단어에 내가 그랬듯 말초적 호기심이 반짝 생기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 단어를 접하게 된 것은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라는 책에서였다. 이 책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의 칼 번스타인, 밥 우드워드 두 기자가 쓴 취재기다.
랫퍼킹은 더럽고 추잡스러운 정치공작을 일컫는다. 이 책에는 닉슨 정권이 자행했던 랫퍼킹이 등장하는데 선거에 이기기 위해 저지르는 온갖 부정과 전술들이 그것이다. 도청, 미행, 신문에 가짜 정보 흘리기, 가짜 편지 보내기, 상대편에 스파이 심기, 흑색선전물 뿌리기, 선거 집회 고의적으로 취소하기, 선거운동원 사생활 조사하기, 상대 이간질하고 교란시키기, 정치시위에 선동꾼 잠입시키기, 문서탈취 등 책에 불법적인 일련의 행위들이 묘사돼 있다. 우리가 흔히 들어보았음직한 불법적인 공작들, 한마디로 더러운 속임수와 조작질들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그 정점일테고. 책에서는 재선을 위해 광범한 불법 행위를 저지른 닉슨식 공작정치를 비판하며 이 단어를 사용한다. 용어가 낯설 뿐 그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 정치 역사에서도 지금까지 숱하게 보아온 것이긴 하니까 말이다.
사전에 찾아보니 ratfuck 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무언가를 훔치거나 서류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어디서 정확하게 유래됐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닉슨 재선팀을 이끌면서 선거를 주도했던 도널드 세그레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구상하기도 한 닉슨 진영의 핵심인물이다. 닉슨의 김기춘 정도로 보면 될까.
예년의 선거에 비해 관심히 확실히 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거에 쏠리는 관심사 중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네거티브 이슈들이다. 예전에 읽은 책 중에서 미국 선거 역사에서 더럽고 저열한 사건들만 모아 놓은 <네거티브 그 치명적 유혹>이라는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선거전에서 벌어졌던 더러운 짓꺼리 탑 25위를 모아놓은 것이다. 이 중에 닉슨의 사례는 tricky Nick이라는 별명답게 여러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랫퍼킹이라고 명명된 다양한 사건들이 포함된다.
책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은 두 기자의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과정과 그 상황들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꽤 재미있는데 호흡이 빠르고, 장면을 묘사하듯 정리된 글이라 시각적인 구현이 저절로 되는 듯 하다. 이 책을 기반으로 만든 같은 제목의 영화를 봐도 된다. 더스틴 호프만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각기 기자들을 맡아 연기했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영화의 한 장면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보는 게 좋은 영화가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이르기 전 닉슨 시절과 국제정세를 이해할 수 있는 영화다. 올 초 개봉했던 < 더 포스트>다. 닉슨은 1968년 대통령에 당선됐고 1972년 재선에 성공했다. 영화 <더 포스트>의 배경은 1971년이다. 뉴욕 타임스가 국방부 비밀 보고서를 입수해 닉슨 뿐 아니라 이전 미국 대통령들이 베트남전에 관해 잘못했던 정책들을 폭로한다. <더 포스트>는 뉴욕타임스에 세게 물을 먹은 워싱턴 포스트 사주와 편집국장 입장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1972년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괴한이 침입하고 야간 경비원이 이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장면을 일종의 쿠키영상으로 보면 된다. 자연히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예전에 대충 봤던 <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을 제대로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침입한 괴한들이 체포되는 것부터 시작되니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다시 보게 됐다. 이 영화의 기반이 됐던 같은 제목의 책도 내친 김에 함께 봤다.
익히 알려져 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다. 워터게이트 빌딩에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대선을 앞두고 사무실을 설치했는데 닉슨 정부의 공화당 재선위원회 측이 이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적발됐던 사건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치졸하고 저열한 이 사건은 닉슨을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탄핵당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 권력형 비리에 **게이트가 붙는 작명 방식도 이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유래했다. 아마 이 빌딩 이름이 워터게이트가 아니고 워터센터, 워터플라자쯤 됐으면 이후 권력형 비리에 **센터, **플라자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사족을 붙인다. 기자들의 세계와 생리를 그린 영화 중에 이 두 작품은 최고봉인 것 같다. 정말 ‘일하는 기자들’만 나온다. 그렇다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명감에 불타는 영웅담을 그렸다는 것이 아니다. 기자정신, 이 말도 좀 버프가 있는 느낌이긴 한데, 아무튼 기자로서의 직업정신과 직업윤리, 기자로서의 자존심과 경쟁심을 가진, 그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이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그래서 무슨 드라마가 되겠나 싶지만, ,그래서 흥미진진하고 그래서 집중하게 되고 그래서 몰입도가 높다. 개인의 고뇌나 사생활, 또 연애와 로맨스 이런 거 전혀 없다. 일하는 것, 그 직업의 일만 갖고 치열하게 그려도 충분히 재미있고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된다. 특히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서 두 기자가 타자치는 소리가 정말 뇌리에 콕콕 박히는데 무척 인상적이다.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두 기자가 이 당시 28, 29세였다는 사실도 놀라울 뿐이고.
더 포스트의 한 장면
두 영화 모두 신문이 윤전기에서 찍혀나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부분은 영화의 클라이막스다. 온갖 난관을 뚫고 결국 신문이 인쇄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그러니까 영웅서사에서 악당이 패하고 정의가 세워지는 장면쯤이라고 보면 된다. 신문사 밥을 20년 넘게 먹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윤전기가 촤르륵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막 인쇄된 신문이 따끈하게 나오는 장면들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따끔따끔, 짜릿짜릿하다. 다들 종이 신문의 시대가 끝났다고 하지만 그래도 종이 신문의 미래는 가늘게나마 오래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섞인 예상을 해본다. (이런 이야기하면 여전히 정신 못차렸다고들 한다만..ㅠㅠ)
얼마전 이 두 영화와 책을 보다가 문득 들었던 궁금증은 닉슨의 심리 상태였다. 1968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중국과의 수교(일명 핑퐁외교)와 냉전완화 등 꽤 많은 업적을 이루었고, 재선을 앞두고 지지율도 상당히 앞섰다는데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래서 역대 최악의 대통령 중 한명이 됐는지 궁금하다. 닉슨은 정치인으로 비할데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1960년 대선에서 유력한 후보였는데 혜성처럼 등장한 케네디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이어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졌다. 정치적으로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되었을 때인데 이 당시 누가 그가 8년 뒤 대통령이 될 것이라 예상했을까.
워터게이트 빌딩/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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