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사안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고 파악하는 본질에는 큰 차이가 있다. 뉴스를 접하고 다루는 입장에서 항상 이 점을 간과하지 않으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휩쓸려 다닐 때가 부지기수다. 가까운 곳, 비교적 익숙한 분야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그럴진데 하물며 이역만리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더더욱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특정한 누군가가 바라보고 해석하는대로 따라가거나 쉽게 믿기 마련이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등 제 3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고 해석하는 일들이 대체로 그렇다. 나를 비롯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중동 뉴스나 아프리카 소식들을 영미권 언론이 전해주는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왔다. 앞으로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그럴 가능성이 높다.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과거에 벌어졌던 많은 일들을 바라보는 관성적 시각에 균열을 내고 생각을 돌이켜보게 하는 책을 최근 두 권 읽었다. 하나는 <푸 틴-권력의 논리>, 또 하나는 <번역전쟁>이다. 전자는 푸틴에 대해 집중했고 후자는 푸틴을 포함해 다양한 국제적 이슈들을 다루고 있는데 큰 틀에서 맥락은 같다.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푸틴을 어떻게 생각할까. 21세기 차르, 스트롱맨, 독재자를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악의 축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얼마전 영국과의 외교분쟁으로까지 비화했던 스파이 암살 사건 배후에도 푸틴이 있다는 의혹이 나오면서 푸틴은 악의 화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대중들은 푸틴에 대한 뉴스를 언론을 통해 접한다. 국내 언론의 국제면인데 그 외신의 소스는 세계적으로 ‘주류’언론이라고 평가받는 영·미 언론이다. 그렇다면 영·미가 아닌 다른 나라의 다른 시각으로 나오는 뉴스라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랍권을 다루는 뉴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결과 갈등을 다루는 뉴스다. 지금은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보도들도 나오고 있지만 예전만 해도 팔레스타인은 절대악으로 그려졌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아무튼 이 책들을 한번쯤 읽어 본다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좀 더 적극적인 호기심과 의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푸틴, 권력의 논리>다. 이 책을 쓴 이는 독일 슈피겔 편집자 출신인 언론인 후베르트 자이펠이다. 그가 2010년부터 2015년까지 푸틴을 인터뷰하거나 해외 순방길에 동행하면서 푸틴의 속내와 일상을 듣고 본 기록이다. 서방 언론 기자이긴 하지만 이 책은 지금까지 보고 들어온 푸틴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그리고 있다.
푸틴이 악마화된 이미지로 굳어진 대표적인 사건을 꼽자면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합병이다. 이 사건으로 푸틴은 서구언론에 의해 일방적으로 두드려맞았는데 저자는 서구 국가들의 ‘교묘한 시도’를 지적한다.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유럽연합(나토)의 시도다. 러시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나토와 유럽연합의 국경을 크림 지역까지 밀어내려는 노력을 서방이 해왔다는 점은 제대로 알려지거나 부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구는 “나토의 동부 확대는 절대로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그걸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푸틴은 공식석상에서 서구의 이같은 시도에 대해 여러차례 언급하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에는 현재 1700만명의 러시아인이 살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가의 안전은 약속으로써 공고히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과거 나토가 확대를 거듭하기 전에도 우리는 그와 유사한 약속을 이미 여러 차례 들었다. 우리 국경 옆에 강력한 군사 블록이 만들어지는 것은 우리 입장으로서는 국가의 안전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밖에 볼 수 없다.”
현재 진행중인 시리아 문제에 대한 푸틴의 생각을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사드가 물러나면 시리아에 민주주의가 찾아오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게 될 것이라는 오바마의 확신에 대해 푸틴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고 여겼다. 아사드를 지지하는 이란의 시아파와 아사드의 몰락을 원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니파 사이의 싸움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게 푸틴의 판단이었다. 푸틴은 오히려 권력자와 야권이 힘을 합친 과도정부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푸틴의 시각에선, 아사드는 이란과의 연합 때문에 확실한 권력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지역의 또 다른 이슬람 근본주의화를 막기 위한 군사적 옵션이기도 했다.'
러시아 국내에서 푸틴의 인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상을 주름잡았던 소련 붕괴 이후 많은 러시아 사람이 아직도 자존감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안전에 대한 바람은 크고 영토적인 통합에 대해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이와 동시에 외부세계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고 있다. 이런 것들을 푸틴과 러시아 정치 엘리트들이 정책적으로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야권성향인 레바다 연구소가 발표한 연구결과를 보면 푸틴 취임 당시만 해도 러시아 국민의 3분의 1이 가난에 허덕였지만 이제 그 비율은 11%로 줄었고 기대수명은 65세에서 70세로 높아졌다. 강도와 살인사건도 줄었다. 러시아를 부패와 범죄의 온상으로 만든 올리가르히 ‘처단’이 강력한 통치기반이 됐다.
하지만 서구의 시각은 여전히 완강하다. 푸틴의 러시아가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으며 러시아 내부의 지지율은 독재국가에서 나타나는 왜곡된 합리화 수단일 뿐이라고.
<번역전쟁>은 30년간 번역가로 활동한 이희재씨가 쓴 책이다. 특별한 정보가 없던 상태에서 ‘번역’을 놓고 벌어지는 세계 문단의 이야기이거나 번역의 뉘앙스를 잘 살려 이미지메이킹에 신경쓰는 글로벌 기업의 이야기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번역은 현실의 주류세계가 사용하는 용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단어가 의미하는 본질과 이면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그것을 지칭하는 주류언론의 용어 사이의 괴리를 고발하는 것이다. 저자는 현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라는 의미에서 ‘번역전쟁’을 썼다고 했다.
솔직히 이 책은 충격적인, 그리고 논란이 될 수도 있을 주장도 꽤 있으나 풍부한 자료와 다양한 정보를 속도감있고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깊숙한, 숨겨진 이면들을 들이대는 저자 앞에서 어렴풋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상식 혹은 지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상당수가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 들었다.
몇몇 대목들을 보자.
‘소수 기득권자는 privatization이 다수 서민을 고달프게 만드는 사유화임에도 민영화라고 고집했고, 뒤에서는 테러집단을 양성하면서 앞에서는 테러집단과 싸운다고 우겼다. war on terror는 테러 절멸전이 아니라 테러 양산전이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아프리카 르완다와 콩고에서 벌어진 genocide 곧 집단학살의 주범은 이 지역의 풍부한 광물자원을 노린 서방 국가들과 결탁한 투치족 무장단이었음에도 서방 언론에서는 후투족을 가해자로 그렸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했고 가해자는 피해자로 변했다.’
‘서민주의를 포퓰리즘으로 매도하고 사유화를 민영화로 미화하는 세력은 oligarch다. 영한사전에서는 과두로 풀이하지만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금력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번역자는 문장 속에서 겉도는 과두보다는 현실에 밀착된 금벌이라는 나름의 조어를 쓰련다.... 중략... 러시아가 국가재산을 가로채 벼락부자가 된 금벌의 천국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금벌에게 먹힌 나라의 중심을 다시 세운 지도자가 푸틴이다. 러시아 금벌과 손잡고 러시아 국부를 헐값에 사들여 재미를 본 주역이 바로 영국과 미국이다. 러시아 국민이 선거 때마다 푸틴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까닭은 푸틴의 독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사익에 짓밟힌 러시아의 국익을 되살린 지도자를 알아봐서 그렇다...중략... 세상을 주무르는 진짜 금벌은 영국과 미국에 있는데 러시아에만 있는 것처럼 포장된다.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것만 번역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영어든 한국어든 말로 담아내는 것 자체가 번역이다. oligarch를 아예 한발 더 나아가 ’올리가르히‘라고 러시아 발음으로 적는 한국인이 얼마나 이 세상을 돈으로 주무르는 사람들의 세상 번역에 맹종하는지를 보여준다.’
습관적으로 쓰는 ‘극우’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저자는 잘못된 사용이라고 지적한다. ‘극우’가 국내에선 의미와 달리 사용된다는 것이다. 극우의 두 가지 조건은 자민족에 대한 애정과 타민족에 대한 혐오다. 자민족을 혐오하고 타민족을 숭상하는 세력을 극우라 부르는 것은 극우라는 말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흔히 ‘극우’ 사이트라고 칭하는 일베는 극우가 아니다. 이승만 정권 역시 극우가 아니다. 일본은 타국과 싸웠던 세력의 후손이 나라에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극우가 존재하지만 한국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대를 이어 타국을 섬겼던 세력의 후손이 나라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극우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과 번역의 주도권은 돈, 즉 금벌이 쥐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과 미국의 금벌이다. 이들이 제 3세계에서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적 이득을 독점하기 위해 그럴듯한 포장으로 만행을 저질러 왔고 서구의 언론은 이를 외면했다. 이에 대한 날선 비판을 던지고, 또 이들의 왜곡과 조작으로 묻히고 뒤틀린 사실들을 상기시키는 것이 이 책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많은 인물들을 다시 만나게 됐는데 그중에서도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특히 의미있는 소득이다.
두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절감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언가를 볼 때 절대 선과 악을 단정짓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으로 더 많은 질문을, 궁금증이 해소될 때까지 던져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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