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엠에스팀 엔터테인먼트

 

멜로 기근, 여성 실종.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계는 이처럼 메마르고 부정적인 단어들로 묘사됐다. 다양성 없는 한국 영화계의 현실은 곧 여성 및 여성성 부재였던 셈이다. 그럴 때마다 일종의 ‘구원투수’처럼 등장했던 이가 배우 손예진(36)이다.


관객 200만명을 돌파하며 순항 중인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손예진의 영화다. 20대부터 30대 중반을 오가는 주인공 ‘수아’는 풋풋한 20대의 감성과 어린 아들을 향한 애끊는 모성을 보여주며 관객들의 가슴을 데우고 눈물을 쏙 빼놓는다. 영화 <클래식>의 감성이 뇌리에 새겨진 팬이라면, ‘멜로 퀸’의 귀환이라는 홍보문구에 설레던 관객이라면 믿고 기대하고 만족했음직하다.

피칠갑과 욕설이 난무하는 거친 작품들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영화계에서 ‘손예진 영화’는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어 왔다. 블록버스터의 치열한 격전장에서 그가 원톱 주연을 맡아 이끌었던 <덕혜옹주>(560만명), <해적>(866만명)은 모두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다. 영화 팬들이나 제작자들에게 어느덧 ‘손예진’은 신뢰감을 주는 카드가 됐다.


데뷔 20년이 되어가는 그를 초창기 스타덤에 올려준 영화 <클래식>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멜로에 특화된 배우라는 대중적 인식이 강하다. 선한 눈웃음, 청초한 표정으로 먹먹히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만인의 연인’이라는 고전적 여배우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데뷔작이던 MBC 드라마 <맛있는 청혼>부터 <선희 진희>, <여름 향기>, 영화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 이르기까지 잇달아 흥행시키면서 그는 첫 손에 꼽히는 멜로 배우로 발돋움했다.

“지금도 케이블 TV에서 초창기에 했던 드라마가 나오면 화들짝 놀라며 채널을 돌린다”는 그는 초창기 작품이 ‘흑역사’로 느껴질 만큼 민망하다지만, 당시 시청자들은 신선한 마스크에 안정감 있는 연기를 선보이는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연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니 데뷔도 화려했다.


이 있다. 그는 다작 배우다. 데뷔 후 지금까지 거의 매년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자리와 한계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급증을 내거나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편견을 비켜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며 ‘배우 손예진’의 서사를 쓰기 시작했다. 20년 가까이 영화 홍보마케팅을 해온 퍼스트룩 이윤정 대표는 “대본과 상황에 대한 이해가 빠를 뿐 아니라 자신을 객관화해서 보는 역량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2005년 출연했던 영화 <작업의 정석>은 본격적인 도전의 시작으로 꼽을 만하다. 그 역시 “배우인생의 변곡점이 됐다”고 할 만큼 거침없이 망가지며 코믹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의 소속사에선 “너무 망가진다”면서 출연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 작품 이후 그때까지 나를 얽어매는 듯한 두려움이 없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불과 스물네 살의 나이에 섬세한 모성과 상실의 감정을 연기했던 드라마 <연애시대>(2006년)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의 웰메이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비슷한 패턴의 로맨스 영화에 안주하던 또래 배우 집단에서 그의 연기력을 대중적으로 각인시켰다. 이어 <무방비도시> <아내가 결혼했다> <백야행> <타워> 등에서 액션, 스릴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면서 주체적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특히 2016년 개봉된 <비밀은 없다>에서 국내 영화사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낯설고 기묘한 캐릭터 ‘연홍’을 연기하면서 국내 영화 캐릭터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가 출연한 개봉 예정작 <협상>을 제작한 영화사 JK필름 이창현 이사는 “시대극부터 장르물에 이르기까지 어떤 역할도 불문하고 잘 소화하는 데다 그동안 상업적 영화에서도 기대치를 충족시켜 왔다”면서 “이 때문에 캐스팅할 때 우선적으로 검토될 수밖에 없는 배우”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대본을 놓고 ‘이 연기가 가능할 여배우’라는 질문을 던질 때 손예진이라는 답을 내리고 나면 신뢰감이 든다”면서 “관객들 역시 그가 스크린을 통해 변주해내는 캐릭터에 신뢰감을 갖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3월 30일부터 방영되는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오랜만에 안방극장에 돌아왔다. 30대 중반 여성들의 보편적 감성과 연애사를 그린 달콤한 드라마다. 멜로 혹은 로맨스의 여왕이라는 그의 이미지는 이 드라마를 통해 극대화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연출을 맡은 안판석 감독은 “손예진은 멜로를 잘 하는, 사랑스러운 배우가 아니라 연기를 잘하는, 좋은 배우”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연예인이라는 문맥으로 그를 바라보고 접근하는 것은 온당치 않아 보인다”면서 “‘예술가’로 그를 재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워낙 강한 ‘멜로 퀸’ 이미지가 그를 특정한 틀 안에 가둘지는 몰라도, 어찌보면 그 이미지가 새로운 도전을 위한 발판이 될지 모른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남자배우들은 50·60대가 되어도 느와르를 소화할 수 있고 혹은 ‘ㅇㅇㅇ의 영화’라고 칭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지만 여배우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라며 “하지만 손예진은 여배우가 50·60대가 돼도 소화할 수 있는 로맨스 영화, 멜로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