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법조계·문화계 등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는 성폭력 고발을 두고 ‘한국판 미투 운동’이라고 칭한다. 지난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한국으로 건너온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사실 이 운동은 2016년 국내 문단에서 먼저 시작됐다. 김현 시인이 ‘21세기 문학’을 통해 남성 문인들에 의해 벌어지는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한 것을 계기로 피해자들의 증언과 제보가 쏟아졌고, ‘문단 내 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이며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고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당시 이 운동에 연대했던 송승언 시인(32)은 문단의 반성을 촉구하며 자신이 시집을 냈던 ‘문학과 지성사’(문지)를 향해 날선 비판을 했다. 그는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들 다수의 책이 문지를 통해 나온 것을 지적하며 “문학과 지성 시인선 400번대의 몇몇 빈 구멍들을 남겨 반성과 치욕의 사례로 삼을 것, 문지의 출판 표준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항목을 추가할 것”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불길이 퍼지는가 싶었던 이 운동은 하지만 국정농단 파문 등 외부적 환경으로 사그라졌고 대중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송 시인은 이 문제제기 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하는 등 마음고생도 해야 했다. 최근 서울 마포구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이 운동이 일시적인 현상이어서는 안된다”면서 “언제든, 누구든 피해를 호소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그 말을 들어주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메아리 없던 지난 1년여의 시간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문학계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많이 들려오는데도 실제로 목소리를 내는 문인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슬프고 속상했다. 피해자들의 사례가 가십성으로 소비되는가 싶더니 으레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과의 법적 공방이 이어졌다. 목소리를 내는 약자에게 가해지는 전형적인 2차 피해 말이다. 법적 기술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논리 싸움에서 실체적 진실이 은폐되는 경우가 성폭력 사건에서는 특히 많은 것 같다. 피해자는 순식간에 꽃뱀이나 거짓말쟁이가 되고 가해자는 되레 떳떳해지는 상황이 충격적이었고 환멸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도 송사에 휘말렸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절차를 겪긴 했으나 결론적으로는 잘 마무리됐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피해사실을 용기 내 폭로하고 나서 명예훼손을 당하는 희한한 법적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너무 답답하고 힘들다. 지금도 많은 피해자들이 곳곳에서 용기를 내고 있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모순적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높지 않나.”

-다시 시작된 미투 운동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물론 당연히 계속되어야 할 운동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검사라는 사회적 직위를 가진 피해자가 발언하지 않았으면 과연 사회적으로 다시 환기될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질문도 생기더라.”

-법조계에서 시작된 뒤 문화계로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연극계니 문학계니 하며 이 문제를 특정한 집단의 부패나 문제로 생각하고 비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약자를 착취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구조와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이 문제를 대하는 양상을 보면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고민보다는 만들어진 우상, 혹은 환상이 깨지는 데 따른 감정적 반응이 우선하는 것 같다. 동시에 대중들이 예술인에 대해 갖는 환상이 얼마나 깊은지도 읽힌다.”

-그건 무슨 뜻인가.

“예술가들이 일반인들과는 뭔가 다를 거라는 환상은 알게 모르게 대중들에게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도덕이 아닌 작품으로 평가하자는 옹호의 논리가 나오는 것도 그런 환상에 기반한다. 온갖 비윤리적 기행을 일삼아도 예술가라는 이유로 그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 오히려 주변에서 알아서 피해주고 이해해주고 조심하는 모습들을 심심찮게 보게 되지 않나. 그런데 이건 정말 잘못된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오랫동안 예술인들에게 윤리적·도덕적 안전지대를 만들어 줬다. 게다가 원로라는 지위, 유명세나 권위에 지나치게 기대는 예술계의 풍토도 악영향을 끼쳤다.”

-원로를 우대하고 권위를 존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 아닌가.

“문학계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작품이 어느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출판 편집자는 이를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명한 원로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시스템이나 상식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시장 원리도, 평가도 없이 권력이나 권위에 대한 예우만 있다. 왜 그런 현상이 예술계에서 심할까. 문제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많은 데 있다. 매년 입시를 통해 예술 관련 학과에서 학생들을 뽑지만 직업 예술인이 되는 문은 극도로 좁다. 그 과정을 통제하고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대학의 교수들과 특정 협회를 중심으로 한 소수 인맥이다. 문이 좁을수록 그들에게 권력이 집중된다. 문학뿐 아니라 연극, 무용, 클래식 음악 등 대부분의 장르가 그렇지 않을까. ‘모시는’ 스승과의 관계가 어떤지가 평생을 따라다니고 좌우한다.”

-결국 시장의 문제 아닌가.

“그렇다. 시장이 너무 좁고 작다. 그 분야의 위계와 권위를 거부했을 때 새로 발디딜 수 있는 ‘판’ 자체가 없다. 시장이 크다면 그나마 개인의 능력으로 돌파하고 살아남을 틈새를 찾을 수 있겠지만.

-‘판’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대중과의 접점을 늘릴 수는 없을까.

“‘순수문화’가 갖는 성격이나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했을 때 대중문화에 비해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나. 유튜브 덕에 스타 가수가 탄생하거나 인터넷으로 데뷔하는 판타지 작가들은 종종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이나 소설가, 배우, 무용수 등 소위 ‘순수문화’ 영역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기존의 ‘판’ 없이 대중들과 접점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개인의 역량보다는 기존의 위계가 예술가 개인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구조 속에서 폐쇄적인 그들만의 리그는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성추행 혐의로 해임된 전력이 있는 인사가 최근 시인협회장에 선출됐다.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젠더 감수성의 민낯이자 성범죄를 대하는 천박한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페쇄된 사회가 보여준 공범의식이기도 하고.”

-2016년 당시 ‘문지’를 향한 발언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쉽지 않은 결정이었던 건 맞다. 앞으로 문지에서 책을 내지 못할 수 있는 상황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난 잃을 것도 없고 누군가와 사제관계로 얽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성을 추구하고 싶을 뿐이다. 특정한 피해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 껄끄러운 관계가 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실제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 다음 책은 민음사에서 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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