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2교대 근무라는 살인적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서 간호사. 이같은 조건의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어떻게 전개될까. 통상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병원의 후계자와 사랑에 빠진다. 집안의 반대와 여러 갈등으로 아픔을 겪는다. 마침내 위기를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한다.

하지만 이런건 어떤가. 멋진 백마를 타고 나타난 듯한 후계자에게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서 간호사. 둘 사이에 ‘썸’인듯, 묘한 기류가 형성된다. 하지만 ‘우리’의 서간호사가 주축이 되어 노조를 결성한다. 사랑보다 동료와의 연대를 택하는 것이다. 마침내 서간호사는 병원 운영에 노조를 참여시켜 말도 안되는 근무환경을 개선하는 꿈을 이룬다.

현실에서 실제로 이런 드라마를 볼 수 있을까. 최근 소셜미디어 상에서 급속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웹 시트콤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를 보면 아마도 조만간 이런 드라마가 선보일지 모르겠다. 드라마 작가 회의실을 배경으로 하는 이 시트콤은 회당 5~7분 남짓한 5부작 시트콤. 여주인공 서간호사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를 두고 작가와 PD 사이에 벌어지는 회의가 주된 내용이다. 기발하고 재미있는 상황에 웃음이 쉼없이 터지면서도 중간중간 서늘한 현실이 마음 한켠을 쿡쿡 찔러댄다.

노조와 시트콤. 국내 드라마 환경에서 썩 익숙한,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말마따나 모름지기 드라마라면 백마타고 등장하는 남자가 있어야 하는데, 노조가 나오면 어디 가슴이 뛰기나 할까. 게다가 그동안의 콘텐츠에서 노조는 거의 소비되지 않았다. 사용되더라도 길항작용을 담당하는 피상적이고 막연한 장치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라는 살벌한 제목의 이 시트콤은 노조에 대한 신선한 시각과 심리적 접근을 허용한다. 이 작품을 제작한 곳은 ‘시트콤 협동조합’.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는 지난달 초 소셜미디어에 계정을 연 이 협동조합의 첫 작품이다.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은 붙었지만 대단한 조직력을 갖춘건 아니다. ‘은하해방전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등 독립영화와 실험적 시트콤으로 잘 알려진 윤성호 감독을 중심으로 창작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인 네트워크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모든 것은 몇년전 윤 감독이 ‘별 생각없이’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린 포스팅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미드에선 노조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국내엔 왜 없을까. 노조가 나오는 시트콤을 만들고 싶다’고 끄적였다. 눈밝은 누군가가 그의 포스팅을 보았는지, 지난해 말 민주노총측은 윤 감독에게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를 친근하게 알려줄만한 콘텐츠 제작을 의뢰했다. 그는 그동안 함께 작업했던 작가와 연출자, 배우, 스태프들과 이런 주제를 공유했고 공감하면서 작업이 이뤄졌다. 윤 감독이 판을 깔아 놓았다면 제작은 이경민 감독, 송현주 작가 등 그동안 윤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여성 창작인들이 전면에 나섰다. 독립영화에서 오래 활동해 온 임성미 등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도 참여했다.

대본을 쓴 송 작가는 “처음엔 다른 산업현장을 무대로 생각했는데 익숙하고 친근한 우리의 작업현장을 다루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창작이나 콘텐츠와 관련된 일터 역시 노동의 댓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실제로 노조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라는 제목은 따지고 보면 노조라는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작품의 무대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시트콤의 설정은 드라마 ‘유니콘의 후예’에 출연하는 남자배우가 음주운전으로 하차하면서 제작진이 비상회의를 갖는다는 것. 오프닝과 함께 ‘스타 작가’가 짜증스럽게 내뱉는 첫 대사가 “아, 이 새끼를 초반에 죽였어야 됐는데”이다. 새벽까지 밤샘 촬영에 시달리는 것은 드라마 제작진의 일상인데 실제로 이같은 상황까지 벌어진다는 것은 엄청난 초비상 상황이다. 문제는 드라마 현장에서 종종 이같은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감독은 “그동안 피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지던 노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됐다거나 친근하게 느낀다는 반응이 꽤 있어서 뿌듯하다”면서 “디자인 업계에 종사하는 친구들도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공감하더라”고 설명했다. 윤 감독은 “처음엔 끝까지 보게만 해도 좋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의외로 끝까지 보는 비율이 꽤 높더라“고 덧붙였다.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는 시트콤 협동조합의 작품은 또 있다. 윤성호 감독이 직접 연출한 4분 남짓한 시트콤 ‘두근두근 외주용역’이다. 유통 대기업의 김과장과 납품업체 양사장 사이의 대화로 구성된 이 시트콤 역시 포복절도할 웃음과 분통이 동시에 터지게 만든다. 두 등장인물의 대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자의 권리를 말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갑질 ‘꿀팁’이다. 직원 잡는 법, 연대의 가치를 무시하게 만드는 법, 노조의 권리 주장을 ‘재수없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방법 등이 세심하게 소개된다.

시트콤 협동조합은 이제 발걸음을 뗐다. 정비된 조직도, 구속력도 없지만 윤 감독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자체적으로 생명력을 키워가는 형태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노조와 관련된 콘텐츠로 시작하게 됐지만 주제가 거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현재 웹에는 진보적 콘텐츠가 제대로 뿌리내리고 있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동의할만한 주제의식이 있고 적절한 인건비가 지원되는데다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보장된다면 어떤 분야에든 도전해 보고 싶어요.”


윤 감독은 시트콤 협동조합을 단순한 제작사가 아닌 종합 유통망의 형식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공감할만한 콘텐츠를 가진 누구라도 이 계정을 통해 자신의 콘텐츠를 펼쳐놓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단, 조건은 있다. 시트콤이라는 간판이 붙은 만큼 코미디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 조만간 뮤지션 이랑이 제작한 콘텐츠도 이 계정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이랑은 지난해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즉석에서 트로피를 팔아 화제를 모았던 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