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절을 더듬으며 감성적 추억을 찾아가는 ‘응답하라’ 시리즈 대신 그가 택한 것은 감옥이라는 판이한 세상이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게다가 극장도 아닌,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에게 말이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tvN)이 시작되기 전 신원호 PD를 걱정스럽게 했던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의 선입견이었다. 국내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없던, 교정시설 내 인간군상의 삶을 다루는 만큼 등장인물 대다수는 ‘범죄자들’일 수밖에 없다. 저마다 사연은 있겠지만 그래도 범죄자라는 이유 때문에 외면 받으면 어쩌나 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시청자들은 화면 곳곳에서 생명력 있게 반짝이던 캐릭터들에 몰입했고, 좀처럼 떼내기 힘들 만큼의 정을 줬다. 추억의 하숙집(응답하라 1994), 아련한 고향 골목길(응답하라 1988) 뿐 아니라 엄혹한 공기가 지배하는 그 곳, 감옥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신원호표 드라마는 이제 거대 팬덤을 거느린 하나의 세상이 됐다. 그리고 그 세상에 흐르는 공기는 사람의 온기로 데워진다는 신뢰가 어느덧 대중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지난 1월 19일 열린 종방연 직후 그에겐 논둑에 막아놓은 물꼬 터지듯 몸살이 밀려들었다. 며칠을 꼼짝없이 앓았던지 눈빛이 퀭했다. 그는 “잠을 많이 못잤다”고 했다. 드라마도 끝났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몇 개월간 아빠 얼굴을 제대로 못본 어린 두 딸이 아빠가 오래 자는 것을 보아 넘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건강관리를 제대로 해야겠다.
“특별히 이상이 있는 곳은 없는데 체력은 좀 떨어졌다. ‘응답하라 1994’(2013년) 찍던 때는 거의 막판에 링거를 맞았는데 ‘응답하라 1988’(2015년) 때는 촬영 시작하고 두 달 만에 (링거를) 맞았다. 그런데 이번은 그 시기가 3주 만에 오더라.”
-고생을 사서 하는 편인 것 같다. 일반적인 드라마 PD들은 큰 틀에서 편집의 방향을 잡고 지시하는 정도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편집하지 않나.
“예능 PD로 시작하다 보니 아무래도 배운 게 이 재주라서 그렇다. 기존 드라마 PD와 비교했을 때 그나마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경쟁력이기도 하고. 미묘한 감정의 리듬이나 호흡의 흐름이 당초 의도했던 대로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데, 그건 촬영한 내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다. 물론 전문기사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내가 직접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보인다. 그러니 놓을 수가 없다.”
-발표했던 드라마 네 작품이 모두 홈런을 쳤다. 신원호표 드라마를 대하는 대중들의 기대감이 부담스럽지 않나.
“나 혼자 지는 짐이라면 그렇겠지만 이우정 작가를 비롯해 우리 팀이 함께 있어서 좀 낫다. 앞으로 언젠가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닥뜨린다면 못견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어차피 언젠가 닥칠 수도 있는 일이니 조심하고 안주하기보다는 과감하게 시도하고 도전하고 싶다. ‘감빵생활’도 그런 생각에서 시작했다. 이런 칙칙한 소재를 누가 보겠나 걱정하면서, 망하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고 서로 격려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드라마 시작 전 ‘망할 것 같다’고 기대감을 낮춰 놓았다. 전교 1등이 공부 하나도 안 했다고 걱정하는 것처럼. 외려 ‘잘할 거야’라는 강한 확신처럼 보인다.
“열심히 공부하긴 했는데 제대로 된 범위를 했는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 겉으로는 쿨한 척, 초연한 척해도 속으로는 왜 1등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나. 도전에 의미를 부여하자고 가볍게 마음먹었다가도 일단 시작하고 나면 전투력이 치솟으며 욕심이 생긴다.”
-드라마 종영 후 배우들 인터뷰를 보니 하나같이 ‘신원호 PD가 왜 천재인지 알겠다’고 하더라.
“그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은 이우정 작가다. 이번에도 극본을 기획하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며 중심을 잡았다. 드라마는 대본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대본대로 찍는 사람일 뿐이다. 둘 다 그런 손발 오그라드는 칭찬은 싫어하지만 만약 그런 찬사가 나온다면 이우정 작가가 듣는 게 맞다.”
이우정 작가는 신 PD와 함께 막강한 협업공동체를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이다. ‘응답하라’부터 이번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함께 해 왔다. 이들의 돋보이는 강점 중 하나는 적확한 캐스팅 능력이다. 지금껏 만들었던 모든 드라마에서 이들은 숨겨진 진주를 찾아내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속칭 ‘병풍’ 출연자들이 없다. 드라마 제작진들이 손쉽게 기대는 스타 캐스팅, 이미지 캐스팅 대신 두 사람은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시청자들에게 풍성하고 신선한 연기의 맛을 선사한다.
-주인공을 캐스팅할 때 ‘스타’는 일부러 배제하는 건가.
“아니다. 캐릭터에 정말 맞는 배우가 있다면 왜 안 하겠나. 중요한 건 유명 배우의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 작품의 캐릭터다. 캐릭터와 배우가 만나 화학작용을 통해 완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라는 재료의 특성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캐스팅을 앞두고 배우를 만나 어떤 사람인지 탐색한다. 집에서는 어떤지, 술을 마실 때 습관은 뭔지, 자기도 모르게 나타나는 버릇은 무엇인지, 연애할 때는 어떤 스타일인지 등을 세세하게 물어본다. 배우의 실제 캐릭터를 가져와 이걸 변형하거나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스타’라고 하는 연기자들의 실제 모습은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만나서 이런 걸 물어보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다. 울렁증도 있고.”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겠다.
“이 바닥의 통상적인 캐스팅 관례와는 다르다 보니 당연히 그렇다.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의도로 만난건데 상대는 캐스팅됐다고 생각하는 거다. 아무래도 얼굴이 잘 알려진 유명 배우인 경우는 만나는 것 자체가 더 조심스럽다. 자칫 기사라도 난다면 서로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경호씨 캐스팅은 의외였다. 그가 연기한 준호는 전형적인 ‘주인공 친구’다. 보통 주연급 연기자들이라면 선뜻 내켜 하지 않을.
“주인공이 무명에 가깝다보니 ‘준호’ 캐릭터는 주연급 배우에게 맡기고 싶었다.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캐스팅 과정에서는 상당히 옹색하고 군더더기 많은 설명이 붙어야 했다. 그 때문에 주요 배역 중에서 가장 늦게 확정됐다. 정경호씨가 선뜻 하겠다고 하는데도 ‘속으로는 아닐 거야…’ 하고 넘겨 짚으며 미적댔다. 그런데 경호씨가 변함없이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더라. 정말 고마웠다.”
이번 드라마에는 조 주임을 연기한 성동일과 제혁의 변호사를 맡은 유재명, 장기수 최무성, 점박이 최성원 등 기존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낯익은 인물들이 꽤 출연했다. 1·2회에 특별출연했던 성동일은 기존의 이미지를 전복한 악역으로 낯선 재미를 더했다.
흥행불패 신원호 PD의 드라마 세상
-배우 성동일은 그간 신원호표 드라마에 모두 출연했다.
“‘응답하라’의 그림자를 다 지워버리고 싶어 일부러 배제했는데 쓸 수 있는 카드를 안 쓰는 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욕스럽고 이중성을 가진 조 주임을 ‘친근한 아빠’ 성동일이 연기하는 것 자체가 반전의 재미를 줄 거라고 예상했다. 팽 부장도 마찬가지다. 배우 정웅인에게서 강한 악역의 이미지를 쉽게 떠올리는데, 속정 깊은 팽 부장을 연기하는 것 역시 재미있는 전복이 될 것으로 봤다.”
신 PD가 시청자들에게 외면 받으면 어떡하나 하고 가장 걱정했던 캐릭터는 문래동 카이스트(박호산)와 해롱이(이규형)였다. 하지만 이 둘은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새 삶을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던 마약사범 해롱이가 출소 직후 마약에 손을 댄다는 반전 결말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여성들이 주로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신 PD를 원망하는 글들도 꽤 눈에 띈다.
흥행불패 신원호 PD의 드라마 세상
-해롱이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시청자들이 많다.
“주요 캐릭터의 ‘운명’은 기획단계에서부터 다 짜여 있었다. 죄를 지을 것 같던 사람이 예상대로 짓는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문래동 카이스트와 아들 사이의 슬픈 사연도 처음부터 비극적 요소로 예정돼 있었다. 제혁이나 유 대위, 고 박사 등과 달리 카이스트와 해롱이는 악질적인 범죄자다. 그래서 미움 받을까, 외면당할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사랑 받는 캐릭터가 된 것은 전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이다.”
그가 선보일 다음 작품은 현재 1회까지 대본이 나와 있다. ‘감빵생활’을 준비하며 함께 틀거지를 잡아둔 터라 빠르면 연말쯤 방송될 수도 있다. 어떤 내용인지 묻자 그는 “감옥과는 달리 그동안 굉징히 많이 다루어졌던 소재”라고만 답했다.
-차기 ‘응답하라’ 시리즈로 2002년을 기대하고 있는 시청자가 많다.
“굵직한 이벤트가 있었던 상징적인 해인 만큼 그런 예측을 쉽게 하는 것 같다. 연도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먼저다. 아직은 어떤 논의도 시작되지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을 다시 만들고 싶을 때도 있나.
“마음은 있는데 감이 떨어져서 못할 것 같다. 계속 흐름을 쫓아가더라도 쉽지 않은데 몇 년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완전히 ‘아재감성’이다. 후배들이 자막 넣는 것 보면서 ‘저게 무슨 말이냐’고 물을 때가 많다. 누구나 다 아는 힙합곡인데도 나만 몰라서 엉뚱한 소리 하다 망신살 뻗치기도 하고. 함부로 손대면 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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