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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통신

남자들이여 주방으로 들어가라

by 신사임당 2018. 1. 9.

 

 

예전 TV 광고의 하나. 중견 배우 백윤식이 김치를 맛보며 이렇게 말한다. 김치가 짜다... 사랑이 식은거지 뭐.  그땐 재밌다고 꽤 화제가 됐었는데 요즘 방영됐더라면 꽤 많은 비판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요리는 그 자체로 삶을 영위하는 과정이다. 살기 위해 숨쉬고 걷는 것처럼, 먹고 살기 위해 요리를 한다. 요리라는 행위를 통해  즐거움을 찾고 기술, 혹은 예술적 발전과 성취에 도전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 일단은 삶을 이어가는데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행위다.

어느 때부턴가 요리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 됐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웃을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행위다. 나 역시 그렇게 요리를 하고 함께 먹는 것은 기꺼이 하고 싶고, 또 즐겁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요리가 그 본질적인 의미로 충실히 존재하기 보다는 요리로 대표되는 가사노동, 그것도 여성들의 노력과 노동을 착취하는 기제로,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더 많이 작용해 왔다는 것은 안타깝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올해 일흔 넷인 일본 작가(남자다) 다마무라 도요는 <일단 양파라도 썰어볼까>라는 책에서 "요리는 사랑이 아니다. 요리는 그저 기술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요리는 사랑이 아니라 기술이다.

 

이 책은 그가 음식을 만들어 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해 쓴 요리 입문서다. 단순히 쉬운 요리법, 요리의 ABC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요리는 자기 생활을 남에게 떠맡기지 않고 자신이 책임지는 기본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가사노동은 여성의 일이라며 아직도 앉아서 밥상만 받으려는, 혼자서는 계란 후라이도 제대로 못하는 다수의 남자들을 가리켜 '사생활이 부자유스러운 인간들'이라고 지적하며 그들에게 일갈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날을 세우지는 않았다. 가볍고 유쾌하게, 그러면서 중심잡는 메시지를 툭툭 던진다. 명쾌한 이 책의 메시지는 "남자들이여, 주방으로 들어가라" 이다.

 

먼저 그가 남자들에게 하는 잔소리들이다. (내 마음이기도 하다)

 

"지금은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회에 나가 일하는 시대다. 그렇다면 남자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집안일이며 육아를 해야 한다. 앞으로는 자기가 먹을 음식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시대다"

 

"남이 만들어주기를 바라니까 요리가 의무가 되고 무거운 짐이 되고 그 불만이 '애정' 이라는 이름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골프나 테니스를 잘 치고 싶으면 자발적으로 연습하러 갈테고, 연습하면 조금씩 늘 것이다. 맛있는 요리를 먹고 싶으면 마찬가지로 직접 연습하면 된다. 요리는 애정이라기보다 오히려 먹겠다는 의지다. "

 

"남자니까, 여자니까 라는 옛날 체면이나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잡다한 지식도 남자의 요리도 죽었다. '남자니까', '남자도'가 아니고 한사람의 온전한 생활자로서 가볍게 주방에 서서 어떤 것이든 맛있게 만들어 먹는 소양을 익히자."

 

"내가 요리를 직접 하지 않는 남자를 경멸하는 것은 그들이 무신경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식사에 초대해도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요리란 식탁에 앉으면 바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에 있는 식재료가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가 드는지 상상조차 못한다."

 

잔소리만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이런 꾸짖음에 뭔가를 느끼고 주방으로 향하는 이들을 위한 쉬운 실전 요리법, 실용적 정보, 상식들을 친절히 일러준다.  복잡한 요리기구나 재료도 필요 없다. 처음엔 그저 식칼 하나만, 그것도 없다면 손으로 재료를 죽죽 찢어 초간단 요리를 만드는 방법부터 시작하자고 한다. 칼 쥐고 써는 법, 쌀을 씻어 밥하는 법부터 시작해 나중엔 일본 스모선수의 에너지원으로 사랑받는 복잡한 나베요리까지 만들어 볼 수 있다. 같은 재료를 갖고 재료배합과 양념을 섞는 방법을 어떻게 달리하느냐에 따라 일본, 중국, 서양식 요리로 뚝딱 변용할 수 있는 노하우는 꽤 요긴하다. 아, 그리고 요리한 뒤 뒷정리하는 법도 있다. (빈틈 없다).

젖은 낙엽같은 인생을 사는 분들이라면 이 책과 함께 주방에 들어가서 일단 양파라도 썰어보자.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마른 낙엽같은 인생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