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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통신

'여혐이나 남혐이나 그게 그거'라 생각하신다면

by 신사임당 2018. 1. 9.

 

 

얼마전 대화끝에 딸아이가 그랬다. 엄마도 어쩔 수 없어. 명예남자야. 명예남자가 무슨 말인지 아는터라 발끈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그랬더니 그동안 내가 했던 생각과 표현들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했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그게 현명한 생각인양 말한다는 것이다. 일베, 메갈 논쟁 등과 관련해서도 '그런다고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 안된다' '둘 다 나쁜거 아니냐'는 식으로 내가 표현을 했었다면서. 그런 식의 표현들은 점잖은 척 하는 꼰대들의 가증스러운 대화법이라고 잘라말했다.

 

확 열은 올랐지만 표독스럽고 냉정한 딸아이의 말이 맞긴 맞았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었고 은연중에 표현했고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몰랐다. 일견 이해하는 부분도 있지만 갈피를 못 잡는게 더 많았고, 누군가 지적하는 문제에 대해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는 때가 더 많았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지금까지 살면서 나도 모르게 굳어버리고 젖어버린 사고의 습관들에 매몰돼 있었다. 은연중에 '우리 때 보다는....' 이러면서 현재의 문제제기들을 외면하려 했고, '유난도 떤다'며 피곤해했다. 그런 모습의 나와 그런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며 정신차리자는 또 다른 나는 내 안에서 분열하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만난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갈피를 잡고 정신을 차리는데 큰 도움을 얻었다.

 

나같은 증세를 겪으신 분, 젊은 친구들이 문제제기 하고 따지는게 이해가 안되거나 피곤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이라면 꼭 보십사 하고 추천한다. 나는 괜찮고 트인 상사인데 후배들이 나를 피한다고 억울해 하시는 분들, 요즘 애들 당췌 이해가 안되고 짜증스럽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이 책 한번 잡숴 보시길...

 

몇몇 부분을 소개해 본다.

 

*"여대생들은 매일 스마트폰으로 예쁜 옷이나 구경한다. 그래서 불행한거다." 한 대학교수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한 말이다. 요즘은 이런 말들도 여성혐오로 간주된다. 설사 여학생들이 걱정되어 한 말이라고 해도 여전히 문제다. 이 말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여대생에 ㄷ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키고 여성을 무시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보고 차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 말들이 자꾸 발화될수록 그런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어 사실로 둔갑하고 이것이 다시 차별을 낳게 되는 것이다.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은 동성애 혐오다라고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과해 보일지 모르지만 차별받는 소수자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다수자의 입맛에 맞는 용어가 선택되어야 할까, 아니면 소수자의 입장에서 문제의 본질에 부합하는 용어가 선택되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어감에 부합하는 용어를 택하는 것이 문제를 부드럽게 이해시키는데 유리할지 모른다.  그런데 다수자 입장에서 거부감이 없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혐오표현의 심각성에 관한 문제의식이 고양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과격한 용어의 사용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반차별운동'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남혐과 개독도 혐오표현일까. 핵심은 남혐이나 개독이라는 표현이 소수자 혐오의 경우처럼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남성이나 기독교도와 같은 다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은 성립하기 어렵다.

실제로 다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표현은 대개의 경우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표현과 같은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비장애인에게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 말고 집에 처박혀 있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비장애인에게 위협이 된다거나 차별을 조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혐오표현이라고 이슈화할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반면 똑같은 표현이 소수자를 향할 때는 사회적 효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남혐과 여혐이 사회에서 작동하는 기제가 똑같다고 볼 수 없고 남혐을 여혐과 비교하여 그게 그거고 다 나브다는 식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이쯤에서 미러링은 좀 다르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남성혐오와 여성혐오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 사회적 작동 방식과 위험 초래의 가능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개독도 마찬가지다. 개독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혐오표현이 야기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는 반면 무슬림을 비하하는 표현은 혐오표현이 될 수 있다. 이건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놓여 있는 한국의 사회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먼 미래에 남성차별 문제가 심각해지고 기독교가 탄압받는 소수종교가 된다면 남혐과 개독은 악랄한 혐오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혐오표현에 개입하는 선진국의 방식

인권과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국가에서 혐오표현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규제(법에 의한 강제규제vs 사회에 의한 규제)할 것이냐의 문제지, 혐오표현을 관용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혐오표현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대처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일부 혐오주의자들이 미국의 사례를 들먹이며 혐오할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성차별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한국 사회의 성차별은 더욱 공고하다. 미러링 운동 1, 2년만에 남성들이 갑자기 자각하거나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일거에 무너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요컨대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즉각적인 효과를 창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걸 실패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혐오표현, 대항표현으로 맞서라 

대항표현의 가장 큰 의의는 혐오의 지형을 뒤바꾼다는 것이다. 혐오의 선동은 소수자 집단을 고립시키려고 하지만 대항표현은 거꾸로 소수자와 제3자를 연대시켜 혐오주의자들을 고립시킨다. 

대항표현은 혐오표현 자체를 금지하고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그 해악을 치유해나갈 수 있는 위력적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