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인기가 높다보니 그의 커피까지도 덩달아 화제가 된다. 대통령의 단골집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물론이고 문재인 블렌딩까지 인기다. 어떤 바리스타가 SNS에 올리면서 돌게된 글을 보면 문대통령의 블렌딩 기법은 커피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지인이 그 방식대로 커피를 블렌딩 했다며 나에게 좀 나눠줬는데 커피나 와인의 맛 쪽에는 문외한에 가까운지라 어떤 부분이 어떻게 좋은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 물론 맛은 좋았다. 그저 내가 커피를 아는 수준이라면 맛있다, 맛없다 정도다. 살짝 신 맛이 나면서 신선한 느낌이 나는 커피, 엄청 진한데 뒷맛이 쓰지 않는 커피, 그윽하고 구수한 커피 정도로 커피 맛을 표현하는게 고작이다. 문재인 블렌딩은 진한데 뒷맛이 쓰지 않는 커피 쪽에 가까웠던 것 같다.
누군가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음료나 술, 음식을 맛보는 것은 그 자체의 맛도 맛이지만 특정 대상에게 자신을 투사하거나 친밀감을 누릴 수 있다는 정서적 즐거움이 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값이라면 누군가가 좋아했던 기호식품, 특정 유명인이 사용했던 제품, 누군가가 자주 가던 식당이나 카페, 혹은 특정 장소 등을 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게다가 머릿속에 딱 달라붙는 스토리까지 더해지니 말이다. 아이돌 팬들이 성지순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테고 유명 스타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는 것도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일테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의 주인공이 즐겼던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술만 따지고 봐도 맥주하면 하루키, 모히토 하면 헤밍웨이, 압생트 하면 랭보가 반사적으로 떠오르지 않나. 아니다. 모히토 하면 이병헌이 먼저 떠오르게 되나?
얼마전 뒤늦게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을 읽었다. 한때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에게 빠져 있던 내게 지인이 정유정의 작품을 추천했는데 이상하게도 <7년의 밤>만 ‘나중에 봐야겠다’고 미뤄뒀었다.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한번에 휙 읽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중간에 엉뚱한데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주인공 서원의 이모인 영주가 유럽여행을 다녀오면서 선물로 칼바도스를 가져왔다는 대목이었다. 소설 전개상 없어도 큰 지장은 없어보이는 부분이다. 내가 걸려든 것은 바로 그 ‘칼바도스’였다. ‘칼바도스’ 하면 마치 사로잡히듯 떠올리게 되는 그 누군가 때문이었다. 바로 라비크다.
<7년의 밤>을 소파 위에 엎어두고는 책장에서 <개선문>을 꺼내들었다. 개선문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라비크와 함께 칼바도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칼바도스는 라비크의 영혼같은 존재다. 절망과 공포와 허무와 고독에 내팽개쳐진 그를 지탱해주던 친구다. 대학 1학년때 이 책을 읽으며 라비크에게 얼마나 감정이입을 했던지 한동안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라비크가 걸어가던 그 축축한 안개속을 헤매는 듯한 우울함에 뒤척이곤 했다. 그러다가 밤이면 칼바도스를 맛보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기껏해야 막걸리, 맥주, 소주. 외국 술이라면 싸구려 양주 밖에 구경할 수 없던 때 아니던가. 근사해 보이는 바에 큰맘 먹고 들어가 칼바도스 있냐고 물었더니 그게 뭐냐고 반문하는 경험을 몇차례 하고는 포기했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도서관에서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 많이 나는, 사과로 만든 브랜디라고 했다. 게다가 독한 싸구려 술이라고. 하긴 독하지 않고 어찌 시름을 잊겠으며, 전쟁통에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떠돌던 그에게 무슨 돈이 있어 비싼 술을 마셨겠는가 말이다.
칼바도스를 마셔보리라는 꿈은 그로부터 16년 뒤인 2007년 11월 이뤄졌다. 출장지였던 파리에서 모처럼 시간이 났다. 마침 숙소도 오페라 근처였다. 개선문을 내다볼 수 있는 바를 찾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하긴 라비크가 바에 앉아 개선문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던 건 아니었다. 조앙 마두와 처음 만나서 칼바도스를 마셨던 곳도 지하였다. 조용한 곳, 게다가 비까지 내려준다면 더 좋았겠지만 적당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불어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인데다 뭔가 어정쩡하고 어색한 분위기. 창밖을 내다보는 자리가 비어 있길래 그쪽에 앉으려는데 바에 다가가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거기서 주문을 해야되는 것 같아서 다가가 칼바도스 한잔을 달라고 했다. 주문을 받던 털북숭이 남자는 나에게 ‘alone?’하고 물었다.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동양 여자들이 유럽에서 대접받는다는게 이런건가 하며 상상의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데 그 남자가 고갯짓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술잔을 앞에 둔 채 창밖을 내다보며 앉아 있는 몇몇의 행색을 보아하니 나처럼 칼바도스를 마시기 위해 혼자서 온 듯한 사람들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중 2명은 동양 여자였다.
잔을 받아들고 바로 마시는 대신 나름의 의식을 치렀다. 라비크는 술을 마실 때마다 ‘살뤼트’라고 건배사를 했다. 혼자이다 보니 작은 소리로 소심하게 ‘살뤼트’라고 중얼거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정말 가지가지 했다 싶다.
칼바도스는 내겐 그냥 독한 양주였다. 조앙 마두가 느낀 것처럼 그 전에 맛보지 못했던 그런 훈훈함이 몸을 감싸올까 싶었지만 그냥 양주를 넘겼을 때 속에서 훅하고 올라오는 열기 같은 것 외엔 잘 모르겠다. 칼바도스 한잔을 붙잡고 그렇게 두시간 정도를 앉아 있었다. 주변은 시끌시끌 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나 혼자에게만 허락된 나만의 공간에서 공상과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착각에 빠져드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렇게 라비크도 만나고 1940년대의 파리도 구경하고 소설 속에 나왔던 문장들도 되새기는 그 시간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한켠이 짜르르 설레온다.
소설속엔 써먹고 싶던 명문도 어찌나 많던지 모르겠다. 내 책장에 있는 <개선문>은 하서출판사에서 나온 1991년판이다. 누렇게 뜬 책을 펼쳐보면 밑줄을 쳐놓은 곳이 곳곳에 보인다. 지금 보면 그러려니 싶은 문장들도 있는데 그 땐 뭐가 그리 좋아서 이리저리 줄을 쳐놓고 별표를 그려놨는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연애를 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삶의 질곡에 시달렸던 때도 아닌데 나름 심각하고 진지했었던가 보다.
몇개만 옮겨보면 이렇다.
“빛은 이런 목석같은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잊어 버리고 언제까지나 오래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망각. 참으로 멋진 말이다. 그것은 공포와 위안과 망령으로 가득 차 있다. 망각이 없이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어느 누가 완전히 망각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찢어 놓는 기억의 잔해, 더 이상 살아갈 목표를 잃어 버렸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사실을 보고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죽음을 슬퍼하는 정이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이다. 이것도 역시 사랑인 것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기적. 그것은 현실이라는 회색 하늘에 꿈의 무지개로 다리를 놓을 뿐만 아니라 거름더미 위에도 낭만적인 빛을 쏟는 것이다. 기적이기도 하고 미친 조롱이기도 하다.”
“오늘이 두번째 밤이지. 위험한 밤이야. 미지에 대한 매력은 사라졌는데 신뢰하는 것에 대한 매력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니 말이야. 우리는 오늘 밤을 잘 넘겨야 돼.”
아직 책 3분의 1도 가지 못했는데 이 정도다. 뒤에도 계속, 책 마지막 부분까지 나온다.
아무튼 칼바도스로 다시 돌아가자. 지금은 국내에서도 칼바도스를 마시거나 살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을테니 예전의 나처럼 호기심에 떨며 참지 않아도 된다. 일본처럼 마니악한 취향을 섬세하게 살피는 곳에는 칼바도스 전문 바도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를 살펴볼 수 있는 이 사이트를 참고해봐도 좋겠다. ▶worlds 50 best bars 홈페이지 http://www.worlds50bestbars.com/)
한 페친은 칼바도스를 넣어 구운 과자를 파는 곳을 알려줬다. 방배동 서래마을의 빵집 메종엠오라는 곳인데 칼바도스를 넣어 구운 쫄깃한 프랑스 과자 ‘까눌레 칼바도스’를 이곳에서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이달이 가기전에 꼭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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