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식과 탐식

영국, 대관식, 그리고 키슈

by 신사임당 2023. 5. 13.

지난달 중순 BBC와 가디언 등 영국의 주요 언론들은 ‘찰스 왕과 카밀라가 대관식 공식 메뉴로 키슈를 선정했다’는 뉴스를 일제히 보도했다. 일명 ‘대관식 키슈’(Coronation Quiche)다. 대관식을 축하하며 영국 전역에서 펼쳐질 ‘빅 런치’(Big Lunch)에 오를 이 메뉴는 70년 만에 열리는 빅 이벤트의 상징 중 하나다.

왕실 문화가 일반 시민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영국에서 대관식을 비롯한 왕실 주요 행사의 공식 메뉴는 큰 의미를 갖는다. 공동체가 모여 이를 함께 먹고 나누며 축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왕실은 레시피를 공개하고 다양한 이벤트를 지원해 많은 시민이 이를 즐길 수 있도록 독려한다. 실제로 일반 가정에서 이 메뉴를 폭넓게 활용하고, 상업적으로 다양한 제품이 시판되면서 일상의 식문화로 자리 잡는다.

대관식 공식 홈페이지(https://coronation.gov.uk/)

 

왕실은 이 때문에 그동안 굵직한 행사를 개최할 때 매번 대표 요리를 선정해 왔다. 지난해 열렸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 70주년(Platinum Jubilee) 기념하는 ‘플래티넘 푸딩’이 있었고 70년 전인 1953년 열렸던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서는 ‘대관식 치킨’이 선정됐다.

이때 선보였던 대관식 치킨은 커리 가루에 크림, 마요네즈 등을 섞어 만든 소스에 닭고기를 버무려 낸 요리였다. 당시 르 코르동 블루 런던의 교장이던 로즈마리 흄과 그의 부인 콘스탄스 스프라이가 만들었다. 이 레시피는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많은 셰프들에 의해 창조적으로 진화했다. ‘대관식 치킨’은 현재 영국 전역에서 친근하게 즐기는 요리로 자리 잡았으며, 주로 샌드위치 사이에 넣는 필링으로 많이 사용한다. 영국의 프리미엄 소스 브랜드 스톡스나 테스코 등에서는 ‘대관식 치킨 소스’ 제품도 내놓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7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플래티넘 푸딩

 

대다수의 영국 국민에게 ‘대관식=치킨’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은 만큼 이번 대관식의 공식 메뉴가 키슈로 선정되면서 각종 미디어와 사회관계망 서비스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하다(weird), 혐오스럽다(abomination) 따위의 부정적인 평가들이 꽤 많이 눈에 띈다. 이는 이전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에 비해 이번 대관식의 주인공인 찰스 3세와 카밀라 부부의 대중적 평판이나 인기가 낮은 것과 무관치 않다. 일반 서민들이 쉽고 편하게 먹는 키슈를 대관식 메뉴로 선정한 이유는 그런 배경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소탈하고 대중 친화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대관식 키슈 출처 https://coronation.gov.uk/

 

키슈는 타르트 틀에 달걀이나 고기, 채소, 허브 등을 넣어 구운 파이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음식이다. 키슈는 프랑스가 기원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키슈라는 이름도 불어다. 하지만 사실상의 탄생지는 독일이라고 봐야 한다. 음식전문 저술자 헤더 안트 앤더슨의 <아침식사의 문화사>에 따르면 키슈는 14세기 서부 게르만 왕국의 로트링겐 지역에서 유래했다. 로트링겐 지역은 18세기에 프랑스에 의해 ‘로렌’으로 이름이 바뀐다. 오랫동안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영토분쟁을 겪었던, 현재의 프랑스 로렌이다. 키슈라는 이름도 독일어의 과자를 일컫는 쿠헨(kuchen)과 관련이 있다.

키슈에는 어떤 재료가 주로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키슈 로렌, 키슈 오 프로마쥬(치즈 키슈), 키슈 피렌체(시금치 키슈), 키슈 오 샴피뇽(버섯 키슈)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것이 키슈 로렌이다. 베이컨이 듬뿍 들어가는 키슈 로렌은 프랑스 로렌지역에서 전통적으로 노동절에 많이 먹었다.

인스타그램에서 #coronationchicken‘으로 검색하면 다양한 치킨 요리를 찾아볼 수 있다.

 

영국 왕실이 공식 홈페이지(coronation.gov.uk)를 통해 대관식 키슈 레시피를 공개하면서 ‘바삭하고 가벼운 페이스트리 틀에 시금치, 누에콩, 신선한 타라곤을 넣어 풍미를 더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시금치를 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키슈 피렌체와 외양이 비슷하다. 타라곤은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향신료의 여왕이라 불릴 만큼 귀하게 취급받는 향신료의 일종이다. 누에콩은 잠두라고도 불리는데 중동이나 지중해 지역에서 주로 먹는 콩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는 이 레시피에 따라 키슈를 만들어 공유한 사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좀 더 쉬운 버전으로 정리한 내용도 많아 어렵지 않게 따라 해 볼 수 있다. 누에콩이나 타라곤은 국내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영국 왕실은 대관식 키슈 외에도 5명의 셰프가 제시한 기념 파티 요리와 메뉴를 추가로 공개했다. 지역별 취향을 고려해 선정한 것으로, 지역사회나 가정의 파티에서 함께 즐길 것을 권하고 있다.

△켄 홈(Ken Hom)의 아시아 스타일로 양념한 대관식 양고기 △나디야 후세인(Nadiya Hussain)의 대관식 가지 △그렉 월레스(Gregg Wallace)의 파인애플 살사를 곁들인 새우 타코 △아담 핸들링(Adam Handling)의 딸기와 생강 트라이플 △마사 콜리슨(Martha Collison)의 대관식 스콘 등이다.

대관식 스콘은 찰스 3세가 가장 사랑하는 음료인 ‘꿀이 든 다즐링 홍차’를 사용해 만드는 것으로, 홈페이지에 공개된 레시피 중 비교적 만들기 쉽다. 트라이플은 전통적인 영국 디저트다. 과일과 커스터드 크림, 스펀지케이크 등을 층층이 쌓아 올리고 젤리나 휘핑크림을 더해 만든다.

나디야 후세인의 대관식 가지 레시피. 공식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출처 https://coronation.gov.uk/

 

중국계 미국인 셰프 켄 홈은 BBC에서 방영했던 <켄 홈의 차이니즈 쿠커리(중국 요리)> 시리즈를 시작으로 다양한 방송을 통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영국의 음식 문화는 세계를 품고 풍요로워졌으며, 영국 음식은 모던한 세계 음식”이라고 설명하며 영국 식문화의 폭넓은 수용성을 언급했다. 가지요리를 선보이는 나디야 후세인은 방글라데시계로, 베이킹 리얼리티 프로그램 <더 그레이트 브리티시 베이크 오프>에서 우승한 뒤 셰프, 작가, 방송인으로 활동 중이다. 영국관광청 김미경 소장은 “대관식과 관련한 메뉴 선정에는 다양성과 포용을 중시한다는 철학과 메시지가 잘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찰스 3세가 시민들과 빅런치를 즐기고 있다. 영국관광청 제공

 

한편 키슈는 한때 정치적으로 첨예한 논쟁에 휘말렸던 적이 있다. 지금도 영어권 속어에 ‘키슈 이터’(quiche-eater)라는 단어가 있다. 네이버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비열한 녀석’ ‘계집애 같은 남자’ ‘남자 동성애자’라는 뜻풀이가 나와 있다. 실제로 1980년대에 미국에서 이 단어는 페미니스트나 자유주의자, 진보적 지식인을 일컫는 욕설이었다. 시나리오 작가 브루스 페어스타인이 쓴 <진짜 사나이는 키슈를 먹지 않는다(Real men don’t eat Quiche)>라는 책과 연관이 있다. 이 책은 남성적 고정관념을 풍자하고 비꼬는 내용을 담은 책이나, 책 내용보다는 문구만 생명력을 얻었다. 때문에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엄청났던 키슈의 인기는 1980년대 들어 뚝 떨어졌다.

 

**기사원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