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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과 탐식

격동의 역사 속에 탄생한 와인

by 신사임당 2023.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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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을 위한 훌륭한 와인 20선’(20 great wines for Easter·가디언), ‘부활절을 위한 최고의 와인’(Best wine for Easter 2023·인디펜던트), ‘부활절 정찬에 곁들일만한 와인’(Dine With These Wines For Easter·ESPN 사우스웨스트 플로리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 부활절에 즐길만한 와인’(Wine: Take time out over Easter to enjoy a glass of wine with family and friends·더 아이리시 뉴스).

지난달 말과 이달 초, 유럽 지역의 매체들은 이 같은 제목의 기사를 꽤 많이 내놨다. 부활절(4월 9일)을 앞두고 식사에 함께할 만한 음식과 와인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부활절에 주로 먹는 양고기를 비롯해 육류와 생선, 혹은 달걀 초콜릿이나 핫크로스번과 같은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부활절 메뉴에 페어링할만한 다양한 와인이 눈길을 끌었다. 서양 문화의 주요한 축이 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보니 부활절(Easter)은 서구 문화권 최대 명절이다. 기독교 문화와 부활에서 와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와인은 ‘예수의 피’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만찬 때 와인을 나누었다. 성경에도 상징과 비유로 와인이 무수히 등장한다. ‘신의 물방울’이라 불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성만찬에 사용하는 와인과 빵

 

종교와 역사, 수많은 서사를 품고 있는 와인 중에는 교회사의 굵직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있다. 무려 ‘교황의 와인’이라 불리는 와인이 있다.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다. 이 와인에 녹아 있는 흥미로운 교회사는 ‘아비뇽 유수’다. 중세 유럽에서는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세속 군주를 압도했지만 이 구도는 십자군 전쟁 패배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왕에 의해 프랑스 아비뇽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70년 가까이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가지 못한 채 아비뇽에 머물러야 했다. 이른바 아비뇽 유수인데, 여기서 ‘유수’(幽囚)는 잡아 가둔다는 뜻이다.

아비뇽 교황청. 위키피디아

 

세계사의 주요한 분기점이 됐던 이 사건은 황량한 바람만 불던 작은 마을 아비뇽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예전만 못하다지만 그래도 종교 권력의 중심인 교황이 머무는 요지가 된 것이다. 교황청과 관련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도시와 경제의 규모도 커졌고 와인 수요도 급증했을 터다. 이를 위해 포도원 개간이 활발해졌다. 아비뇽이 있는 프랑스 론(Rhone) 지역은 햇살이 뜨거워 일조량이 높다. 땅은 큼직한 돌투성이라 척박하기 그지없고,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부는 곳이지만 다행히 이 같은 조건이 포도를 재배하기에는 좋았다.

큼직한 자갈이 빽빽이 채운 론의 땅. 위키피디아

 

아비뇽 시대의 초대 교황 클레멘스 5세와 그 뒤를 이은 요한 22세는 와인에 많은 애착을 보였다. 특히 이 지역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와인 생산지로서 초석을 닦은 이는 요한 22세였다. 클레멘스 5세는 좋아하던 부르고뉴 와인을 아비뇽으로 공수해 마시는 정도였지만 요한 22세는 이 지역에 포도나무를 심고 본격적으로 와인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는 아비뇽에서 북쪽으로 18㎞ 정도 떨어진 지역에 교황의 여름 별장을 짓고는 일대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이 지역은 ‘교황의 새로운 성’이라는 뜻의 샤토네프 뒤 파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곳에서 생산된 와인은 교황의 와인이라는 ‘뱅 뒤 파프(Vin du Pape)’로 불렸으며, 이후 지역의 이름을 따 와인 역시 샤토네프 뒤 파프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이 지역에서 많이 재배하는 포도 품종은 그르나슈(Grenache)다. 과일 향이 강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갖는 그르나슈를 중심으로, 최대 13가지의 품종을 섞어 만든다. 품종별로 비율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보니 생산자마다 저마다의 비법과 스타일로 와인을 빚는다. 때문에 어느 지역 와인 보다 다양한 개성을 자랑하며 의외의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권기훈 소믈리에는 “개성과 맛, 향이 강한 샤토네프 뒤 파프는 프랑스 와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풍미를 자랑하는 와인 중 하나이고, 알코올 도수도 평균(12.5도)을 넘는 것이 많다”면서 “샤토 드 보카스텔(Chateau de Beaucastel), 샤토 라 네르트(Chateau La Nerthe), 비유 텔레그라프(Vieux Telegraphe), 앙리 보노(Henri Bonneau) 등이 오랫동안 명성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중 보카스텔은 한때 ‘이건희 와인’으로 국내에서 명성을 얻었던 적이 있다. 2013년 삼성전자 신경영 선포 20주년 기념 만찬에 올랐던 와인이 바로 ‘보카스텔 샤토네프 뒤 파프 2009년’이었다. 여러 품종이 블렌딩 되어 만들어지는 와인이다보니 화합의 의미를 담은 건배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 당시 재계의 이야기였다.

샤토네프 뒤 파프를 담는 병의 외관은 다른 와인병과 좀 다르다. 병의 어깨 부분에 양각으로 새겨진 문양이 있다. ‘교황의 와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병에도 교황의 문장을 새겨 권위를 드러내고 있다. 베드로의 열쇠가 X자로 교차한 위로 교황의 티아라가 놓여 있는 모습이다. 샤토네프 뒤 파프 제조자 조합(www.chateauneuf.com)의 설명에 따르면 1937년에 이 같은 문양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고 한다. 교황의 와인이라는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여하겠다는 시도였던 셈이다.

샤토네프 뒤 파프 병에 새겨진 교황의 티아라와 베드로의 열쇠. 성동훈 기자

샤토네프 뒤 파프 병에 새겨진 교황의 티아라와 베드로의 열쇠. 성동훈 기자

 

2018년 국내에 출간된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에는 샤토네프 뒤 파프 와인 병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오바마 전 대통령, 빌 게이츠가 추천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이 소설은 러시아 혁명 후 종신 연금형을 선고받은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의 우아하고 강인한 삶의 이야기다. 그가 연금되어 있는 곳은 크렘린 근처의 호텔 메트로폴. 품위와 교양이 몸에 밴 그는 상식과 국제정세, 문화에 걸쳐 해박하고 요리와 와인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것이 없다. 호텔을 찾는 손님들에게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자유자재로 추천하던 그는 어느 날 어이없는 일을 당한다. 호텔 지하 와인 저장고에 있는 수천 병의 와인 라벨이 다 떼내어져 어떤 와인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와인 라벨이 구시대 귀족의 특권을 나타내는 산물이라는 이유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황망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호텔 지하의 와인 저장고를 살펴본다. 오로지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두 종류만 쌓인 거대한 저장고에서 그는 와인 병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며 미소짓는다. ‘병을 들어 올린 백작은 유리병에 두 개의 열쇠를 서로 교차시킨 형태가 돋을새김 되어 있는 문양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모스크바의 신사> 235쪽)

 

영국 작가 피터 메일은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에서 살았던 경험을 담은 베스트셀러 <아피! 미스트랄>에서 샤토네프 뒤 파프를 색이 짙고 향이 깊으며 ‘거만한 어깨를 가진 포도주’라고 썼다. 책에는 그 이유에 대해 구체적 설명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병의 어깨 부분에 새겨진 위엄있는 문양 때문 아니었을까.

 

상당수는 열쇠가 교차하는 전통적 문양을 사용하지만 와이너리에 따라 조금 다른 모양들도 있다. 열쇠 대신 티아라만 새겨넣은 미트랄(mitrale)이라는 병을 사용하는 곳도 있고 변형된 문양을 새겨넣은 곳들도 있다.

어깨가 각진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병과 흘러내리는 형태의 부르고뉴 스타일. 얇고 길쭉한 형태의 플루트 스타일 (왼쪽부터) . 아영 FBC 제공

 
 

병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와인병은 모양에 따라 지역을 드러낸다. 크게는 프랑스 보르도와 부르고뉴 스타일로 나뉜다. 보르도 스타일은 각지고 높은 어깨를 가진, 가장 일반적이고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이다. 부르고뉴 스타일은 보르도에 비해 어깨가 흘러내리는, 부드럽고 매끈한 병이다. 보르도 와인은 타닌 함량이 많아 침전물을 거르는 데 각진 어깨가 효과적이어서, 부르고뉴 와인은 그렇지 않아 매끈한 형태를 사용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다. 이에 대해 WSA 와인 아카데미 김상미 대표 강사는 “통일감과 정체성을 위해 병의 형태를 먼저 채택한 것은 부르고뉴 지역이었는데, 어깨가 흘러내리는 모양이 더 만들기 쉬웠기 때문”이라며 “침전물의 정도와 병 모양의 상관관계는 부르고뉴와 보르도 지역의 병 모양이 정착된 뒤 뒤늦게 붙은 해석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리슬링 등 화이트와인으로 유명한 독일 모젤이나 프랑스 알자스 지역의 와인은 얇고 긴 플루트 형태의 와인병을 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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