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에 있는 신부님 댁. 집 앞에 '별아래'라고 씌여 있다.
지난 주말 완주에 다녀왔다. 지정환 신부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올해 88세가 된 신부님은 지난 1월초 몸이 눈에 띄게 약해지셨다고 했다. 방향감각도 거의 잃으셨고 간간이 짚고 일어나셨던 지팡이도 못 짚으셨다. 드시는 양도 급격히 줄어 기력도 뚝 떨어졌다. 병원에 갔더니 뇌에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으셨다고 한다. 원래 다발성 신경경화증에 뇌경색까지 앓고 계셨던 상태에서 종양까지 찾아왔다.
악성 여부에 관한 검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한다. 신부님이 고령이고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검사받는 과정도 고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부님은 그러셨다. 수술을 할 것도, 방사선치료를 할 것도 아닌데 악성이라는 판정이 나온들 뭘 어떻게 하겠느냐고. 7살 많은 형님도 아직 살아 있으니 당신도 최소한 7년은 더 살거라고.
식사와 약을 잘 챙겨 드신다는 조건으로 한달 전쯤 퇴원하셨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한움큼씩 되는 약을 드신다. 오전엔 기력이 좀 있지만 오후엔 누워계시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신부님측에서 연락을 받은 건 이달 초였다. 신부님에게 또 들이닥친 병마와 신부님의 건강상태, 그리고 신부님께서 나를 한번 보고 싶다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건강상태도 걱정스러웠을 뿐 아니라 너무나 민망하고 황송했다. 오랜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연을 쌓아 오셨을 신부님 기억에 나같은 사람이 있다니 말이다.
신부님을 처음 뵌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신부님 댁에 2박3일간 머무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60년전 벨기에에서 오신 뒤, 이곳에 치즈산업을 일군 신부님의 일생을 고작 원고지 32매에 압축해야 하는 작업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신부님은 기사가 나간 뒤에 지금까지 자신을 인터뷰한 것 중에서 가장 멋지고 마음에 드는 글이라고 칭찬과 격려를 해주셨다.
부랴부랴 지난 주말 신부님이 계신 완주에 갔다.
휠체어에 앉아 계시는 신부님은 작년보다 좀 야윈 듯 했다. 처음엔 놀란 눈으로 쳐다보시길래 “저 누군지 기억하시겠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그제서야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신부님 손을 잡고 있노라니 괜히 울컥했다. 말을 조금씩 하시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편하게, 많이는 못하셨다. 중간중간 찡그린 얼굴로 눈을 감고 손가락을 파르르 떨기도 하셨는데 통증 때문이었다. 한움큼씩 약을 드시지만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노쇠해진 신부님의 몸을 찔러대는 통증을 막아내는 것은 어려운 것 같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린 채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셨는데 괜히 내 오금이 다 저릿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벨기에에 있는 가족들과는 얼마전 연락을 하셨다고 한다. 정확하게 신부님의 상태를 알리셨는지 어떤지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으셨다. 가족들과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 오시라고 했느냐고 여쭈었더니 “어차피 2층에서 다 만날건데”라고 하셨다. 신부님이 말씀하신 2층이란 하늘나라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신부님을 돕는 오선, 최미자, 박남순 선생님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신부님이 평소에 가끔 드셨던 프랜차이즈 브랜드 치킨과 샐러드, 과일, 치즈 등이 차려져 있었다. 신부님은 숟가락과 포크를 사용하는 것도 좀 버거워 보였다. 때문인지 큼직한 냅킨을 목과 무릎 위에 두른 신부님의 식사를 최미자 선생님이 살뜰하게 도왔다. 그런데도 중간중간 신부님은 감자며 치킨을 힘겹게 포크로 찍어 내게 건내주기까지 하셨다.
점심식사 후 조금 더 앉아 계시던 신부님은 눕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셔야 한다고 했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신부님 어깨를 안아드렸다. 건강하게 잘 지내셔야 한다고 했더니 신부님은 내 등을 두드려 주시면서 걱정 말라고, 최소 7년은 더 살거라고 하셨다.
신부님 말씀처럼 최소 7년은 더, 게다가 거동도 말씀도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상태로 지내셨으면 좋겠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임실치즈축제에도 살아 있는 전설로 참여하셨으면, 동네 초등학생들이 신부님의 삶을 재구성해 올린 연극도 계속 보실 수 있으면 좋겠다. 나 역시 이렇게 신부님을 뵈러 꾸준히 올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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