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 상황을 뉴스로 보거나 혹은 직접 맞닥뜨릴 때 누구나 분통을 터뜨리고 쌍욕을 하게(물론 성품에 따라 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된다. 하지만 그때 뿐이다. 직접적으로 내 현실에 바로 맞닿아 있는 사건이 아니라면 친구랑 만나서 수다떨면서 그 일을 생각한다거나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그 일에 몰입하게 되는 경우는 잘 없다. 뒤돌아서면 내 앞에 떨어진 불똥 끄기 바빴고, 내 코가 석자였는데 ‘사법농단’ 이 사건만은 좀 달랐다. 내가 대단히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도 아니고 사회나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며 사는 사람도 아닌데 사법농단 사건이 불거져 뉴스가 터지기 시작한 뒤엔 자다가 벌떡 일어나 혼자 부르르 떠는 일이 꽤 있었다.
그런 심리상태가 꽤 오래 지속됐기 때문인지 몰라도 얼마전 출간된 김두식 교수님의 <법률가들>은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읽었다. 너무나 생소한 이름들이 쏟아져나오는 통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처음 읽을 때처럼 앞장을 계속 뒤적이며 이름을 확인하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해야했던 것 말고는 역사책 읽듯이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이미 많은 리뷰가 나와 있고 교수님 인터뷰 기사들도 찾아볼 수 있어서 자세한 내용은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씁쓸하고 우울하고, 그러면서 한편으로 나같은 일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도 든다. 근현대사에서 벌어졌던 비극적인 사건들의 가해자들이 여전히 그 사건을 부끄러움 없이 자랑하듯 털어놓는 것이 가능한 우리 사회 분위기, 공산당을 잡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정당화될 수 있는 야만의 시대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가 20년을 향해가는 지금도 여전한 것, 시민사회의 저항을 ‘적색분자의 준동 혹은 개입’으로 몰아가는 발상이 통용되고 있으며 이를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고 있는 이들 상당수가 아직도 국회의원, 혹은 사회고위층인 이 상황 때문 아닐까. 김기춘 같은 이는 불과 몇년전까지 최고권력층에 머물러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같은 행태, 하면 바로 떠오르는 얼굴들이 유력 정당의 국회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이런 광기는 언제든 틈만나면 살아나 미친듯 타오를 환경이 여전하다.
또 하나, 일제강점기 당시의 우리 사회는 절대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한줌도 안되는 재력가, 혹은 그에 준하는 집안의 자제들이 엘리트 집단으로 꼽히는 법조계를 비롯해 지배층을 형성했고 그렇게 엮인 이너서클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 20년간 대통령후보, 국무총리를 비롯해 고관대작을 지낸 이들 상당수가 이 그룹의 자제들이다. 20세기 후반기에 짧은 기간 열렸던 개천용의 기회는 이제 다시 사라져가고 있다. 아무튼.
이 책을 보면서 난 두 사람의 이름이 머릿속에 남는다. 오제도와 선우종원. 가뜩이나 생소한 인명이 넘쳐나는 책에서 이 두 사람이야 워낙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한, 지금도 여저히 야만의 시대가 이어지는 이유를 증명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사상검사, 일명 빨갱이 잡는 공안 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이들이다. 빨갱이 잡는 일에 손발이 됐던 단체로는 서북청년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서북청년단은 어느날 산에서 내려온,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시무시한 대상이 아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어온 개신교가 낳은 괴물이다. 서북청년단의 요람이 됐던 곳은 영락교회다. 영락교회는 월남한 사람들이 중심이 됐던 교회다. 이 교회를 이끈 이는 오랫동안 교계 원로로 추앙받아온 한경직 목사다. 오제도는 이 영락교회 청년회 출신이었고 이곳에서 장로가 됐으며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결식도 이곳에서 했다. 강준만 교수의 <희생양과 죄의식>이라는 책에는 선우종원도 이 교회 청년부 출신이라고 되어 있지만 김두식 교수의 책을 보면 “어떤 이는 장박사와 내가 같은 천주교 신자라 하여~”라는 부분이 나온다.
2001년 7월 경향신문에 실린 그의 부고 기사에는 오제도가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 향년 84세. 영결식은 서울 영락교회’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강준만 교수의 책에는 서북청년단의 유래와 만행이 서술돼 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제주 4.3이다.
이같은 한국 개신교의 역사, 지금도 여전히 드러나는 행태를 볼 때 한국 개신교는 기독교라는 그 정체성이 가진 본질, 즉 복음을 바탕으로 했다기 보다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용됐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도 그 말도 안되는 ‘설교’들이 쏟아지고,그것에 머리를 조아리며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현상은 설명이 안된다.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유사종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그 야만의 세월을 주도했던 세력이 이들에겐 정통이고 적통이며 참된 지도자다. 그에 반하는 모든 세력은 사탄인 셈이다.
이 두 사람과 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은 보도연맹사건이다. <법률가들>에도 등장하는 이 사건을 쉽게 이해하려면 2017년 8월19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방송됐던 내용을 보면 된다.
선우종원의 아들은 서울대총장을 지냈던 선우중호다. 그는 정권이 자행한 대표적 대국민사기극 평화의 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서울대 토목공학과 교수이던 1986년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 댐을 북한이 무너뜨리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직접 TV에 출연해 63빌딩 절반이 물에 잠긴다면서 이 미니어처에 물을 붓는 시연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나같은 중학생 주머니까지 털어서 평화의 댐을 짓는다며 공사를 했다. 그는 또 1996년 서울대 총장이 됐으나 1년반만에 불명예 퇴진을 했다. 고3이던 딸이 월 2000만원에 이르는 고액과외를 받은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으면서다.
이 기사는 금강산댐의 위험을 이야기한 1986년 10월30일 경향신문 1면 기사다.
신문 1면 제목이 '북괴, 금강산댐 안보에 중대 위협'. 북괴라는 말이 쓰이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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