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컬쳐 스코프

읽은 듯 읽지 않은 읽고 있는 고전 '걸리버 여행기'

by 신사임당 2018. 7. 28.


 

고전이라고 하니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요즘 그런 책들을 읽고 있다. 읽은 줄 알았는데 제대로 읽지 않았고, 아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잘 모르는 것이 고전에 대한 불편한 진실 아닐까.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그러지 싶다. 어디서 선정한 고전 몇권 따위의 리스트가 종종 도는데 공유는 많이들 하지만 실제 그 중에서 얼마나 많은 책들이 읽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크 트웨인도 "고전이란 모두 읽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읽고 싶어하지 않는 책"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몇달전 인터뷰한 <더 파크>의 창업자인 정우성, 이크종 두 분도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읽지 않은 책"이라며, 그 이유로 고전을 리뷰한다고 했었다. 

 

아무튼 그 중에서 뭐라도 고를 때면 개인적으로는 문학에 그나마 마음 편하게 손이 간다. 철학 역사 쪽은 이해가 어렵고 지적 배경을 요하는 저작들이 많다는 것이 함정. 옛 문학 작품들을 읽다보면 느끼는 것이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다는 것. 고민과 고뇌, 그리고 그 문제를 푸는 지혜도 다르지 않다는 것. 물론 시대적 배경과 사회의 진보에 따른 제도적 차이는 있지만 인간의 본질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외의 순간에 ‘온고지신’을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안 읽어도 아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은 이 훌륭한 ‘이야기’ 들이 현재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수많은 콘텐츠들의 근본이자 원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 문학을 열심히 읽어보자고 결심했다. 책을 읽고 훌륭한 서평을 남기는 강호의 고수들이 워낙 많은지라 그 따위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읽은 티 낼려고 밑줄 쳐 놓은 부분들만 정리해 놓기로 했다. 



< 걸리버 여행기>

 

얼마전 누가 나에게 무슨 책 읽고 있느냐고 물어봤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며 그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했다. 왜냐하면 웬만한 내 주변의 인간들은 다들 “뭐 재미있는 얘기(구체적으로 19금) 없어?” “김치말이 국수 먹을 수 있는 데가 어디야?” “@@랑 ##랑 사귀는 거 맞아?” 따위인데 나에게 저런 질문을 하다니. 그래서 신나서 대답했다. “걸리버 여행기”.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올라오는 당황스런 표정. 왜 당황하는 거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정도는 답해 줬었어야 하나? 순간 좀 실망감이 들면서 호감도도 급강하했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예전 포털사이트 ‘야후’라는 이름이 걸리버여행기에서 유래한 건 아시는지?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도 걸리버여행기가 모티브를 제공했다는건 들어보셨는지. 

 

걸리버 여행기는 누구나 어린 시절 읽어 봤을 거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제대로 된 걸리버 여행기를 아는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원작의 절반만 어린이 버전으로 국내에 번역됐고 오랫동안 유통됐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이야 완역본이 나와있긴 하지만 다들 읽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완역본을 본 사람이 생각보다 적은 것 같다. 

 

걸리버는 소인국, 거인국 뿐 아니라 하늘에 떠 있는 섬 라퓨타와 말의 나라까지 여행해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곳곳에 정치적·사회적 비판 메시지가 강렬하다. 걸리버가 여행하는 곳 사람들이나 생명체의 입을 통해 당시 영국사회를 비판하는 건데 이 책이 18세기에 쓰여진 것임에도 지금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상황은 너무나 비슷하고 그 당시의 부조리 역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놀람과 답답함을 안겨준다. 특히 4부 ‘말의 나라’는 엄청나다. ‘야후’는 말 종족인 휴이넘이 지배하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생물체인데 흉측하고 야만적이고 미개하다. 휴이넘 입장에선 인간 역시 야후에 포함된다. 걸리버도 야후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주인 휴이넘에게 자신의 고국 영국과 그곳에 살고 있는 야후들을 설명한다. 그부분은 엄청나게 냉소적이고 신랄하다.


영화 <걸리버 여행기> 중 /네이버 영화


 

다음은 책에서 밑줄쳐 놓은 부분들이다. 거인국에 간 걸리버가 자신이 살던 곳, 즉 영국의 정치체제에 대해 설명하자 왕은 주의 깊게 들은 뒤 상세하게 물어본다. 

 

“나의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왕은 자기가 적어놓은 것을 참조하면서, 의심되는 점에 대해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했다./중략/ 하원의원들은 어떻게 해서 선출되는지, 돈을 많이 가진 자가 그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인재를 제치고서 돈으로 당선되는 일은 없는지, 하원의원이 되려면 돈이 많이 들고 당선되기도 힘들고 집안이 힘들고 집안이 파산할 수도 있고 월급도 없고 연금도 없다고 했는데 그들이 왜 하원의원이 되려고 기를 쓰는지 물었다. 그처럼 의원이 되려고 열을 낸느 사람들이 일단 당선되면 대중의 이익은 접어두고 왕의 비위에 영합하는데 안달이 나고 부패한 관리들과 결탁하여 선거로 인해 들어갔던 돈이나 노고를 되찾으려고 혈안이 되지는 않는지도 알려고 했다.”


“주인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개시하게 되는 원인이나 동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은 여러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그 중에서 중요한 몇가지만 예를 들어주었다. 때때로 야망이 드센 군주들은 자기가 통치하는 땅과 국민이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때로는 부패한 관리들이 그들의 사악한 통치로 인해서 발생하는 국민들의 소란을 제지하거나 달래려고 국왕을 충동하여 전쟁을 일으킨다고 했다.”


다음은 주인 휴이넘에게 군인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군인이라는 신분은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직업으로 간주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군인이란 자기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같은 종족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죽이도록 훈련된 야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법률가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도 신랄하다. 우선 변호사다.  


“저희한테는 한 무리의 인간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네들이 받는 보수의 액수에 따라서 흰 것을 검다고 하고 검은 것을 희다고 증언하는데 그들은 그런 훈련이 잘 되어 있습니다. 예를들어 저의 이웃집 사람이 저의 암소를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암소가 자기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려고 변호사를 고용합니다. 그러면 저도 제 것을 지키려고 변호사를 고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건을 맡은 판사들은 재산 소유권에 대한 분쟁 뿐 아니라 형사 재판도 판결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이고, 재간은 있지만 나이 들고 게으른 사람들 중에서 선발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평생동안 진실이나 정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 사기나 위증을 두둔하는 버릇에 빠져 있습니다. 그 판사들 사이에는 전에 한번 했던 판결은 합법적으로 다시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상식적인 판단이나 사리에 맞는 판단에 위배되어 내려진 모든 판결에 대해서 꼼꼼하게 기록해둡니다. 그리고 그것을 판례라는 명목으로 이용해서 사리에 맞지 않는 판결을 합니다.”


“변호사들은 변론을 하는데 사건의 옳고 그름의 핵심은 교묘하게 피해버리고 핵심과는 별로 연관이 없는 사소한 것을 따지는데는 요란스럽습니다. 그러고는 사건을 10년, 20년, 30년 연기하면서 질질 끕니다. 또 알아두셔야 할 점은, 그들 집단에는 그들끼리만 통하는 용어와 은어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고 모든 법률은 그런 용어로 서술되어 있고 그런 법률 분량을 될 수 있는 한 늘린다는 겁니다.”


“나는 우선 돈이란 것에 대해서 설명해야만 했다. /중략/ 돈만 있으면 그런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야후들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쓰기에 족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의 타고난 기질이 탐욕스러운지 아니면 낭비벽이 있는지에 따라서 돈을 무한히 모으거나 써버린다고 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고생한 대가를 먹게 되는데 가난한 야후 1000명에 부자는 한명 정도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야후들 대부분은 다만 몇명을 잘살게 해주려고 적은 임금을 받고서 매일 고된 일을 하며 비참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자세히 해주었지만 주인은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랜 항해끝에 영국으로 돌아온 걸리버는 인간에 대한 환멸만 남은 상태라 여생을 말하고만 소통하면서 보내는, 어찌보면 암울한 결말이다. 결코 환상적인 꿈과 모험의 어린이용 동화가 아니라 처절한 풍자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