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선 웬만한 세계 각국의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일본, 이탈리아, 중국식이야 거의 한식 수준으로 흔한 편이고 프랑스식도 꽤 많다. 인도, 스페인, 그리스, 멕시코, 터키, 그리스 식당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아랍권과 최근에는 남미권 음식을 요리하는 곳들도 제법 있다. 그런데 국교를 맺은지도 꽤 됐고 규모나 파워를 고려했을 때 러시아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나라지만 이상하게 음식문화는 국내에 많이 소개돼 있지 않다. 대중적으로 러시아 식음료하면 보드카 정도를 떠올릴지 몰라도 그 외엔 딱히 꼽을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대중화된 러시아 식당도 여지껏 없을테고.
책을 읽으면서 식욕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을 읽을 때 음식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를 반복적으로 보면서 음식맛을 상상하는 것을 즐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던 시절부터 책에 나오는 하얀빵이 먹고 싶어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러시아 소설 속에 묘사되거나 등장하는 음식은 그닥 식욕이 당기지는 않았다. 그저 어떤 맛일까 궁금하긴 했으나 먹고 싶어 못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다른 책에서처럼 못참을 정도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맛을 봤겠지만 책에 묘사된 러시아 음식은 기후나 토양처럼 척박하고 푸석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러시아 음식의 백과사전이라는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에도 무수한 음식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식욕이 자극되는 음식은 찾기 힘들었다.
그래도 꼭 한번은 맛보고 싶었던 것이 크바스였다. 크바스는 체호프나 톨스토이와 같은 러시아 작가의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음료다. <안나 카레니나>, <부활>, <전쟁과 평화>와 같은 톨스토이의 대표작에는 크바스를 마시는 사람이 꽤 많이 나온다. 물론 엄청 맛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주로 서민들이 마시는 음료다. 노인이 썩은 이빨을 활짝 드러내 웃으며 크바스를 마신다고 말하거나, 누더기로 입구를 막은 크바스 병을 들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식사는 뭘로 하십니까?” “뭘로 하느냐고요? 우리가 먹는 건 고급이죠. 우선 빵과 크바스, 그 다음엔 크바스와 빵이죠.” 노파는 반쯤 썩은 이를 보이며 말했다. 톨스토이 <부활>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도 크바스가 나온다. 남편 세묜이 가죽을 사야 할 돈을 홀라당 술마셔 날려 버린 것도 모자라 낯선 청년에게 자기 외투를 입혀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하자 아내인 마트료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다. 하지만 남편이 데려온 청년의 얼굴을 보고 가엾게 느껴져 마음이 누그러진 마트료나는 저녁 식사로 크바스와 빵을 대접한다.
해당 책에 붙은 설명을 보면 크바스를 두고 보리를 발효시킨 무알콜 음료라는 이야기도 있고, 호밀로 만든 맥주와 비슷한 술이라고 하기도 한다.
코트라 모스크바 무역관에서 2015년 7월 발간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돼 있다.
공산주의의 콜라. 보드카와 함께 러시아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전통 음료. 호밀과 발효된 빵으로 제조되고 과일이 함유된 혼합음료로 쌉싸름한 맛과 청량감이 일품. 젖산과 알콜을 사용해 두 번 발효시키는 전통적 기술로 제조.
고대, 중세시대에는 음료수보다는 약으로 복용. 특히 겨울이 긴 러시아 기후 특성상 비타민 C 부족으로 생기는 괴혈병 예방을 위해 자주 마심.
주요 러시아 크바스 생산기업으로 아차코바, 제까, 펩시코, 발티카 등이 있음.
드럼통에 크바스를 싣고 나와 길거리에서 판매하는 경우가 대다수.
크바스는 러시아 뿐 아니라 과거 소련의 구성원이었던 우크라이나, 백러시아와 같은 동유럽권에도 많이 퍼져 있는 전통 음료다. 아무튼 이 궁금한 음료를 맛볼 기회가 좀체 없다가 드디어 기회를 만나게 됐다. 지난 5월 27일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정교회 성당(성 니콜라스 주교좌 대성당). 이곳에서 열린 동유럽 음식 바자회에서다. 성당 근처에 사는 회사 후배의 소개로 함께 가게 된 이 바자회는 정교회 신자들이 각자 고국의 전통 음식을 준비해 와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행사인데 봄·가을로 열리며 올해로 몇년째를 이어온다고 했다.
이 행사에 참가한 나라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불가리아, 우즈베키스탄, 루마니아, 세르비아, 그리스 등이었다. 생소하고 낯선 동유럽 음식들을 살피고 맛보려는 인파들이 꽤 몰렸다. 한쪽 끝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우즈베키스탄이 함께 있는 부스에 갔더니 ‘크바스’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한 컵에 2000원. 우리식 술통 같은 플라스틱 통에 담아 한 컵씩 팔고 있었다. 잔뜩 기대감을 갖고 맛을 봤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던가보다. 마치 술 지게미가 헤엄치고 지난간 듯한 약한 알콜의 느낌과 낯선 향취의 밍밍한 맛이 뒤섞였다고나 할까. 음료가 차갑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아님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몰라도 책에서 봤던 사람들의 반응을 흉내내보려던 의도가 바로 무산됐다. 역하다거나 이상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어떤 인상이 남는 것도 아니다. 아마 현지에서 제대로 된 환경에서 마셨다면 달랐을까. 무척 아쉬웠다.
크바스는 내 기대와는 달랐지만 그래도 이날 바자회에서 맛본 음식은 대체로 맛있었고 행사 자체도 흥미로웠다. 초창기엔 교회 신자만 참여하는 작은 규모였다는데 어느새 입소문이 났는지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생소한 동유럽 음식을 맛보고 즐겼다. 이날 불가리아는 스타 셰프 미카엘이 직접 전통 소시지를 굽고 서빙을 해줬다. 그 때문에 사진을 함께 찍겠다는 사람들이 몰렸을 뿐 아니라 음식도 제일 먼저 동이 났다.
이날 판매된 음식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 고기와 페타치즈 파이, 루마니아는 양파 & 갈릭소스로 만든 콩파스타와 미트볼을 전통음식으로 내놨다. 한때 같은 나라였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우즈베키스탄은 한꺼번에 상을 차렸다. 구 소련권 국가들이 이날 내놓은 전통음식은 앞서 말한 크바스 외에 샤슬릭이라고 불리는 고기 꼬치, 러시아식 고기 양배추 말이인 골룹지, 양배추랑 버섯이 든 러시아식 만두 바레니키, 고기를 넣어 구운 파이의 일종인 삼사, 필라프라고 하는 볶음밥 플로브, 러시아식 차가운 수프(우리 냉국이랑 비슷) 등이었다. 올 가을에도 이 음식 바자회는 정교회 성당에서 열린다. 놓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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