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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과 탐식

진관사에서 밥을 먹다

by 신사임당 2017. 10. 26.

 

서울 은평구 진관사는 사찰음식의 본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 근사한 사찰음식을 먹을 기회를 최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진관사는 주말마다 등산객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제공하는데 대중을 상대로 하다보니 산채비빔밥처럼 간단한 음식들이다. 이것도 맛있다.

지난 19일 퇴임을 앞둔 총무원장 자승스님과 오찬이 이곳에서 있었다.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꽤 많은 가짓수의 반찬을 골고루 맛볼 수 있었다. 진관사 하면 르네 레드제피나 오바마 대통령의 전속셰프 등 요리계의 셀러브리티들이 한국에 오면 반드시 찾는 곳으로 소문난 곳이다. 그래서 미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한다.

여기서 뭘 먹냐고? 무슨 메뉴가 있냐고? 그냥 밥과 반찬들이다. 늘 그 계절에 나오는 좋은 식재료를 가지고 만들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 메뉴가 다르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게 잘 지은 밥, 오래 묵은 된장과 간장, 간수를 뺀 단 맛 나는 소금으로 간을 한 반찬들은 언제 가도 변함이 없다.

진관사 장독대

 

식탁에 가지런히 차려진 반찬들은 한눈에도 엄청난 손길과 정성이 쏟아부어져 있다. 누군 음식이 나오면 가장 먼저 사진을 찍어 그 순간의 감흥을 남기지만 난 보는 순간 모든 이성이 마비되어 침을 흘리는 인간인지라  강렬한 유혹을 억제하고 쥔 이성의 끈으로 겨우 몇장을 건질 수 있었다. 이것 말고도 송이 구이, 버섯 만두, 두부와 무조림, 각종 장조림과 나물이 나왔지만 못 찍었다. ㅠㅠ

기본 밑반찬으로 차려진 반찬들이다. 맨 왼쪽 위는 가죽나물 무침. 가죽은 산사에서 주로 먹으면서 여염집에서도 먹게 된 나물인데 쌉쌀하고 깔끔한 뒷 맛이 입맛을 돋워준다. 왼쪽 아래 깻잎은 싱싱하게 숨이 살아 있는 잎 위에 배와 겨자(인것으로 추정됨) 따위로 만든 소스를 얹었는데 역시 맛이 기가 막혔다.

 

그런데 이중 특히 눈여겨 봐야 하는 그릇이 있다. 오른쪽 끝에 있는 그릇. 바로 이거다. 다시마와 미역부각, 가죽부각, 포테이토칩을 한데 담아놓은 것이다. 여기서 이 포테이토칩. 진리다. 얇게 잘라 튀겨낸 이 감자칩은 생감자의 담백하고 구수한 맛을 그대로 풍겨내면서 바삭하고 깔끔한 식감을 자랑한다. 기름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음식을 만든 스님은 감자를 잘라 튀겨내서 키친타올에 올려 기름을 뺐다고 하시는데 그렇게 할 경우 식은 기름내가 진동하고 몹시 눅눅해진다. 스님들이 주전부리용으로 드신다는 이 감자칩 만드는 방법을 반드시 배우고 싶다. 참고로 진관사에는 사찰음식 수강 프로그램이 있다. 

그리고 또 이것. 바로 가죽부각이다. 가죽을 잘 말려서 찹쌀등을 살짝 입힌 뒤 튀겨낸 것인데 앞서 말한 가죽 무침보다 쌉쌀한 맛이 훨씬 강하다. 주변을 정화시켜주는 듯한 특유의 진한 향은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법한데 가끔 생각날 듯한 맛이다. 불교신자로 알려진 리처드 기어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곳 진관사에 와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때 리처드 기어를 홀딱 반하게 했던 것이 바로 이 가죽부각이라고 한다.

진관사가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활용하는 함월당이다. 

 

밥과 함께 나오는 반찬들. 이렇게 멋없게 찍기도 힘들듯. ㅠㅠ

그리고 후식이다. 여기서 반전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커피다. ㅋㅋㅋ.  케냐 AA라는 스님의 설명에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찰음식 마무리 하면 녹차나 보이차가 자연스럽게 따라나올 것 같은 분위기인데 커피가 나와서 말이다. 하긴 요즘은 스님들 중에서도 커피로 수양을 하시는 분들이 꽤 많다. 바리스타인 스님들도 꽤 계시고. 
견과류 강정, 그리고 과일. 여기 나온 이 청포도는 전혀 신 맛이 없고, 그렇다고 속 아리게 달지도 않은, 상큼하고 은은한 단맛을 내는 포도인데 품종을 당췌 모르겠다.

 

진관사는 비구니 도량이다. 즉 비구니스님만 계시는 곳이다. 이곳 주지스님인 계호스님은 사찰음식 명장이다. 스님은 손에서도 기가 나오기 때문에 음식을 할 때 비닐장갑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그래서 그 스님 손을 한 30초간 욕심껏 잡고 버텨봤다. 혹시나 그 기가 나에게도 옮겨올까 싶어서. 나의 그 뻘짓에 스님은 "이 기는 손으로 옮겨진다"면서 덕담을 해주신다. 

진관사는 어떻게 사찰음식의 명가가 됐을까. 예전의 고승들 역시 진관사 음식을 높이 칭송했다. 진관사의 음식 명성은 조선 태조때부터 600년간 봉행해 온 수륙재에 힘입은 바 크다. 조포사이기도 했던 진관사는 수륙재를 봉행하면서 온갖 제례음식을 책임졌다. 국가가 보증한 맛의 명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근대에 와서 진관사가 오늘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진관스님의 영향이 크다. 지난해 입적한 진관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불탄 진관사 주지를 맡았다. 불사를 통해 진관사를 대표적인 비구니 사찰로 키웠으며 자연의 가르침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철학을 담은 사찰음식을 발전시켰다. 총무원을 찾는 손님들, 수없이 많은 불교계의 크고 작은 행사들, 한국 불교 문화와 관련된 모든 행사 음식을 거의 진관사가 맡으면서 현재 세계 미식계에서도 반드시 방문해야할 곳으로 굳어졌다.

진관스님을 이어 주지를 맡고 있는 계호스님은 진관사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 대중화하는데 열심을 내고 계시는 분이다. 1960년대 말부터 이곳에서 행자생활을 한 계호스님 역시 진관사의 역사를 꿰고 있다. 계호스님을 돕는 도반이기도 한 법해스님(진관사 총무)도 마찬가지다. 스님의 유쾌하고 밝은 미소는 산사의 공기만큼이나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밥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스님은 언제든지 와서 하룻밤 자고 쉬다 가라 하신다. 이곳에서 하룻밤 쉬면서 스님이 만들어주신 찌개에 밥한그릇 뚝딱 먹고 나면 지친 몸과 마음이 새것처럼 살아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