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적인 공연장은 천장이 볼록볼록 튀어나와 있어요. 소리를 골고루, 명징하게 퍼뜨려야 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장중함이 필요한 종교 공간은 천장이 오목하게 들어가 있어 4초까지 이어지는 긴 잔향을 남깁니다. 그런데 이곳은 종교적 공간이면서도 음향적으로 콘서트홀과 비슷해 음악회에 아주 좋은 장소입니다. 성당이 그 자체로 악기가 되어 공명하며 어우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곡을 들어보실까요.”
건축가 황두진의 설명이 끝나자 이어진 곡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피치카토 폴카’. 손으로 현을 뜯는 피치카토 기법으로 연주하는 곡이라 섬세하고 명징한 잔향이 성당내부에 유쾌하게 흩어진다.
■악기와 건물이 함께 연주한다
지난 18일 밤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하 성공회성당)에선 특별한 음악회가 열렸다. 서울시향 단원들과 건축문화재로서의 성당이 함께 연주한시간이었다. 음향이 훌륭하고 시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연주공간을 열망해 온 서울시향에게 성공회 성당은 더할나위 없는 파트너였고 서로의 존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주제는 ‘음악과 건축의 동행’이다.
연주목록은 음악과 건축의 연계성을 상징하도록 공들여 선곡됐다. 성당 뒤편에 자리잡은 파이프오르간에선 시원한 물줄기처럼 헨델의 ‘수상음악’이 쏟아져 나왔으며 바흐 ‘음악의 헌정 중 캐논’은 건축물의 정교한 대칭과 비례를 보여줬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의 모티브를 차용해 도종환의 시에 작곡가 이건용이 곡을 붙인 ‘혼자 사랑’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한국 전통 방식이 조화를 이룬 성당의 외관을 음악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도심 속 비밀의 화원
성공회성당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지만 빌딩 숲에 가려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광화문을 향해 쭉 뻗은 세종대로에서 왼쪽편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따라 들어오면 만나게 되는 이곳은 수백년의 시공간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이색적이지만 낯설지 않고, 넉넉한 안온함에 기댈 수 있는 휴식처다. 붉은 빛 벽돌과 회색의 화강암 위로는 기와가 얹혔다. 십자가를 눕혀 놓은 형태인 성당은 서울시 유형문화재(35호)이자 대한민국 등록문화재(676호)다. 꼭 100년전인 1917년 영국의 건축가 아더 딕슨이 설계를 시작했다. 이날 공개된 아더 딕슨의 설계노트에는 한옥의 다양한 띠살창이 그려져 있고 ‘코리안 윈도우’라는 메모가 씌여 있어 그가 한국 전통을 녹여내려 애썼음을 알 수 있다. 성당은 1922년 착공했다. 하지만 설계도면대로 완공할 수 없었다. 자금문제 때문에 1926년 미완의 상태로 마무리했다. 아더 딕슨은 “우리가 이렇게 시작하면 언젠가 한국 교회가 완성할 것”이라며 아쉬움을 달랬다.
■시공을 넘어선 기적
성당이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된 것은 1996년이다. 성공회는 70여년만에 증축을 추진하며 건축가 김원에게 이 작업을 맡겼다. 성당의 원래 설계도를 찾을 수 없던터라 김원은 미완성된 건축물의 취지를 최대한 구현할 수 있도록 새로운 설계를 시작했다. 건축가 황두진은 “하지만 그 즈음 기적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아더 딕슨이 사망 직전 자신의 설계도면과 유품을 한 도서관에 기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극적으로 발견된 설계도는 김원에게 전달됐다. 덕분에 원작자의 의도는 후세의 건축가에 의해 오롯이 구현될 수 있었다.
■시대와 호흡하는 교회
성당 뒤편 사제관 입구에는 작은 기념비가 놓여 있다. ‘유월민주항쟁진원지’. 1987년 6월10일 이곳에서는 4·13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미사가 집전됐고 성당의 종이 42차례 울렸다. 분단과 독재 42년을 종식하자는 의미이자 6월 민주화 항쟁 시작의 선언이었다. 앞서 1960년 4·19 혁명 당시에도 이곳은 시위의 중심지가 됐다.
격동의 역사를 함께 해 온 이 성당은 평소에도 시민들에게 개방된 휴식공간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커피 한잔을 들고 성당 정원에 놓인 벤치 곳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근처 직장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해마다 봄·가을에는 매주 수요일마다 정오 음악회도 열린다. 이경호 주교는 “전례적 예배 공간이자 아름다운 음악과 쉼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소중한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퇴근길 토크 콘서트’라는 타이틀로 마련된 이날 음악회는 서울시향과 성공회의 첫 협업이었다. 이달 초 공연 소식이 알려지면서 400석 좌석이 빠르게 매진됐고 표를 구하지 못한 이들은 선 채로 관람했다. 공연 직후에도 호평이 이어졌다. 서울시향과 성공회는 오는 12월 28일 두번째 음악회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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