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이야 흔히들 갖고 있는 것이지만 나의 경우는 단순한 식탐을 넘어서, 뭔가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이다. 한번 꽂힌 음식은 반드시 먹어야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묘사된 음식 중 유독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반드시 그걸 먹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더 어릴 때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내게 남아 있는 최초의 기억은 흰 빵이었다. 아마도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당시 금성출판사에서 나왔던 <칼라텔레비전>이라는 명작동화전집에 있던 안데르센 동화의 한 챕터 성냥팔이 소녀. 잠시 빵 이야기 전에 이 책을 이야기해야겠다. 집집마다 흑백텔레비전만 있던 시절, 이 책은 화려한 제목처럼 화려한 일러스트로 어린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었다.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지만 풍부한 색감과 등장인물의 세밀한 표정은 마치 실사영화를 보는 듯 책 속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덕분에 이야기 하나하나가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생생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는 추운 겨울에 어린 소녀가 밖에서 성냥을 팔며 고생을 한다는 사실에도 마음 아팠지만 음식이 가득 차려진 따뜻한 집안을 들여다보는 장면에서 감정이 폭발했다. 그 그림에 그려진 하얀 빵 덩어리가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그 빵은 요즘으로 따지면 자르기 전의 식빵 덩어리 형태로 먹음직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이니 그런 빵을 어디서 구했겠나. 몇날 며칠간을 빵 생각으로 뒤척였을 뿐이다.
흰빵하면 지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찐빵이나 호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빵에 대한 아픈 기억이 짜르르 다시 떠오른 것은 초등학교 2, 3학년 때였다.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의 ‘알프스 소녀 하이디’. 산골에서 검은 빵만 먹었던 하이디가 프랑크푸르트의 클라라네 집으로 왔을 때 처음 맛 본 흰 빵. 그 빵을 보면서 하이디는 산골에 있는, 늘 검은 빵만 먹는 할아버지와 페터 할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매번 식탁에 올라오는 빵을 챙겨둔다. 그 순간 나는 책을 엎어두고 떨쳐 일어났다. 주머니에 있는 백원짜리 동전을 확인하고는 눈이 내리는 집 밖으로 나갔다. 하이디가 먹었던 그 흰 빵을 어디서 먹어야 하나.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건너편 구멍가게 앞에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던 호빵 찜통이었다. 하얗고 둥근 호빵을 산 나는 눈이 내리는 길 위에 서서 호빵의 하얀 껍질을 벗기면서 조금씩 조금씩 하이디가 느꼈던 맛을 음미했다. 그 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그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흰 빵과 검은 빵. 동화책 속에 나오는 이 빵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빵이 주식이던 유럽에서 색깔에 의한 빵의 분류는 지극히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흰 빵을 먹는지, 검은 빵을 먹는지는 경제적인 요인이 아닌, 신분과 지위에 의해 결정됐다. 유럽의 식문화 역사를 다룬 책들을 보면 이같은 내용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검은 빵의 대명사격인 호밀빵 /출처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언론인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가 쓴 <맛의 천재>라는 책에도 이 부분이 언급돼 있다. 빵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도시에서 먹는 하얀 밀가루 빵, 시골에서 먹는 어두운 색의 잡곡 빵이다. “흑색에서 백색까지 명도와 색상을 달리하는 빵의 다양한 종류와 질에도 서열이 있었고 이것이 곧 사회계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빵에 서열을 매겨 차별하는 문화는 상당히 오랫동안 뿌리박혀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그는 썼다. 그 시절엔 의사나 과학자들이 농민들은 흰 빵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이유는 고급 음식에 농민들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귀족들 역시 검고 딱딱한 빵을 소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전통과 문화 때문인지 오랫동안 잡곡들은 열등한 곡식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영양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층민들의 주식으로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수수나 귀리, 조, 기장, 보리, 통보리 등은 과거부터 농민이나 하층민, 혹은 가축들이 먹었다. 그런 전통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은 상류층의 것이고 거무튀튀한 꽁보리밥이나 조, 수수, 기장, 콩을 잔뜩 넣은 밥은 서민들의 그것이었다.
하얀 쌀밥, 하얀 빵. 이런 식품들은 부의 상징이었으나 지금은 정 반대다. 산업적으로 대량 생산되는 흰 식품, 즉 밀가루나 쌀, 설탕, 소금 등등은 건강에 좋지 않은, 싸구려 음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 월마트 등 대형 할인점에 쌓여 있는, 값싼 흰 식빵은 중산층은 더 이상 찾지 않는, 돈 없는 서민들이나 카트에 집어 넣는 상품이 되었다. 실제 주변에서도 마트에서 파는 흰 식빵을 사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좀 더 비싸더라도 다양한 곡물이 들어간 식빵이나 아니면 식빵 전문점을 찾는다.
독일 베스트팔렌 지역에서 주로 만들어 먹던 거친 호밀빵 품퍼니켈 브레드/ 출처 위키피디아
빵 색깔이 가진 정치적 의미와 관련해 재미있는 또 다른 책이 생각난다. 일본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가 쓴 푸드에세이 <부드러운 양상추>에 소개됐던 내용 중 수지 로톨로가 썼던 <그리니치 빌리지의 청춘>이라는 책이 있다. 참고로 수지 로톨로는 밥 딜런의 앨범 <더 프리휠링> 표지에 딜런과 나란히 팔짱을 끼고 걷는 여성이다. 미국이 쿠바 도항 금지를 결정한 후에 쿠바를 여행하면서 썼던 수지 로톨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체 게바라와 농업계획부 장관은 국민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흰 쌀을 공급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흰 밀가루, 흰 쌀, 흰 빵은 풍요의 상징이라 빈곤과 연결되는 갈색 밀가루나 쌀로 교체하기에는 심리적 의미에서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고뇌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만큼 빵의 색깔이 가진 정치적, 역사적 의미가 강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 역시 체 게바라가 염려한 것은 국민의 건강보다는 정신과 자긍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흰 식빵 /출처 위키피디아
이같은 배경 때문에 많은 소설에서 검고 딱딱한 빵과 부드럽고 하얀 빵은 그 자체만으로 다양한 상징을 함의하고 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도 장발장은 코제트에게 검은 빵을 먹이지 않으려고 자신도 함께 흰 빵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빵이 검은 것은 대맥, 즉 보리나 호밀, 그리고 각종 잡곡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영양학적으로 잡곡이 들어간 빵이 뛰어나다는 판단 때문에 건강빵으로 사랑받는다. 프랑스의 시골빵이라 불리는 캉파뉴는 호밀로 만든 빵이다. 바게트 이전부터 오랫동안 서민들의 빵으로 사랑받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