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푸짐하게 먹고 싶을 때 가는 광화문 근처의 한식집이 있다. 남도식으로 이것저것 반찬이 잘 나오는 편이다. 고기찜과 생선구이, 각종 나물 무침에 김치까지 대부분 접시가 비는데 유독 사람들 손이 안 가는 반찬이 있다. 가지무침이다. 올 때마다 그렇다. 다른 식당에 갈 때도 가지 반찬은 대부분 찬밥신세다. 밑반찬으로 나온 가지를 발견하곤 심지어 짜증을 내는 일행도 있었다.
동네 슈퍼마켓 매니저로 일하는 분에게서 여러 채소 중 제일 적게 들여놓는 품목이 가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흔하고 싼 채소임에도 많이 팔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우리집이나 이웃집은 물론이고 친구들 도시락 반찬통에서도 가지를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요리법이래야 고작 무침이나 볶음 정도로 뻔한데다 그 물컹한 식감 역시 매력적이지 않다. 아, 생각만 해도 싫다. 그렇다고 쌈채소처럼 생으로 먹기도 어색하다. 예전에 한번 시도해 본 적 있었는데 거북함에 바로 포기했다.
신경숙의 소설 <종소리>에는 희귀거식증에 걸려 죽어가는 남편과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모성의 마음으로 대하는 아내가 나온다. 여기 등장하는 남편은 거식증에 걸리기 전 식성이 좋았다. 그의 좋았던 식성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소재는 바로, 가지다. 가지를 삶아 찢어 무친 것도 거침없이 잘 먹던 남편이었지만 병에 걸린 뒤 온갖 정성을 다한 음식을 해줘도 식욕을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만큼 가지는 별 볼일 없거나, 군침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시칠리아 한 가지농장에서 수확한 가지를 박스에 담아 놓은 모습
40년 넘게 느끼지 못했던 가지의 존재감을 느꼈던 것은 지난해 가을 시칠리아 출장에서였다. 가는 집마다 가지 ‘반찬’이 나왔다. 토마토나 올리브야 이들에게 우리식 김치라고 할만한 음식이겠지만 가지도 그에 못지 않았다. 맛의 고장이라는 시칠리아 아닌가. 게다가 머나먼 곳에서 찾아간 손님맞이 요리를 어떻게 내올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첫 방문한 집에서부터 주방 싱크대에 올려져 있는 가지 ‘박스’를 보고 좀 실망했다.
이탈리아 가지는 국내에서 자주 보는 가지와 모양이 좀 다르다. 우리나라는 통통한 오이처럼 길쭉한 편인데 이탈리아 가지는 타조알같이 둥글둥글했다. 검은듯한 보라색, 진한 보라색, 연한 보라색에 흰색도 있었다. 모양이나 색깔은 이색적이라도 땡기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리아 할머니가 만들어 준 가지 구이
첫 방문지였던 마리아 할머니집에서 할머니가 내 온 것은 튀김옷을 입혀 황금빛이 나게 구운 가지구이였다. 할머니의 설명에 따라 가지를 잘라 소스에 찍어 먹는데 어라, 이건 좀 다른 식감이었다. 일식집에서 나오는 고구마 튀김과 비슷하기도 하고 아무튼 가지라고 의식할 수 없는 맛이었다. 먹다보니 넓적한 접시의 절반을 해치우고 있었다. ‘꼬똘레 떼 디 멜란자네’ 라는 이름의 시칠리아 전통요리라고 했다.
그날 저녁에 갔던 스텔라 아줌마네 집에서는 더 놀랐다. 언뜻 완자튀김처럼 생긴 음식이 나왔다. 굴을 갈아 넣은 것 같기도 하고 닭고기를 갈아넣은 것 같기도 한 식감의 담백한 튀김. 그런데 그 튀김에 들어간 주 재료는 가지였다. 이름하여 뽈뻬떼 디 멜란자네(polpette di melanzane). 즉 가지 미트볼이라는 말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후로도 다섯 집을 더 방문했고 갈 때마다 각양 각색의 가지 ‘반찬’이 나왔는데 하나같이 새로웠다. 도대체 가지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나 싶게 말이다.
이곳에선 왜 이렇게 가지를 많이 먹게 됐을까. 고대 그리스를 시작으로 지중해 패권을 잡았던 모든 문명권이 머물렀던 시칠리아는 문명의 용광로같은 곳이다. 음식문화가 발달한 것도 유럽 지역에서 가장 빨리 외부의 식재료를 접할 수 있었고 다양한 요리법이 섞였기 때문이다. 가지는 아랍에 의해 시칠리아에 전해졌다. 재배가 쉽고 어디서나 잘 자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다양한 채소를 제쳐두고 가지를 집집마다 많이 먹는 것은 딱히 설명이 안된다. 이곳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옛날부터,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많이 먹었다고 한다. 항상 쉽게 구할 수 있고 맛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계속 이해는 안됐다.
가지를 얇게 썰어 토마토소스로 버무린 스파게티를 넣어 말아 먹는다. 이것도 정말 별미다.
가이드를 해준 마테오 미아노의 설명은 이랬다. 이탈리아 남부지역과 시칠리아는 예로부터 가난한 곳이었다. 지금도 시칠리아 엔나주는 이탈리아 전체 기초단체에서 모든 경제지표가 가장 낮은, 최빈 지자체란다. 이렇게 가난한 곳에선 자연히 고기를 구하기 힘들었을터다. 그래서 그 대신으로 가지를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가지로 만든 미트볼
이게 말이 되나. 지록위마도 아니고, 가지를 고기라고 하다니, 그게 어디 속을 맛인가. 그런데 희한했다. 앞서 말했던 가지미트볼처럼 고기를 갈아낸 맛이 났다. 파르미지아나(parmiggiana)라는 시칠리아 전통요리도 마찬가지다. 넓적하게 잘라 기름에 노릇하게 구워낸 가지 위에 삶은 달걀을 얇게 썬 것을 깔고 치즈를 두툼하게 올려 오븐에 구운 것이다. 재료 층마다 토마토 소스를 발라준다. 이것 역시 고기로 둔갑한 가지가 자리잡고 앉아 입맛을 한껏 돋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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