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스파라거스 디너를 맛보다
봄이 절정을 이루는 5월. 전 세계에서 독일 사람들의 섭취량이 가장 많은 식품이 있다. 소시지? 맥주? 둘 다 아니다. 아스파라거스다. 독일어로 스파겔(spargel)이라고 하는 아스파라거스는 독일인들에게 봄을 알리는 전령사다. 해마다 독일에선 4월 중순이면 아스파라거스 수확이 시작돼 6월 중하순까지 두 달 남짓 이어진다. 이 기간 동안 독일 전역에선 아스파라거스 수확을 축하하며 지역 단위의 축제를 열기도 하고 가정이나 식당에서는 아스파라거스를 집중적으로 먹는다. 독일 언론은 매년 수확철이면 아스파라거스에 관한 다양한 보도를 한다. 가격과 수확 조건, 재배 농부 인터뷰까지 다양하다. 유럽 지역 미디어에서는 독일인의 아스파라거스 사랑을 두고 열광이니 광란이니 하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다. 독일 맥도날드는 ‘스파겔 버거’까지 내놓았다. 흔히 아스파라거스 하면 스테이크에 가니시로 곁들여 먹는 것을 생각하게 마련이지만 이들에게 아스파라거스는 메인 요리다.
메인 요리로 나온 아스파라거스
지난 5월 19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는 독일인의 아스파라거스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한독상공회의소(마틴 행켈만 대표)가 주최한 ‘아스파라거스 디너’였다. 이 자리에는 미하엘 라이펜슈툴 주한 독일대사를 비롯해 홀가 게어만 포르쉐 코리아 대표 등 독일 기업인, 클레멘스 트레터 주한독일문화원장, 언론인 안톤 숄츠, 모델 스테파니 미초바에 이르기까지 180여 명의 독일인이 모였다. 독일의 봄을 떠올리며 고향의 맛을 음미한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대부분 들뜬 표정이었다. 그래봤자 아스파라거스일 뿐인데, 구하기 힘든 채소도 아닐진대 이런 거창한 디너를 여는 이유는 뭘까.
녹색 아스파라거스
의문은 곧 풀렸다. 이날 식탁에 오른 아스파라거스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스파라거스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양초처럼 두껍고 길쭉한 모양이었다. 색깔은 녹색이 아닌 노르스름한 빛이 도는 흰색이다. 독일인에게 전형적인 아스파라거스는 바로 이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다. 흰색 때문에 ‘하얀 금’, ‘식용 상아’로도 불리는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는 독일에서도 귀하게 취급받는 식재료다. 안톤 숄츠 기자는 “한국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채소이다 보니 매년 이맘때가 되면 독일 사람들은 아스파라거스를 많이 그리워한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수급이 쉽지 않은지라 한독상공회의소는 이번 디너를 위해 독일 라인란트 지역 농장에서 200㎏의 아스파라거스를 공수해왔다.
미하엘 라이펜슈툴 주한 독일대사(가운데)가 아스파라거스에 곁들일 감자를 덜어주고 있다.
판체타와 관자를 곁들인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랍스터와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로 끓인 수프, 시금치와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소고기로 속을 채운 라비올리가 연달아 나왔다. 함께 서빙된 와인은 슈타츠바인굿 바인스베르크 리슬링. 여기까지 맛을 봤을 때는 부재료로 섞여 있는지라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만의 오롯한 맛을 느끼기 쉽지 않았다. 메인 요리를 남겨두고는 어떤 요리가 나올지 궁금증이 솟구쳤다. 어떻게 먹길래, 어떤 맛이길래 이들은 마치 점심시간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신난 표정일까. 머릿속 한편에서 두꺼운 갈색빛 스테이크와 길쭉하고 큼직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가 조화롭게 놓여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데, 드디어 메인 요리 서빙이 시작됐다. 한쪽에선 환호와 함께 박수 소리마저 들렸다. 과연 어떤 요리길래.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는 햄과 감자를 곁들여 홀란다이즈 소스를 뿌려 먹는다
눈앞에 놓인 접시를 보니 좀 당황스러웠다. 통째로 삶은, 굵직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가 예닐곱 개 수북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말 그대로 ‘메인’. 이 많은 사람이 환호하며 몰려들게 한 이날 저녁의 주인공, ‘삶은 아스파라거스’다. 파슬리를 뿌린 감자찜, 돼지고기 햄, 홀란다이즈 소스, 브라운 버터 소스, 비네그레트 소스를 곁들일 수 있도록 함께 내놨다. 라이펜슈툴 대사는 같은 테이블에 앉은 손경식 경총 회장 부부에게 감자와 햄, 소스를 얹어주며 먹는 방법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주기도 했다.
맛을 보니 녹색 아스파라거스보다 수분감이 많고 부드러웠으며 달큰했다. 담백하고 깔끔한 뒷맛도 꽤 괜찮았다. 워낙 큼직한 아스파라거스인지라 3개까지 먹고 나니 더 먹기 힘들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신난 표정으로 접시를 깨끗이 비워냈다. 행켈만 대표는 “홀란다이즈 소스를 얹고 햄이나 커틀릿, 감자, 녹인 버터와 함께 먹는 것이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를 즐기는 가장 일반적이고 사랑받는 방법”이라며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수프나 샐러드로 먹는 정도일 뿐 다른 요리법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수년째 이 행사에 참여했던 그랜드 하얏트 김재환 셰프는 “일반적으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를 메인으로 요리하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독일은 이 같은 식문화가 오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샐러드나 가니시 재료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독일에서 들어온 아스파라거스는 웬만해선 보기 힘들 정도로 크고 신선해 늘 재미있고 신선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아스파라거스 디너에 나온 샐러드, 수프, 라비올리(왼쪽부터)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는 녹색 아스파라거스와 달리 땅속에서 햇빛을 받지 않고 자란다. 풍미가 좋고 영양소가 풍부해 독일이나 스위스, 프랑스 등지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섭취하는 규모나 열정에 있어서는 독일이 압도적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에서도 즐겼던 아스파라거스는 오랫동안 왕실이나 상류층이 즐기던 채소였다. 독일에서는 슈투트가르트 지역에서 재배되기 시작해 17세기 중반 이후 독일 전체로 퍼져갔다. 행켈만 대표는 “이때만 해도 녹색 아스파라거스를 주로 재배했고 화이트 아스파라거스가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라며 “브란덴부르크, 로베르작, 북라인 베스트팔렌주의 재배 면적이 가장 넓다”고 말했다.
독일에선 이 시즌이면 맛있는 아스파라거스를 맛보기 위해 농장을 순례하는 여행객들도 많다. 기계 수확이 가능한 녹색 아스파라거스와 달리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는 수작업을 해야 한다. 때문에 수확 철이면 폴란드,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 인근 국가에서 많은 노동자가 몰려온다.
수확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아스파라거스는 고대 로마인들에게는 양기를 돋워주는 음식, 혹은 최음제로까지 인식되었다. 성애 교본으로 잘 알려진 ‘카마수트라’에도 원기를 북돋워 주는 아스파라거스 레시피가 소개되어 있다. 음식사가들에 따르면 아스파라거스의 생김새가 이 같은 인식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독일 뿐 아니라 프랑스 등 유럽지역에서 신혼부부들에게 아스파라거스를 권하는 것도 이 같은 인식과 무관치 않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미식가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와인과 아스파라거스를 즐겼던 그는 마음에 두었던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스파라거스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처음으로 아스파라거스를 수확했습니다. 이 아스파라거스를 다른 것과 함께 섞지 말고 혼자만 드십시오. 그래야 아스파라거스에 대한 행복한 추억을 간직하게 될 테니까요. 제가 당신과 함께 이걸 먹는다면 최고의 맛집이 있을 텐데 오늘 점심때는 어떤지 말씀해 주십시오’(1776년 5월 19일)
‘아스파라거스와 함께 시작하는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는 잘 지내셨습니까’(1777년 5월 3일)
괴테가 마음을 담아 쓴 편지에 언급한 아스파라거스는 어떤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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