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9월25일자에 실렸던 함제도 신부님 기사.
올해로 여든 다섯인 이 분은 천사가 나이들면 이런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할만큼
맑은 분이셨다.
인터뷰가 일이 아닌 힐링의 시간이 되었던 신부님이다.
‘50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했던 신부, 그는 다시 그곳에 갈 수 있을까’
지난달 30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렸던 기사의 제목이다. 주인공은 제럴드 해먼드 신부(84). 그는 결핵환자 치료를 돕기 위해 20년 동안 북한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방문했다. 하지만 미 국무부가 지난 1일부터 미국인들의 북한여행을 금지했다. 해먼드 신부는 지난 5월에도 북한에 다녀왔다. 원래대로라면 오는 11월 북한에 가야 한다. 매 6개월마다 환자들에게 약과 식량을 전하고 병세도 살펴야해서다. 그는 “미국이 세계 어느 나라도 하지 않는, 인도적 지원 금지를 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고 비판했다. 이 기사는 그처럼 북한에서 인도적 활동을 해 온 미국인들의 우려를 담았다.
해먼드 신부는 메리놀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이다. 올해로 57년째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 ‘함제도’라는 이름으로 사목활동을 해 온 그는 대북지원 NGO 유진벨재단과 함께 북한 결핵환자를 돕고 있다. 지금까지 재단을 통해 치료받은 북한의 결핵 환자는 25만명에 이른다. 한번 갈 때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12개 거점을 돌며 1500~2000명의 환자를 만난다. 얼마전부터는 요양원 건립 준비도 시작했다. 지난달 세계 최대의 가톨릭 평신도 단체 ‘콜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으로부터 ‘기쁨과 희망’상(1992년 제정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신앙과 봉사를 실천한 개인에게 주는 상)을 받았다. 마더 테레사가 초대 수상자였으며 사제로 수상한 것은 그가 최초다. 상금 10만달러는 요양원을 짓는데 사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북미관계, 남북관계가 점점 얼어붙으면서 그의 걱정은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지난 19일 서울 중곡동 메리놀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에서 ‘함신부’를 만났다. 아기 천사가 나이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느낌의 그는 북한 방문 때 찍었던 사진을 잔뜩 꺼내놓고 있었다.
-이건 언제 찍은건가?
“지난 5월에 북한에 갔을 때다. 그때도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별 문제 없이 다녀왔다. 우린 오랫동안 분명한 목적을 갖고 활동을 해 왔다. 이번에도 새로운 환자들이 많았다. 떠나면서 11월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마음이 좋지 않다. 6개월마다 약을 갖다줘야 하는데….”
-방북 허가가 나길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이달 6일 미국 국무부에 방문 신청을 했다. 이달 말까지 답변을 준다고 하더라. 우선은 기다려야지. 그런데 그때까지 아무런 답변이 없다면 갈 생각이다. 가지 말라고 확답을 준 건 아니니까.”
-최악의 경우 못 갈 수도 있나.
“이건 인도적인 일이다. 정치나 종교를 떠나서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인간이라면 해야할 일이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길에서 교통사고 당해 죽어가는 사람 붙들고 종교가 뭐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 어떤 사상을 갖고 있냐 물어보고 돕지 않는다. ‘우리’가 보릿고개로 어려웠을 때 사람을 가려가며 도와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최소한의 도리다.”
-북한에 있는 환자들 생각이 많이 나겠다.
“요즘은 그 생각밖에 안난다. 며칠전에도 장상연합회 수녀님들을 만나서 그 기도를 부탁했다. 북한에선 다들 내가 오길 기다릴거다. 미국인에다 천주교 신부, 게다가 남한에서 살고 있는 내가 그들 입장에서 뭐가 그리 달가운 존재겠나. 하지만 지금껏 내가 갈 수 있었던 건 우리가 했던 일들이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쁨과 희망’상도 수상하시게 됐나.
“그건 좀 부끄럽긴 하다. 사제로서 당연한 일을 한건데, 상상도 못했다. 한국 신부님들도 나같은 조건이 된다면 누구나 갔을 거다.”
-처음 갔을 때가 1995년?
“1995년인지 1997년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 아무튼 매년 봄과 가을 2차례씩 갔다. 재미있는 건 호칭의 변화다. 처음에는 나를 함동무, 그다음엔 함동지 이렇게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신부선생이라고 하더라. 지금은 뭐라고 하는줄 아나? 할아버지라고 한다. 그래서 나도 ‘손자야’ 이렇게 부를 때도 있다.”
-신부님이 소속된 메리놀 외방선교회는 원래 북한과 인연이 깊었다.
“1923년 한국에 처음 진출하면서 평안도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니 그곳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할 곳이기도 하고. 모든 걸 떠나서 북한과 남한은 같은 핏줄이고 민족아닌가.”
-그런데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대화와 도움이 필요하다.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대화밖에 없다. 난 북한에 가서도, 이곳에서도 남북관계를 위해선 대화와 화해, 그것만이 평화를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갈라진 건 우리 뜻이 아니지 않았나. 그러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하고 소통해야 한다. 정치가 힘들다 해도 다른 면에서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고,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
함 신부의 방, 그리고 복도 곳곳엔 일제 강점기 시절 북한의 중강진성당, 신의주성당 등 현지 성당과 신부·신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인 그는 1960년 6월 사제서품을 받고 8월 한국에 왔다.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천주교 주교회의의장을 지냈던 장익 주교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 함 신부는 고등학교 급우로 장 주교를 만났다. 자연히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사제가 될 것을 서원하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낯선 나라 한국을 희망지로 지원했다. 이름도 제럴드 해먼드(Gerard Hammond)에서 음차한 ‘함제도’로 지었다.
조부모와 부모, 두 여동생들과 눈물을 흘리며 작별한 스물 다섯살 청년은 푸른 꿈이 가득한 가슴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배에 올랐다. 3주 뒤 알래스카, 시베리아, 홋카이도, 요코하마, 고베, 부산을 거쳐 인천 월미도에 도착했다.
-충청북도에서 30년을 지내셨다.
“한국에는 강릉 함씨가 있는데 나는 청주 함씨 시조다. 족보는 없지만(웃음). 처음 갔을 때는 한국인 신부가 한명도 없었다. 주교님 비서를 시작으로 북문로 본당, 수동본당, 괴산본당 등에 있었고 청주대와 공군사관학교에서 학생들도 가르쳤다. 실제 고향은 필라델피아지만 마음의 고향은 충청북도다. 몇년전 사제 서품 50주년을 기념해 청주에서 주교님이 축하식을 해주셨다. 그때 주교님께 청주 성직자 묘지에 자리 하나만 달라고 부탁드렸다. 앞으로 내 몸의 고향이 될 곳이기도 하다.”
-청주 수동본당은 사재를 털어 직접 지었다.
“조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내 앞으로 약간의 유산을 남겨주셨다. 1966년이었는데, 그땐 워낙 어려울 때 아니었나. 1972년 미국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다 수동본당에서 회갑잔치도 해드렸다. 그때 어머니가 TV를 주고 가셔서 사제관에 놓았다. 어느날인가 저녁 미사에 신자들이 자꾸 빠지더라. 왜 그런가 물어봤더니 <여로>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다들 모여서 그걸 보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그 때부터는 사제관에 모여서 드라마를 본 뒤 함께 미사를 드렸다.”
-신부님도 함께 보셨나.
“최고 인기 드라마였다. 정말 재미있었다. 신도들과 미사 드리고 드라마보고 노래도 많이 불렀다.”
-무슨 곡을 좋아하시나.
“내가 ‘국제 음치’다. 항상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불렀는데 첫 소절만 하고 나면 다같이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첫 소절밖에는 모른다. ‘아리랑’과 가곡 ‘보리밭’도 좋아했다. 어머니 회갑때도 ‘보리밭’을 불렀는데 어머니가 그 곡을 참 좋아하셨다. 뜻은 몰라도 그 느낌과 정서가 전달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하관식할 때도 그 노래 부르며 보내드렸다.”
-추억들이 정말 많겠다.
“어떻게 다 꼽을 수 있겠나. 한국말 배우고 문화에 적응하면서 별별 시행착오와 에피소드를 겪었다. 어떤 신자의 집에 갔는데 신부님 오셨다고 어찌나 군불을 세게 때던지…. 처음에 참다가 나중엔 ‘나 불고기 되겠다’며 벌떡 일어났었다. 지금도 청주에 가면 그런 옛날 이야기 하면서 웃는다. 처음 봤던 꼬마들 중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신자들도 많다.”
-한국에 같이 온 분들이 있었나.
“8명이 함께 와서 인천, 마산, 부산으로 다 흩어졌다. 그 중에 6명이 하늘나라로 갔고 이제 나와 인천 교동성당에 한 분이 계신다. 가끔씩 만난다.”
-그 분도 같이 북한에 다녀오셨나.
“그 분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힘들다. 우리 나이로 여든 여섯이다.”
-신부님도 우리 나이로 여든 다섯이다.
“난 아직 젊다.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웃음).”
함 신부와의 인터뷰는 내내 유쾌했다. 생각지도 못한 비유와 유머를 쏟아내면서 한국사회, 국제문제에 대한 우려도 간간이 내비쳤다. “4·19 이틀전에 한국으로 발령받았어요. 한국의 근현대사는 거의 직접 봤지요. 제가 처음 도착했을 때 경향신문은 천주교 서울교구 소속이었어요. 독재정권에 의해 폐간됐다 복간됐던 것도 생생하네요.”
인터뷰 도중 그는 “못난 자식이 있다”고 했다. 그가 이끈 곳은 건물 뒤편 정원에 심겨진 느티나무. 작은 팻말엔 ‘사제서품 40주년 기념’이라고 씌여 있었다. 2000년 6월 심을 당시만 해도 삽자루 높이였던 나무가 십수명에게 넉넉한 그늘을 낼 만큼 자라 있었다. 나무를 어루만지던 노 신부는 “참 많은 시간이 지났고 많은 것이 변했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무관심인 것 같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점이자 경계해야 할 점이다. 어려울 때 한국사람들의 단결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런 힘이 우리 스스로를 일으켰지만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오히려 자기밖에 모르는 식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렇지 않나. 심지어 종교도 그런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종교의 위기라는 말도 많이 한다.
“본질에서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과 인간성이다. 천주교, 불교, 기독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양심대로 살고 있는지, 인간답게 살고 있는지를 비춰보고 살펴야 한다. 신문을 봐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봐도 그렇다. 처참하고 가슴아픈 일 투성이 아닌가. 하나같이 인간답지 못한 마음에서, 양심을 거스르는 삶에서 불거진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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