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지난 12월 16일 오후 4시.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의 와인바 피노에는 50여명의 중년 관객들이 모여 앉았다. 조명이 밝혀진 한쪽 무대에는 중견 가수 이치현과 밴드가 자리잡았다. 트레이드 마크인 선글라스를 낀 채 무대에 오른 그는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를 시작으로 자신의 히트곡 ‘당신만이’ 등 10여곡을 들려줬다. 기타와 만돌린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그의 맑고 감미로운 목소리에 취한 듯 몇몇 관객은 양손을 들어 리듬에 맞춰 좌우로 흔들기도 했다. 자그마한 지하 공간은 한시간 반 가량 추억과 음악, 온기로 가득했고 공연이 끝난 뒤 자리에서 일어서는 관객들의 표정엔 푸근함이 넘쳐났다. 모자까지 쓴 멋진 차림의 50대 여성은 “20대로 돌아간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설렜다”며 웃었다.

이날 공연 직전 무대에 오른 이는 1980년대를 풍미했던 밴드 다섯손가락의 리드 보컬이자 피노 운영자인 이두헌(53)이다. 그는 “‘다시 소극장 프로젝트’에 (이치현) 형님같은 거장이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면서 “허름한 공간이지만 음악다운 음악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시 소극장 프로젝트’. SNS를 통해 음악 팬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고 있는 이 공연 프로그램은 두 달전 이두헌이 시작했다. 공연 문화를 바꾸고 풀뿌리 음악의 힘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소극장은 쇼와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에요. 발가벗는 것처럼, 진정성만이 남는 무대지요. 그러다보니 요즘 가수들 보고 소극장 공연을 하자고 하면 다들 겁내요. 기타 한 두대 정도의 최소 편성으로 자기를 오롯이 보여주는 그런 공연을 할 아티스트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죠. 1980년대 들국화는 600회를, 1990년대 김광석은 1000회씩 소극장 공연을 했는데, 이젠 이런 문화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요.”

‘다시 소극장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새롭게 붙였을 뿐, 그는 이같은 ‘운동’을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었다.

요즘 세대에겐 동방신기가 불렀던 ‘풍선’의 원곡자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그가 이끌었던 포크밴드 다섯손가락은 1980년대 젊음의 상징이었다. 1985년 데뷔해 ‘풍선’을 비롯해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새벽기차’ 등 명곡을 남기며 큰 인기를 누렸다. 이두헌은 이후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음악 제작자로 나섰다. 이승환 소속사 사장이기도 했고 신승훈의 일본 진출을 도왔으며 창작뮤지컬을 무대에 올렸다. 소위 ‘잘 나가는’ 제작자였다. 하지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아닌, 상품으로서의 음악을 만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생리에 맞춰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과감히 사업을 접은 뒤에야 그는 음악인으로서 삶의 지향점에 들어맞는 일을 발견하게 됐다. 10년전 시작한 ‘마음 음악회’였다. 따지고 보면 ‘다시 소극장 프로젝트’의 전신이었다.

“우연히 집근처 목공소 주인과 친해지면서 그곳에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통기타 하나 들고 사람들 앞에서 옛 노래들을 부르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행복할 수가 없더라고요.”

발길 닿는 곳, 음악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 노래를 부르는 그의 삶이 시작됐다. 카페나 식당, 막걸리가게, 삼겹살집은 물론이고 수목원, 녹차밭, 펜션 등 기타를 들고 설 수 있는 어느 곳이나 무대가 됐다. 10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만남에서 얻어진 영감은 새로운 곡으로 탄생했다. 한번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수백만원의 개런티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의 공연은 무료였다. 공연에 드는 비용은 물론이고 그의 뜻에 공감해 함께 연주하는 후배 뮤지션들에게 주는 개런티도 모두 그의 주머니에서 나갔다. 다행히 이같은 ‘예술적 투자’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명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공인 경영학과 음악을 접목한 그의 강의는 기업 CEO, 관공서, 군부대 장성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쇼와 거짓이 통하지 않는’ 소극장으로 돌아온 왕년의 ‘다섯손가락’ 보컬 이두헌
‘마음 음악회’를 ‘다시 소극장 프로젝트’로 구체화한 것은 1980년대 대중문화 중흥을 이끌었던 소극장 시대에 대한 일종의 헌사다. ‘다시 소극장 프로젝트’ 뒤에 아티스트의 이름을 붙이는 방식으로 공연의 밀도도 높였다. ‘다시 소극장 프로젝트’ 김민기라면 김민기의 노래만을 들려주는 식이다. 지난 두 달간 그는 대구와 제주, 청주, 태안 등을 다니며 자신의 노래와 김민기의 노래를 목이 쉬도록 불렀다. 그의 열정에 감동한 뮤지션들의 동참도 이어졌다. 이치현·이정선·최성수·박승화 등이 소박한 무대에 함께 했다. 얼마전에는 이승환 밴드의 드러머 최기웅이 이끄는 밴드 매스 아베뉴, 정신과 의사이자 극작가 겸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신동근도 ‘다시 소극장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관객들과 만났다. 서영은·여행스케치·재즈뮤지션 유승호·이승환도 좋은 일이라며 힘을 보태기로 했다.

“소극장 문화가 활발하던 예전엔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 전국구로 유명해지는 가수들이 많이 나왔어요. 부산에 가면 이상우, 광주엔 김원중, 대전에는 신승훈이 있었지요. 우리가 지역으로 공연을 하러 가면 자연스럽게 어울려 함께 노래하고 교류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있는 구조와 기반이 사라져 아쉬워요.”

이 때문에 그는 가는 곳마다 현지의 뮤지션들을 공연에 동참시킨다. 지난 11월 대구 공연에서도 지역에서 유명세를 얻고 있는 뮤지션들이 같이 무대에 섰다.

시쳇말로 ‘돈 안되는 일’에 그가 열정을 쏟아 붓는 이유는 단순하다. 음악을 음악답게 나누고 싶어서다.

“유행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반짝이는 재목들의 공통점이 보여요. 통기타 한대로, 단순한 건반만으로 자신의 음악적 맨얼굴을 보여주는데서 듣는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존 시스템에 들어가면서 그런 맨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돼요. 음악에 화장과 쓸데없는 장식이 자꾸 더해지는게 안타깝지요.”

‘쇼와 거짓이 통하지 않는’ 소극장으로 돌아온 왕년의 ‘다섯손가락’ 보컬 이두헌
그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꿈꾸는 것은 문턱 높은 공연장이 아닌,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공간에서 누구나 음악을 생활로 즐기는 것이다. 1차 목표로 삼은 것은 매일 전국 10곳에서 ‘다시 소극장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공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더 많은 뮤지션들이 참여하고, 더 많은 공간들에서 음악 소리가 울렸으면 좋겠어요. 록, 재즈, 블루스, 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자기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길 바래요. 이게 어느 정도 정착된다면 음악 뿐 아니라 마임, 무용 등 더 넓은 영역으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